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낮잠 시간에 꿈을 꾸었거든. 어느 무료한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글쎄 그게 네 전화지 뭐니. '형, 뭐헙니까. 내 지금 화곡동인데 배고파 죽것소. 얼렁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사주소.' 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아, 네, 네. 지금 당장 달려갑죠.' 하고 과장님 한테는 거래처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고 뻥치고선 화곡동으로 달려가는거지. 아, 냄새가 어찌 나던지 순대국 하나 얼른 사주고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는데, 등을 미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아주 혼났다. 완전 구렁이 수준이야. 너는 엄살피우면서 '형, 나 등 아파. 살살 밀어.' 하면, 또 나는 손자국 나게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다 큰 놈 자식이 이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하는거지.
꿈이고 뭐고 잘 안믿는 성격이지만서도, 간만에 네 소식 전해 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생각에 일은 손에 안잡히고 해서 몰래 휴게실 구석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우리 애 한참 못봤지?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간단다. 현경이는 벌써부터 무슨 조기 교육인가 뭔가 시킨다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내 얇은 월급봉투 보고 한숨 내쉬는 처지지만, 언제는 우리가 부유해서 행복했더냐. 함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던거지.
동훈이는 미국에 거 뭐시냐 무슨 좋은 대학교 닥터 한다고 준비하더니 그게 잘 안된 모양이고. 동훈이 처만 맨날 내게 전화해서 자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내가 언제 한 번 동훈이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야겠어. 까짓꺼 닥터야 나중에 해도 하는거고 먼저 가정을 챙겨야하는거 아니겠니. 지네 아부지가 물려준 재산이 꽤 된다지만 그것도 까먹다 보면 금방이잖아. 요즘엔 동훈이 처가 이것저것 많이 살림을 줄이는 것 같더라. 불쌍하고 고맙기도 하지. 나는 사실 동훈이 이놈보다는 동훈이 처가 더 살갑고 좋다.
참, 너 철민이형 기억나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우리 학생회실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으면 찾아와서 국밥에 소주 사주던 형. 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형 보안법으로 끌려가서 계속 재판을 받았거든. 이래저래 십년도 한참 넘으면서 질질 끌었는데, 그 재판 드디어 무혐의가 되어서 이번에 나오게 되었단다. 법대 민규가 철민이형 재판중에 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되어서, 사실은 민규가 정말 고생했지, 가망없는 그 싸움 묵묵히 혼자서 다 끌고 결국엔 이겨버렸으니까. 시퍼렇게 젊은 놈이 재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벌써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었단다. 며칠전에 민규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는게 결국 그놈 울컥하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그러더라. '형, 내가 왜 이 좃같은 대한민국에서 변호사질 하려고 그렇게 이 악물었는지 알아요? 철민이형이 너무 불쌍해서, 철민이형 내 손으로 변호해주고 싶어서 변호사 됐어요. 나 방세도 밥값도 없이 친구 하숙방 전전할때 철민이형이 어느 날은 오만원, 어느 날은 이만원 그렇게 쥐어주는거야. 자기도 거지같이 다니는 주제에 뭔 돈인가 싶었는데, 그게 글쎄 가끔 투쟁 없는 날에 공사판에 가서 벌어 온 돈 나한테 다 줬던거에요...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
이놈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면 그 다음날 발목이 시큰거려서 자주는 못나가지만서도, 이제 신문보다 인터넷 만화 보면서 낄낄대는게 하루 낙이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돌아올 너 기다리면서 우리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네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지?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 '생활투쟁'해야한다고.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이어야 한다고.
에고 과장님이 휴게실 밖에서 나한테 손가락질 하고 있어. 얼른 마저 쓰고 퇴근준비 해야겠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이 편지는 일단 내 우체통 서랍에 넣어 둘께. 돌아 오면 몽창 다 모아서 한아름 안겨줘야지.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