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트위터를 주로 합니다. 마음이 굶주리지 않으면 생활이 절실하지 않은 법인가봐요. 백사십자만 써도 되는 트위터는, 그래서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마시듯이 너무 쉽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블로그에 접속해서 '안방'을 누르고 이메일과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 글쓰기를 클릭하지요. 그 다음부터 머리 속은 화이트아웃이 되요. 쓸 것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치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스트레인지 어트랙터. 유한한 삶 속에서 완전히 같은 사건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나 멀리서 보면 각각의 사건이 겹쳐서 하나의 트랙 안으로 포함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트랙 위와 트랙 밖. 하나님은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꺼에요. 적어도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란 인간은 인정하지 않을껍니다. 다시 가난해지고 싶어요. 바싹 마르고 싶어요. 절실해지고 싶어요. 어떤 사람에겐 절망이 내게는 희망이라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모든 종류의 살인에 반대하며, 그러므로 사형제도 또한 반대한다. 또한 인권은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 어미로부터 태어나는 순간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늘 나는 처음으로 이러한 결심히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한 남성에게 징역 12년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리 속에서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에 등장하는 핏빛 가득한 고어적 영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통에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상상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문조차도 그에게는 너무 자비로운 형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루 종일 여기저기로 퍼날라지는 성폭행 당시의 사건기록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일부에서 캡춰한 피해 어린이의 상흔을 클로즈업한 이미지들과 시간별로 자세하게 정리된 사건 당일의 리얼한 묘사들은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했다. 그러한 묘사들을 통해서 마치 내 자신이 그 옆에 무기력하게 서서 사건의 방조자가 된 것 같은, 엿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어른들은 (특히 성인 남성들은) 모두 사건의 방조자다, 많던 적던간에. 그리고 이렇게 재생산되는 참혹한 사건기록은 어딘지 모르게 대상을 (그 대상은 물건이 아니라 어린아이였다.) 탐욕스럽게 소비했던 가해자의 시선과 닮아 있는 것 같다. 제발 이제 그만 좀 퍼나르고, 누구를 가운데두고 이 일을 되새겨야 하는지 스스로들 조용히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피해 어린아이의 상처가 부디 곱게, 단단히 아물기를 빈다. 이런 일에 항상 가해자인 남자 어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고, 이 지옥같은 세상에 너를 두고 한 눈을 팔아 정말 죽을만큼 미안하다고.
개인적으로 그 씨발새끼한테 진심으로 집행유예를 내리고 싶다. 이마와 두 뺨에 큼지막하게 '강간범'이라고 문신을 새겨서, 그런 다음 명동 한 복판에서 12년 동안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고 싶다.
오랫만에 블로그를 찾는다. 내가 최근 블로그를 찾는 경우는 페이스북 링크를 클릭하기 위한 것을 빼고는 거의 없다. 트위터도 가끔 하는데, 예상외로 생각을 140자 내로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지난 일요일에는 워냉과 워냉 회사 대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낚시를 다녀왔다. 바다 갯바위 낚시였는데, 나는 반팔에 모자도 없이 가서 새까맣게 타버렸다. 덕분에 이번주 사무실 개발팀은 내내 나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더 몇 주 전에는 사랑니를 뽑았다. 뽑는 도중이나 마취가 풀리고 난 직후라던가, 그로부터 이삼일까지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소독을 위해 그 후에 한번 더 치과를 방문했었고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게 기분 나쁠 정도라는 표정으로 '당연히 안아프게 뽑아드려야죠. 그리고 사랑니가 곧게 잘 나서 수월했어요.' 하더라는. 사랑니를 뽑고 솜뭉치로 지혈하며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이제 사랑같은건 다신 못할꺼야.' 하고 되뇌여봤는데, 사랑니를 뽑았다고 사랑을 못하게 되는건 아닐테고 그냥 있던게 사라져서 허전한 것일테다. '앓던 이 빠지듯'이란 속담, 누가 처음 생각해낸 것인지는 몰라도 참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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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좀 깎아요, 그 잘생긴 얼굴 가지고 왜 그런데.'
