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땀

퇴근하고 (새벽에) 나오는데 안개비가 자욱하다. 달리는 택시의 앞유리에 몽글몽글 물방울이 솟는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오늘, 눈물나게 마법처럼 느닷없이 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옥상에서 만났다. 나는 한없이 미안했고 그 사람은 아직도 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같은 빌딩의 15층에서, 나는 13층에서 일을 하고 있다.

택시를 타고 오는데 환청이 들렸다. 귓 속에서 요정이 걸어나와 내게 계속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했다.

나는 요즘 계속해서 좁아지는 동굴 속으로 구겨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괜찮아.

비밀문답

lunamoth님 블로그에 갔다가 내 아이디가 맨 위에 있어서 뭔가 싶어 질문을 받아봤더니 글쎄…
아이고 맙소사!

# 표시는 도저히 답 할 수가 없어서 공란으로 비워둔 것이고, 왠지 나다 싶은건 내 아이디를 적었습니다. 일종의 백문백답같은건데..

워낙 인간관계가 좁은 인간이라 잘 모르는 사이라도 왠지 친한척 좀 했구요. 김규항씨는 워낙 유명한 분이고 좋아하는터라 질문에 해당한다 싶으면 염치 불구하고 답변으로 넣었습니다. 이래뵈도 몇 번 정도는 메일을 주고 받은 사이.. -_-;;

[#M_ more.. | less.. |
[질문을 시작하기 전 지킬 것]
1. 포스트 자체에 질문 내용을 게시하지 말 것.
2. 만약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용을 메일로만 가르쳐줄 것.
3. 단, 메일을 통해 질문 내용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바톤을 받아야 함

1. 야윤
2. 미도리
3. satii
4. 소운
5. 돌멩이
6. #
7. #
8. 조빼
9. #
10. #
11. 블루홀릭
12. #
13. 워냉
14. 워냉
15. #
16. 돌멩이
17. lunamoth
18. 미도리
19. satii
20. kid a
21. 소운
22. 김규항
23. saxboy
24. 워냉
25. #
26. #
27. 돌멩이
28. kirrie
29. 워냉
30. kirrie
31. 렌
32. 블루홀릭
33. 미도리
34. 미도리
35. 돌멩이
36. 워냉
37. 미도리
38. kirrie
39. 돌멩이
40. 렌
41. lunamoth
42. satii
43. #
44. #
45. lunamoth
46. saxboy
47. 양말
48. kirrie (-_-;;)
49. 김규항
50. #
51. kirrie
52. 김규항
53. #
54. #
55. 조빼
56. 야윤
57. #
58. #
59. #
60. kirrie
61. #
62. #
63. #
64. 워냉
65. 렌
66. #
67. #
68. 미도리
69. 미도리_M#]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덜컥 겁이 난다. 그냥 내가 원했던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놈팽이가 되는 것이었다. 오늘 하루도 일용할 수돗물과 비둘기와 나눠 먹는 빵 한조각으로 즐거이 지나가고, 저녁엔 골백번도 더 읽은, 귀퉁이가 달아서 뭉그러진 어느 소설책을 집어 들고 내키는 페이지부터 읽다가 잠이 드는 그런 삶. 서걱서걱 생활에 잘려 나가는 뭉텅이의 머리카락을 지켜보며, 그래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해야한다. 아무리 해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삶, 묻어가는 나날들. 물이끼는 물가에 핀다지만, 나는 어디에 피어야 하는걸까.

내게 있는 부정형의 어떤 것들, 을 고형의 틀에 넣어 단단하게 굳힌 다음 백만년의 박물관에 넣어 전시하는 것이다. 일천구백칠십구년산 놈팽이. 곰팡이의 일종이며, 때가 되면 자연히 사라짐. 세계적 희귀생물. 이런 명패를 달고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지는 것. 모든 멸종위기의 생물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어느 정도 매니악한 팬들이 있다. 곧 다가올 IPV6 시대에 상상하기도 힘든 숫자의 인터넷 주소들 가운데 두서너개 정도는 내 몫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화석화된 희망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연 집단인가 개인인가. 왜 아프리카 사람들의 피부색은 검은가. 나는 왜 나인가. 라는 질문이 수도 없이 제기된다. 관람객들에 의해서.

아님 말고.

