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내자

지금은 새벽 세시 반이고 나는 내일 열시에 서양근대철학사 수업이 있으며 모든 수업이 끝나고도 불이나게 집으로 되돌아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뭐라고 해도 주말엔 일을 할 수가 없다. 어젠 술을 먹느라 (정말 간만에!) 하루를 보냈고 오늘은 게시판의 download를 위한 스크립트를 몇 줄 작성하다가 그만 시들해져버렸다. 정말 뭘 할 수가 없다, 라.

토요일. 계획은 있었지만 매물이 올라오지 않아서 벼르고 있던 바이저 프리즘이 마침내 팜사용자그룹에 올라와서 뒤도 안돌아보고 문자를 보내 직거래 약속을 잡았다. 2시에 교대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지난밤에 철야로 일을 하는 바람에 1시 반에 일어나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고 약속을 3시로 조정했다. 만나서 물건을 확인하고 돈을 건내고 계속 늦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이 사람은 다신 보지 않을 것이다. 미안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까? 이건 너무 냉정한 일인가?

사당동 야밤 DJ와 종로에서 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위해 교대역에서 3호선을 탔다. 너무 일찍 종로에 나갔던터라 교보문고에서 책을 골랐다. 요즘 한창 여기저기서 말이 많은 조엘 온 소프트웨어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을 샀다. 조엘 온, 이야 예전부터 대체 무슨 책이길래, 하면서 사볼까 말까 했기 때문에 구입했고(2.2만원인데, yes24에선 1.9만원인가 했다.), 현장비평가.. 는 구효서의 작품이 실려 있어서 샀다. 이제 구효서나 박상우 정도면 중견작가가 되는가 싶다. 내가 하도 요즘 책을 안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대체 박상우는 뭐하는거지? 나는 박상우를 참 좋아하는데 마지막으로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이후론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안타깝다. 나는 독산동 천사의 시를 박상우 작품 가운데 제일로 꼽는다. 그걸 읽으면서 두번을 울었다. 아마 지금 또 본다고 해도 울 것 같다. 어쨌든 구효서 외에도 조성기(이분은 숭실대 문창과에 교수로 재직중인데, 언젠가 기묘한 일로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윤대녕, 하성란 등등의 낯익은 이름이 있다. 정이현은 요즘에 한겨례에 기고하는 칼럼때문에 호기심이 생긴다. 이 사람은 (조작된 이미지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예쁘다.

그러고 어쩌고 있다 보니까 DJ로부터 도착했다는 전화가 와서 만난 다음에 당구장엘 갔다. 하도 오랜만에 치는 당구라 고작 두 게임 치다가 둘 다 지쳐버렸다. 이젠 뭘 해도 웃기지도 않는다. 나는 내내 말겐세이를 놓았고 녀석은 겐세이 족족 다 걸려 넘어졌다. 당구실력은 줄어도 말겐세이 실력은 늘은 것 같다.

그리고 연탄구이집인가에 가서 뜨끈뜨끈한 온돌 의자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쏘주 두 병을 깠다. 돼지갈빈가를 시켰는데 댑따 맛이 없었다. 우리는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로 공격적으로 대화를 나눴지만, 한개도 기억나는게 없다. 자신이 조금씩 소모되는 것 같다는 녀석의 말에, 뜬금없이 나는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다운받아서 봤던 스윙걸즈 얘기를 꺼냈고 그러다가 녀석은 상현이형 이야기를 했다. 마치 대화가 실체를 가지고 주점 안을 배회하다가 옆 테이블의 대화와 섞이고 부딪혀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옆 테이블에 앉았던 커플이, 몰랐는데, 주점을 나서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노라니까 뜬금없이 어울리지도 않는 커플티를 입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둘의 뒷통수를 시원하게 때리고 싶었다. 물론 나는 쏘주만 마셨다. 더워서 그런지 취기가 심하게 올라왔다.

2차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그땐 거의 인사불성 정도여서 뭔 얘길 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나는 내내 "여기 맥주맛이 원랜 안이랬는데." 라고 변명했던 것 같다.

마지막 압권이었던 부분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30분에 한대씩 오는 9600번 좌석버스를 기다리던 것이었다. 녀석과 나는 완전 취해버려서 엄청 사람이 많은 가운데서도 고래고래 차가 오네 안오네 지금 몇시네 너 어디있네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뛰어다녔다. 혹시 지난 토요일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셨던 분이 이 글을 본다면 시끄럽게 굴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그러다가 버스가 와서 내가 먼저 버스를 타고 녀석과 바이바이 했다. 9600번 좌석버스는 우리 동네를 경유해서 부천시청까지 가는 버슨데, 오호라 간만에 종점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돌아 나오는 버스가 있어서 우여곡절끝에 집에 무사히 당도했다.

오는 길에 녀석한테 잘 들어가나 전화를 해봤더니 전화기가 꺼져있다고 해서, "바람이 멈추는 곳에 서라." 는 문자를 보냈다. 잘 받았는지 못받았는지 답장이 없는걸 보니 못받은 것 같다.

이겨내자”에 대한 5개의 생각

  1. "어차피 이 사람은 다신 보지 않을 것이다" 절묘합니다. 그 뻘쭘함이란… h**p://www.hof.pe.kr/wp/archives/284/

    "이제 곧 추석이군요^^" 로 끝나는 답멜 보냈는데 "잘 받았는지 못받았는지" 궁금하네요. 천둥새1.5로 업뎃하니 stmp 에러가 나더라고요.; 고치긴 했습니다만.

  2. 그 정류장에서 좀 더 걸어가서 망치든 남자가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서면 산울림 소극장 가는 버스 있어요. 산울림 소극장 앞에서 내려서 꽃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서 홍대 갈비집 밀집지역 쪽으로 쭉 걸어가다 잘 살펴보면, 지하에서 음악소리가 무척 크게 들리는 데가 있어요. 세종문화회관 맥주는 확실히 맛이 없어졌어요. 다음에는 그쪽에서 맥주 소주 기타등등..바람이 시원하게 부는곳으로 오세요.

  3. lunamoth// 아, 아마도 집에 가서 메일 확인하면 보내주신 편지가 도착해 있겠죠? 그러나저러나 이런 한담을 이메일로 보내본 것도 얼마만인지… 앞으로 종종 메일 보낼께요. ㅎㅎ

    satii//읽으셨다시피 이런 이유로 일요일은 내내 죽은듯이 지냈음.. ㅎㅎ 안그래도 오늘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제야 수업이 다 끝났어요. 지금 전화 겁니다!!

    Jh//이상한 과일들??? 그런데 이상한건요 가끔 가본적도 없는 이상한 간판의 바에서 누군가와 담배 빡빡 피워가며 맥주 마시는 모습이 떠오른단 말입니다. 그건 분명 미래의 일일텐데, 어쩐지 내게는 과거의 기억처럼 느껴져요. 호호호.

  4. 그날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둘이 심하게 취해버림은…
    갑자기 우리가 감성적이 되어서도 아니요.
    억눌러 왔던 호기가 발동한것도 아니요.
    그 뜨끈뜨끈한 연탄갈비집의 매캐한 고온도 아니요.

    이제 스물 여덟을 바라보는 나이의 허약해진 육체탓이라.
    운동하자.
    그리고 술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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