하고 에밀리는 톰에게 질문한다. 톰은 웃으며
'예술가의 마음에 대해서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이 만화를 먼저 보세요.'
한다. 두컷짜리 짧은 만화인데, 주인이 자신의 개 '진져'에게 야단을 친다. '너 이놈 자식 쓰레기통 뒤지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어!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그 위에는 '당신이 말하는 것' 이라고 쓰여 있다. 다음 컷에는 '당신의 개가 듣는 것' 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개는 'XD#@$DFG 진져 #$DFSFD!!...' 라고.
역시 사람 (예술가나 사람이나) 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다. 톰은 '당신의 모든 질문 가운데서 "그 잘생긴 얼굴" 밖에는 안보이는군요.' 하고 웃는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BBC 월드 뉴스에서 김대중 서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술집 안은 시끄러웠고 애초에 화면만 보는 텔레비젼이었으므로, 게다가 뉴스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한마디 알아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고 다시 떴다. 이번에는 티아라 쇼 시즌 4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그가 그녀의 쇼에 출연했을 당시를 회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여섯, 열넷, 열여섯살의 미국 애들이 나왔다. 타이틀로는 '(오바마가 미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미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열여섯살의 데이비드' 뭐 이런 것이었다. 티아라는 그 중에 열여섯살 먹은 흑인 소녀에게 대통령 선거 당시 가족이 참여했던 오바마 선거 유세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내가 죽기 전에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다니 참 감개가 무량하다'고 하셨어요."
티아라의 눈물이거나 열여섯살 흑인 소녀의 감회 같은건 사실 우리가 자본을 소비하는 새로운 양태라고 생각한다. 체의 티셔츠이거나 자서전 같은게 '소비'되는 것처럼. 그런데 좋은 소비와 나쁜 소비가 있을까. 에이 씨발, 그런게 어딨어. 사는거 자체가 다른 존재를 씹어먹는 죄악의 연속인데, 소비는 죄다 나쁜거지. 어쨌든.
그래도 그 눈물을 믿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순도 구십구쩜구퍼센트의 개뻥이겠으나, 그래도 영쩜영일퍼센트 정도의 진실이란게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거다. 삼성카드로 엘지데이콤이나 아이엔아이, 모빌리언스 같은 결제대행사를 통해 대략 결제당 이퍼센트에서 사퍼센트 사이의 수수료를 물고 저 머나먼 나라의 머나먼 가난에 기부하는, 쪼금 아이러니컬한 상태를 인정하고 싶은거다.
이런 상황에서 당위를 말하는건 정당하다. 왜냐하면 당위가 당위가 아니니까. 아무도 선하게 살지 않는데, 선하게 살자는 당위를 말하는건 혁명을 하자는거다. 혁명을 하자는건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씨발 그럼 애새끼들도 바꾸게?), 내적으로는 보수지만 외적으로는 진보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라는게 아니다. 자기 자신부터가 원자수준에서 변하하자는거다. 이제 제발 '유년기의 끝'을 보자는거다. 꼰대들이 아무리 졸라게 세상을 부여잡아도 애들은 점점 더 이해 불가능하게 변한다. 어른들을 능가한다.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란 이야기다.
테드 창이 그랬다. 니가 인정하건 인정할 수 없건 간에 우리는 이미 변화의 도중에 있으며, 오직 환상 속에서 귀환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세상을 이전 상태로 고정시키려고 시도한다. 나는 그걸 정치적으로 (누가 뭐라든!) 읽었으며, 그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제도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정치다.
2010/03/11 12:03 PERMALINK M/D REPLY
자주 들리께요.~ ㅎㅎ나의 아이퐁에서 보냄.
2010/03/11 18:17 PERMALINK M/D
엇, 아이퐁에서 댓글이... 아 댓글은 달리는구나. ㅎㅎ
적막한 블로그에 친히 왕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