kirrie's life

어느 룸펜의 서울나기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

8월 20th, 2008 by kirrie, under 원맨쇼/영화. 2 Comments

길은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눈 쌓인 둔덕들이 자그마한 음영을 만들어 내다가 이내 흰 빛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흰색 포드 승용차가 보인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차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차는 나를 지나쳐 조금 더 달리다가 멈춰서더니, 다시 후진해 내게로 다가왔다.

“어디까지 갑니까?”
“그냥… 다음 마을에서 내려주시면 고맙겠어요.”


..

“멀더, 정말 그 신부의 말을 믿는거에요?”
“왜 믿지 못하죠, 스컬리? 그는 우리의 속임수를 단번에 알아차렸어요.”

멀더는 그 말을 마치더니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당신은 ‘영매’를 믿습니까? 그러니까… 초자연 현상 같은 것들을?”
“글쎄요… 적어도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현상들은 믿는 걸로 해두지요.”
“허, 참. 그런걸 어떻게 판단합니까? 왜 솔직하지 못하죠?”
“단지 난 그런 것들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그런 당신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나요?”
“멀더, 그만해요. 미안해요. 이 남자는 어딘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전혀 보지 못하거든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요? 갑자기 영매라니…”

멀더와 스컬리는 서로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별 일은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환영을 본다고 해서 말이죠.”
“계시 같은거 말이죠?”
“네.”

눈보라는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침묵했고 엔진 소리만 요란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적에 그런 드라마를 본 적이 있어요. 초자연 현상을 조사하는 수사관에 관한 이야기였죠. 외계인도 나오고 괴물도 나오고 유령도, 혹은 그 이상의 설명 불가한 사건도 나오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런걸 보는걸 즐겨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니, 내가 그걸 수년간 계속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흥밋꺼리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인 두 수사관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해 가면서 ‘믿음’ 그 자체를 믿는 모습에 감동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사실 뭘 믿느냐는 중요한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린 모두 서로의 믿음을 갖고 있고 또 그런 믿음들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는다는 행위 그 자체인거죠. 나는 정말 끊임없이 희구하고 경탄하고 싸워서 지켜내며 소중하게 여길 만 한 어떤 것들을 갖고 있을까…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을까… 온 세계가 나의 믿음에 대해 적대적일 때에도 나는 믿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멀더 그리고 스컬리, 그래서 말이죠.”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나는 당신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당신들은 지난 십년 간 수많은 멸시와 모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고 있군요. 멀더, 당신의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믿기를 바래요. 스컬리, 나는 아직 자기의 꼬리를 무는 뱀을 기억해요. 피해자가 멀더를 의지하고 멀더가 당신을 의지한다면, 과연 당신은 누굴 의지하고 있나요?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단 한 번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의 믿음 또한 나는 존경해요.”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길의 끝에서 마을이 나타났다.


..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우린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덕분에 따뜻하게 올 수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멋적게 쳐다보았다.

“멀더, 할 말이 있어요. 핸드폰 잘 챙겨요.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스컬리에게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스컬리. 포기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손을 흔들며 그들과 멀어져 갔다. 뱃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서 길을 걷기가 수월해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눈보라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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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들의 기록
스프는 있습니다. (김진혁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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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고은지  on 10월 10th, 2008

선배의 글을 보고나니 괜시리 ‘나는 믿고싶다’란 문구가 좋았던 이유를 조금 알것도 같아요.

kirrie  on 10월 10th, 2008

멀더의 창고 같은 사무실 벽에 항상 붙어 있던 I Want To Believe 포스터. 매니악한 사람들한테만 숨겨진 이스터 에그지만, 에피소드가 늘어 날 때마다 멀더의 사무실 속 소품들도 조금씩 바뀐다는거 알고 있는지.

어제는 잠들려다가 갑자기 사는게 너무 겁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신자들의 시대에, 나는 뭘 믿고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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