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Ketil Bjornstad

점점 연말기분, 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다.
주위의 분위기도 그렇고, 날짜가 지나가는 것도 왠지 기계적으로, 어제 다음이 오늘 오늘 다음이 내일, 하는 식이어서 지금이 12월이고 (게다가 벌써 중순에 가까워지고) 눈이 오고 하는 것도 즐겁지가 않다. 내가 그 모습 안으로 끼어드는 것이 어쩐지 정당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일요일은 언제나 하루 종일 잠만 잔다. 또 슬슬 라이프사이클이 붕괴되고 있다. 지금은 새벽 한시 사십분인데, 아까 저녁 먹고 또 너무 졸려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가 이제야 일어난 것이다.
간만에,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 낮, 에 잠들었을때는 꿈을 꾸지 않았으나 (혹은 기억도 못할만큼 피곤했었으나) 저녁에 들었던 잠에서 꾼 꿈은 어렴풋하게 기억할 수 있다. 와, 간만에 야한 꿈을 꾸었다. 그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라 깨고 나니 좀 민망하기도 하다. 잔뜩 욕구불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꿈 속에서 내가 상당히 비범한(?) 성행위에 몰입해 있기도 해서 혹시 내 성향이란게 그런게 아닐까 하는 가벼운 불안감도 있고, 그렇다. 구체적으로는, 퍼블릭 도메인이니 구구절절이 그때 그의 그것은 어땠고.. 하는 식으로는 말 못하고.. ㅎㅎㅎ 그런데 어쩐지 조만간 친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게 되면 이 얘길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주헌이는 괴상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다, 는 소문이 은은하게 퍼질지 모르겠다. 그러라고 하지 뭐.

영혼탐색기로 어제는 에릭 크립튼의 것들을 잔뜩 받았고, 또 그 이전에는 뉴스그룹에서 산울림 전집과 패닉과(참, 패닉 돌아온다던데..) 넥스트와 퀸의 것들을 잔뜩 다운받아서 한동안 정리하느라 고생했다. 산울림은 정말 최고였다. 그걸 설명한다는 것은 웃긴 짓이고… 넥스트는 간만에 들어보니 최악. 신해철이는 그냥 ‘너에게 전화를 하려다, 수화기를 놓았네..’ 시절이 최고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비범하며 여러가지 것에 대해서 고뇌하는 인간인지를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알리려는 것 같다. 얼마전에 맥주홀릭님 블로그에서 김윤아에 대한 아쉬움, 같은, 혹은 짜증남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고 그 아래 달린 샤XXX님의 댓글에서 무릎을 치고 말았는데, ‘감동없는 매혹’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나는 매우 맞다고 생각한다. 감동없는 매혹. 너무 무섭다.

어쨌든 Ketil. 사실은 이걸 틀어 놓으니 연말분위기가 난다, 는 이야길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어쩌구 하는 음악은 아니다. 캐롤도 아니고, 연말에만 자주 들리는 곡도 아닌데 그냥 이 말랑말랑한 피아노 멜로디를 들으니, 문득 간간히 눈발이 나리는 강남역이나 밤이 깊어도 사람들 헤어질지 모르는 종로, 같은게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연말에 간간히 눈발 나리는 강남역에 가봤다거나, 헤어질지 모르는 종로에 있었다는 건 아니다. 그냥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분위기다.

요즘엔 연말만 되면 솔로부대 단결하라 어쩌구, 올해도 케빈과 함께 뭐 이런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나도는데, 그런 얘긴 쉽게 해선 안된다. 크리스마스야 뭐 특별한 날이겠냐만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그 날에 애틋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왠지 겨울이 더 추운 법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포토샵을 키고 이미지를 보정하며, Ketil을 듣다가 강남역에서 누군가와 반갑게 조우하는 나 자신을 상상할 뿐이다.
(그런데 연말에 강남역은 왠지 지옥같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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