꿈에

문득 불길한 꿈을 꿔서 편지를 쓴다.
한참 전에는 한영이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꿨지. 얼마 전엔 예전에 사귀던 아가씨가 다치는 꿈을 꿨어. 그러다 어제는 급기야 끔찍한 꿈을 꾸고 말았다. 꿈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조금 열어 주었더니 괴상하게 생긴 사내가 화살을 들고 그 틈을 비집어 들어오더라. 나는 깜짝 놀라 못들어오게 막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그 사내가 씨익 웃더니 내 얼굴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입을 통과해서 아래턱까지 튀어나왔는데, 그리 아프게 느껴지진 않았고 급한 마음에 화살을 잡아 빼서 그 사내의 목에 대고 그었다. 내 입에서 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시꺼먼 피와, 사내의 잘린 목에서 흐르는 피가 사방에 넘실대는데 그제서야 입 안에 아렸다. 그리고 깼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인가 그랬고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올랐던게 바로 너였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평소에 네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못난 녀석아,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는거니. 어젠 주명이가 집에 다녀갔다. 평소 주명이가 과묵한건 알고 있지? 어젠 이상하게 다변이더라. 오자마자 맥주가 마시고 싶다 해서 통닭에 생맥주를 천씨씨인가 시켜서 둘이 나눠 먹고 그것도 모자라 소주와 맥주를 더 사와서 마셨다. 그러면서 주명이는 내내 자기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도무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색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지. 자기는 도무지 사회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둥, 지금 붓고 있는 적금을 타면 일전에 봐둔 시골 빈집에 들어가 살거라는 둥… 시골 빈집이라니! 뭐, 그래도 주명이 정도면 일주일에 두서너 마디만 할 수 있는 외진 곳에서라도 잘 살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짐작인데, 아무래도 주명이 이 녀석 연애하는 것 같다. 예전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서너번 전화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문자라도 보내던 녀석이 최근엔 연락이 뜸하다. 그래서 어제 주명이가 집에 온 것도 의외였고. 연희가 슬쩍 귀뜸해주었던 것도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였고 말야. 주명이도 슬슬 자리를 잡을 때가 된거지, 그치? 그래도 주명이 마저 연애를 하거나 (혹은)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조금 더 쓸쓸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 되면 지금보다 더 날 보러 오기가 힘들꺼 아니겠니. 주책맞게 이런 이야기 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걷기가 힘들다. 물리치료를 그렇게 오래 받았는데도 이놈의 다리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안보이는구나. 이젠 팔 힘도 없어서 간신히 휠체어를 끌고 집 앞, 그 너그러운 언덕을 오를라 치면 숨이 턱까지 차온다. 점점 내가 닿을 수 있는 곳들은 좁아지는데, 점점 너희들은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있지. 그리고 항상 그 선두엔 네가 있고 말야.
그래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천둥벌거숭이마냥 제대로 하는건 없어도, 왠지 네게는 불끈불끈한 것이 느껴진다. 지금 또 몇 년 방황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걱정하는건 그저 험한 객지 생활에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 뿐이고, 그 외는 뭘 하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땐 마음이 조급했는데, 슬슬 잠이 오고 그만 쓸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다시 예전처럼 여유로워졌다. 역시 심란할땐 네 생각을 해야겠어.

슬쩍 창문을 여니, 깊은 밤, 사방에 안개비만 자욱하다. 이 편지를 다 쓰면 누구에게 부탁해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난 네 주소도 모르는구나.) 고민했는데, 그냥 서랍속에 또 넣어두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네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 전해주면 되겠지.

사랑과 존경,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담아.
이만 총총.

몸이

에릭 크립튼의 하이드 파크 공연 실황 가운데 “그래 내가 보안관을 쐈다.”를 들으면 피가 끓는다. 목구멍으로부터 간질간질하니 까끌한 욕설같은게 튀어나오려고 발악을 한다. 왠지는 잘 모르겠다. 가사 가운데 “내가 쏜건 보안관이지 보안관 대리 따위가 아냐” 라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쏘려면 보안관 정도는 쏴야 하는거 아닌가. 같은 교수형이라면 차라리 보안관 살해죄로 죽는게 낫지, 안그래? 아님 말고.

아무튼 요즘 상황이 좀 그렇다. 크게 한 건 하고 잠적할까 하고 생각중이다. 그리고 이 잠적은 아마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가 잠적하면 슬퍼할 많은 팬들이 있기에. 여러분 정말 사랑해요. 내 입에서 이런 고백이 쑥스럼 없이 튀어 나올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네. 아님 말고.

내가 없어도 다들 잘 살고.. 내가 없어도 너는 어제와 같고. (아마) 나에게도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다. 검은 현무암이거나, 겠지. 그정도가 딱 좋다. 검은 현무암. 서사모아 제도 같은데서 지구 생성부터 지구가 폭발할때까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현무암 말이다. 파도에 녹기도 하고 바람에 쓸리기도 하면서 차츰 키가 줄어드는 나는야 검은 현무암(이 되고 싶다). 아님 말고.

오늘 하루

잘 지냈니. 마침 비가 오는구나. 슬슬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고 웹브라우져를 닫기 전에 막 발견한 바람의 목소리 어쩌구 하는 음악을 듣는다. 비가 내리고 바람의 목소리. 강철로 된 방충망에 슬피 달린 빗방울들도 있다. 없는게 있다면 담배, 아까 퇴근하면서 담배를 사려고 했는데 그만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사질 못해서, 가 없고 또 네가 없지. 컵에 받아 놓은, 그젠가 혹은 그 이상 전날인가에 마시려고 떠 놓은 물을 마신다. 그래도 괜찮다. 육신이 피곤하면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아지는 법이다.

아니지.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니고, 효진누님이 며칠 전에 잠깐 깨어나서 네가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 하시고 다시 눈을 감더라. 나는 그냥 ‘네 누님. 준영이 잠깐 뭐 사러 나갔어요. 곧 돌아올꺼에요.’ 하고 말았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누님은 다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준영이가 참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하셨고.

