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나의 힘

기형도는 한동안 거리에서 시를 쓰며 그것은 고통이라고 적었다. 매일매일 만나는 흰 벽과 책상과 사람들, 소음들로부터 떨어져 생경한 거리의 벤치에 앉아 낯선 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시를 적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낯선 것을 경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그는 거리에서 우선 불안과 만났을 것이다. 불안. 정처 없음. 멈춰 있는 것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으로. 완전히 발현된 현사실성으로부터 가능성으로, 부족함과 비어 있음과 궁핍과 누추함으로 그는 걸어 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주어진 미지의 낱말들을 만났을 것이다. 세계가 존재로 가득 차 있다면 거기엔 운동이 있을 수 없고, 핀에 고정된 박제된 나비와 같이, 거기서 의미는 완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시인은 무궁한 쓸 것을 만날 수 있다. 그는 그랬다. 고통이 쾌감으로 바뀌는 지점과 불안이 힘의 원동력이, 그러니까 말의 힘이 되는 그 지점을 발견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일신의 안위와 자족을 위해, 육신의 안정함을 위해 골몰하고 나태했던 나는 나를 완전히 비우지 못했다. 오히려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쓸 적에 나는 매우 작은 나였다. 나는 불안했고 나의 맥박은 쉴 사이 없이 고동쳤다. 채우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채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쓴 글들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지금은 그 반대다. 현재 블로그에 쓴 내 글들은 전부 다 오물들이다.

지금 나는 낯선 곳에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서른이고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나에겐 꿈이 없다. 나는 꿈 같은 것, 희망이나 행복을 믿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쓸데없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기를 강요당한다.

엊그제 외삼촌을 만났다. 그는 내가 사고의 현실성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이를테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다. 이성주의와 이념의 관념성에 질식한 자다. 나의 거의 두 배를 살아 온, 게다가 한때는 더없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아무런 이의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현실은 확고하며 미래는 현재와 맞-이어져 하루하루가 그 길의 위에 놓여져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가장 무섭다. 이를테면 똑똑한 사람, 강력한 사람, 이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이루는 사람.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지금 나는 낯선 곳이다. 창문은 열려 있고 집에서 듣기 힘든 굉음의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경적… 동요하고 있다. 그릇에 물이 요동쳐 흘러 넘치고 있다. 나는 그 안에서 중심을 흩뜨리고 전복을 꾀한다. 불안하다. 심히 불안하다. 고정된 희망이 없으므로 불안하다. 기만적인 행복을 거부함으로 불안하다. 불안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며 움직일 것이다. 나는 그 무엇도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나의 속성은 불안이다. 나는 불안을 이용할 것이다. 나는 불안과 입맞출 것이다. 내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나의 힘이다.

유월제 리플렛


숭실대 국문과 82학번 박래전 열사 추모제 리플렛. 우리에겐 올 해도 이 모든 것을 부여잡고 견뎌야 할 의무가 있다.
처음엔 좀 더 강렬한 이미지로 작업하려고 했으나 (분신 현장 사진이라던가..), 너무 심하다는 의견이 많아서 절충했음.

내가 좋아하는 소리

함석 처마에 (요즘엔 함석 대신에 알루미늄을 쓰지만) 여린 비 내리는 소리.
슬림 어쿠스틱 기타 조용히 튕기는 소리.
새벽에 문자가 와서 ‘딩-동’ 하는 소리.
한 여름 아득하게 먼 곳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
가을에 살며시 바람이 불어 낙옆이 소슬거리는 소리.
새벽에 엄마가 설거지 하면서 조용히 부르는 찬송가 소리.

이상한 밴드의 이상한 댄스음악

얼마 전에 MBC에서 일요일에 하는 진실 혹은 거짓인가.. 하는 프로에서
영국의 음악그룹인 ‘첨바왐바(Chumbawamba)’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귀에 익은 음악의 뒷편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손이 불끈 쥐어졌다. (그나저나 오락프로에서 이런 내용이 방영되다니
놀라울 뿐이다.)

