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왼쪽 어금니가 계속 아프다. 월요일에는 그냥 이상한 느낌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확실히 자각할 정도로 욱신거린다. (가끔) 그런데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하니까 거짓말처럼 괜찮아지는걸까. 한번 이를 갈고 금속의치를 박아 넣은 뒤로 치과와 관련된 치료는 빨리 받아야 겠다는 결심을 한 터였다. 그런데도 이 아픔은 뭔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사실은 이가 아픈게 아니라 잇몸이 아픈 것에 더 가깝고, 잇몸이라기보다는 턱과 식도 근처 어림이 아픈게 더 정확하다. 이런저런 것 때문에 요즘 가끔 양치질을 하다 말고 거울을 통해 입 안을 들여다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온통 누렇다. 군대 다녀온 뒤로는 양치질도 하루에 두번씩 하는데(세번은 도저히 버거워서), 오히려 그 전보다 커피라던가 흡연량이 늘어서 그런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구취가 심하지는 않다. 구취는 오히려 양치질보다는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겼을때 심해진다고 한다. 한동안 알콜섭취가 뜸해졌고 (정말 하는 말인데, 군대가기 전보다 술이 많이 약해졌다. 자주 마시기도 싫고..)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엔 정말 괴상한 생활을 하고 덕분에 내 몸 어딘가가 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증세는 이렇다. 하루에 밥을 한끼 이상 먹으면 몸이 견디질 못한다. (속이 좋지 않다.) 고기를 먹으면 영락없이 다음 날은 설사를 한다. 특히 삼겹살은 쥐약이다. 그래서 계속 식욕이 없다. 힘을 빼고 있으면 오른손이 간간히 떨린다. 이건 마우스를 하도 클릭해서 그렇다. (그래서 마우스도 새로 사고, 마우스 패드도 손목 받침이 되어 있는걸로 바꿨더니 좀 부담이 덜한 느낌) 가끔 눈물이 나는데 (심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눈이 너무 따갑다.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왼쪽 어금니 부근도 아프고. 어휴.

어제는 티븨에서 대관령 근처의 양목장을 구경시켜줬다. 보는 순간 “내가 양띤데”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양들이 무척 귀여웠다. 발정기가 되어서 숫놈끼리 싸우는걸 두고 리포터가 호들갑스럽게 “온순할 줄 알았던 양이 저렇게 사나워.. 어쩌구..” 하는 말을 하던데,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모든게 유쾌하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한번에 두가지 상반된 감정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유쾌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비교적 적절한 묘사인 것 같다. 제발 날 때리지 말아주세요, 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지금 막.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수학시간때 배웠던 함수, 꼭 그런 기분이 든다. 인풋값이 있으면 특정한 아웃풋이 항상 있다. 그러나 왜 인풋값이 그렇게 아웃풋 되야 하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캡슐화. 나 자신을 캡슐화하자.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내게서 인식의 문제는, 항상 내 자신이 인식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조작된, 그러니까 두개의 나를 느낀다. 인식하는 나, 그 인식하는 나를 인식하는 나, 그리고 대상. 요즘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인식의 대상이 주체성을 지닌다는 가장 간명한 사실이 대체 어떠한 심적 상태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이 말은 다음의 쉬운 비유로 치환된다. “남성으로서의 내가 포르노를 볼 때, 거기에 출연하는 여배우의 자기주체성”이다. 어떤(Some) 여성은 모든 상황에서 자기주체성을 긍정하는 존재여야만 한다. 물론 남성도 그렇다. 그러나 포르노에서 여성은 두번 자기주체성을 부정당한다. 한번은 상대배역의 남성(혹은 남성들), 두번째는 나에 의해서, 욕망의 대상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선 간단한 논리다. 그리고 이 논리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본 아래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으로써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귀여움받는 대상이 아니라 귀여운 주체여야하고, 장애인은 보살핌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주 쉽고, 간단하고, 단단한 논리. 그러나 난 왜 그 말이 잘 와닿지가 않는걸까, 앵무새처럼 외우긴 잘하면서. 왜 내게는 그 모든게 다 대상일까,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다. 주체가 존재하기는 하는걸까? 나에 의해서 단 한번도 인식된 적이 없는 나는, 과연 한번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던걸까? 여기서부터 혼돈이 시작된다. 인식의 문제. 모든걸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해버리는 서양 인식론의 사고기반. 포스트모더니즘조차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본다. 대상의 주체성. 웃기는 말이죠. 말대로 하자면 대상은 대상이고 주체는 주첸데, 대상의 주체성이란 논리적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 아예 이런 틀 자체를 부정해야한다. 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니까 여기서 이 얘긴 그만.

쓰기 시작했을때는 새벽이었는데, 이미 훤한 아침이 되었다. 원래는 새벽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새벽, 이라는 부들부들거리는 힘찬 상상력이, 이제는 어떻게 내 내부에서 죽어가는지. 왜 새벽이 오는게 두려워졌는지. 나는 변할 수 있는지. 나는 변할 수 있는지. 정말 나는 변할 수 있는지. 갑자기 이 얘기 하니까 막 변하고 싶다. 오오, 이 말 한마디에 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다 변해있을 것 같다. 갑자기 울컥 목이 메인다. 나는 변할 수 있다. 나는 변할 수 있다, 고 주문을 외운다. 이제 누구도 날 열어 볼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렇게,

이, 도망자들의 나라에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신, 왜 멈춰있지요? 그러다간 잡혀요. 어서 뛰세요, 어서!

새벽”에 대한 3개의 생각

  1. 빠바바 빠밤~ 빠바바 빠밤~ 빠바바 빠밤~ 빠바바바!!!! 스타워즈 보고 오는길! 멋진 장난감들이 잔뜩 나옴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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