관계의 최상급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 역지사지 일
것이다. 영어의 숙어 가운데 ‘put yourself in the other person’s shoes’ 즉, ‘남의
신을 신어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역지사지의 개념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발에 잘 맞지도 않는 남의 신을 신어 본다는 것은 그만큼 역지사지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이 노동자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 영국인이 아닌 우리가 리버풀항만노동자들의
절규에 동참한다는 것, 천재지변에 신음하는 동남아시아 인민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
언제 폭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 중동 어린이의 불안함을 공유한다는 것은 모두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래, 가장 현명한 자가 있다면 그는 쇼펜하우어식의 천재일 것이다. 신적 직관을 인간의 몸에
담고 세계를 꿰뚫어 사물을 보편으로 경험하는 자. 그에게 세상은 이질적이고 불편한 대립자들로
가득찬 곳이 아니라, 대립을 넘어 하나의 전체인 세계이다.
그 아래 단계는 깊고 끈질긴 헤아림을 통해 동일성을 체득한 자 – 철학하는 자이다. 그에게는
물론 직관 같은 것은 없다. 그는, 그러나, 합일의 가능성을 믿는다. 근대의 사유, 차등하는 사유,
구분짓고 전체에서 ‘나’를 분리해 내고 ‘너’를 존재의 저편에 유기하는 사유가 있었다.
철학하는 자는 끝내 이 대립을 끝장내고 찟긴 ‘너’와 ‘나’를 하나로 기워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하는 자는 경험하지 않아도 대립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 다음으로는 경험을 통해서만 ‘아는’ 자가 있다. 고통받는 타인이 바로 자기임을,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에게 세계는 닫혀있으며, 어둠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폭력의 세월은 닥쳐온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주체로 남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타인에 의해서 언젠가 그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런 후에야 그는 간신히 자신의 공간에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경험해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 이 자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지함이 순수함을 의미한다면, 그래도 좋겠지만, 이 자의 무지함은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신적 직관을 갖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므로 이런 경우는 논외로 한다고 하고, 숙고를 통해
하나됨에 이르는 철학하는 자의 길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내가 비정규직이 아니더라도, 지진이나 태풍에 상처입지 않더라도, 전쟁의
참화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그런 자리에 내가 있다면 나 또한 같은
고통을 받게 되리란 것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로 알리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연대는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함께 행동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세계을 회복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5 : 18

“작은 유리병에 담긴 채 섭씨 6도로 유지되는 냉장고에 12년 동안 방치된 올름이 한 마리 있었다. 나중에 꺼내보니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해부를 해보니 소화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올름은 100년을 산다고 한다. 동굴의 차가운 물에서 거의
먹지도 않고 살아가는 동물이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바깥에 비가 내릴 때 흐름만 약간 바뀌는, 밤도 낮도 없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에게 백년, 즉 36,500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피해야 할 적도 없으므로 거의 방해받지 않은 채 세월을
견디는 것일 뿐이다. 올름은 그저 멸종 대신 망각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이로운 생명’ – 팀 플래너리

17 : 37

미안하다. 스크램블 에그하고 베이컨하고 토마토 구운거랑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비싼 커피를 마셨다. 요즘 돈이 너무 없어서 콩다방도 못간다. 그래서 인스턴트 커피를 프림이랑 설탕도 안넣고 옅게 타서 마시지. 간만에, 너무 맛있는 커피를 먹어서 염치 불구하고 석잔인가.. 넉잔을 연속으로 리필했지. 눈물이 날 뻔 했다.

봄인데도 너무 춥고, 마음이 시렵다. 따뜻한 커피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난 알아버렸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유서를 쓴다던가 마음에 공황이 온다던가 감정이 심하게 요동한다던가 그런건 전혀 없고, 대신에 자살의 방법만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돼요. 관자놀이에 느껴지는 총구의 서늘한 느낌, 아니면 손목을 긋는다던가, 약을 먹는 생각도 하고… 쓸데없이 디테일에 너무 집중하는건 아닌가 (웃음) 하지만 어떤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자신이 없어요. 자살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고…”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 지네…

“그런데 이미, 한 육개월 이상 연락도 없고 만나지도 않는 관계가 여전히 친구인건가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요.) 그건 나중 얘기고… 나는 지금 당장 내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댈 사람이 필요한거에요. (어, 그럼 나도 친구?) 아니. 당신은 묻기만 하고 자기 얘긴 안하잖아.”

—>

건물의 하수도 공사인가 뭔가를 한다고 며칠 전부터 착암기 소리가 요란하다. 휴일은 좀 멈춰 주어도 좋으련만, 하루 반을 뜬 눈으로 지새고 술 한 잔을 마시고서 죽은 것처럼 잠들려던 계획이 소음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잠들고 만다. 신문지 맛이 나는 잠이다. 일을 하는 것 같은 잠. 잠깐 제주항공의 프로펠러 여객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16 : 14

When It rains – Brad Mehldau
Storms – Perry Blake
Conversation with a stone – Jan Garbarek

요즘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는 세 곡.

어디를 가는 중이었는데, 계속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서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가버렸다. 처음 와 보는 곳이다. 오는 도중에 비는 그쳤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네시 사십분, 사십 일분..
하늘은 흐리다. 명도가 높은 시야. 넓게 퍼진 들녘. 서쪽 끄트머리에서 번개가 치는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까지, 아직 비는 오지 않는다. 아직. 갈 곳이 있는데, 그냥 여기 주저 앉아버리고 싶다.

인간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을 최고로 사용하는 일이다.
자신에게 자신에 대해서 되묻는 다는 것. 그리고 되묻는 자신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
이것만큼 완전히 목적인 일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