노래가 바뀌었다. 슬픈 바람의 노래, 혹은 바람의 슬픈 노래. 거 왜 있잖아. 군대에서 야간행군 정신없이 하다가 불빛 하나 없는 숲길을 앞사람 다리만 보면서 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환청이 들리는거. 그게 가끔은 북한에서 들려주는 자장가이기도 했고 여우인가 뭔가가 우는 소리이기도 했고 더러는 고참의 욕설이거나 누군가 몰래 듣고 있는 라디오방송이기도 했던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뭐였을까?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이 혹시나 네게 그런 식으로, 슬픈 바람이거나 노래를 타고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너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고 말겠지만.

아무튼 뭘 하고 돌아다니든 잘 지내고 있음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부디 누님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꼭 한 번 서울 들렸으면 좋겠다. 나나, 명철이 윤형이한테 얼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냥 누님 손이라도 한 번 몰래 잡고 다시 사라져도 좋으니.

밤이 깊고, 이젠 정말 자야겠다. 비가 오는데 혹여나 네 놈 잘 곳을 정하지 못해 멀뚱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빗줄기나 쳐다보고 있지 않은지…

이만 줄인다.

다시 여름

무사히 또 여름을 잘 버텨내고 있는지. 서울에서 몇 자 적는다.

말도 없이 네가 사라진 때부터 벌써 몇 해가 지났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반쯤은 그럴듯한 변명이라고 자위하면서 안부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명식이하고 소주 한 잔 하면서 갑자기 네 이야기가 튀어나와 조금 어색했다. 명식이 녀석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것 같더라. 네 이름 넉자가 튀어나오니까 안절부절 못하더니 급기야는 서럽게 울기도 했고. 나는 우리 셋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참을 옆에서 담배를 피워댔지. 그래도 명식이 착한거 알잖아. 끝내 네 원망 한마디 않고, 마지막에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씩씩하게 소주 두 병을 싹싹 비워냈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 명식이가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한달에 한 번 통원치료를 받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옆에서 순애가 고생 많이 했지. 그래도 가장 큰 건 명식이 자식이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덕택이 아니었나 싶다. 너도 알지? 그 녀석 고래 심줄같이 굵은 정신을 갖고 있는거. 대신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방비상태이긴 하지만. 물론 우리가 셋이었을 때 네가 명식이에게 들려줬던 많은 이야기도 녀석에게 도움이 되었을꺼라고 믿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사귀던 아가씨는 다시 고이 접어 원래 있던 장소에 잘 되돌려 주었다. 올 해 늦가을 쯤 명식이하고 순애는 드디어 결혼하게 될 것 같고, 경준이형은 여전히 재판중이고… 다들 죽어도 이 악물고 다시 살아내고 있다.

아무튼 명식이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널 다시 만나게 되는 상상을 몇 번 했는데 잘 되질 않아서 그냥 그러고 있는 중. 네놈은 여전히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겠지. 그렇게 바라던 생명같은 연애는 성공했는지, 술밤에 달 한 잔 하는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싱숭생숭해지는 늦은 밤.

자, 나는 내일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할 몸.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편지 적고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넣고, 제발 이 편지가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이후 (After)

곧게, 가끔은 얼룩진 것처럼 구불텅한 짙은 숲 사잇길을 쉬엄쉬엄 걸어 나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연못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연못을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대체 짙은 숲은 어디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정말 거기 있는 것들이니까. 나이만큼 수그려진 고개와 어깨로 두어번 긴 숨을 내쉬다가, 작정하고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것들은 거기 있다. 그리고 대체로 일년에 두어번 연못의 수면이 모든 빛을 머금고 반사를 포기할 때가 있는데 만약 당신이 그 연못을 방문했을때가 그때라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수면에 반사하는 하늘의 구름이며, 숲의 음영들로 인해 연못 아래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마법같은 우연으로 수면반사가 멈춘 날에는 오히려 공기보다 더 투명하게 그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물은 다이아몬드처럼 시리게, 썩어가는 나뭇잎은 깊은 시간의 색으로 바래지고 당신 가슴의 출렁임에 맞춰 수면이 작게 흔들리면, 거기 당신, 무엇이 보이지? 나는 시체들이 보여. 하얗게 눈을 뜨고 미동도 없이 정지한 사람들. 언젠가 한번씩은 대면했던 이들. 과거는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미래는 아직도 당도하지 않은 희부윰한 새벽에 조금씩 가벼워지는 세계.

이 망상을 떨칠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이후에.

이상한 꿈

첫번째 꿈은 월드컵 토고전이 있던 날이었나, 그날 뭔가로 인해 심히 의기소침해 있던 과장님을 꼬드겨 비교적 일찍 퇴근을 하고 저녁 겸 반주 해서 각자 소주 한 병씩 마시고 또 맥주를 몇 병인가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월드컵 경기를 미쳐 다 보지 못하고 잤던, 기분 참 싱숭생숭했던 날 밤에 꿨던 꿈이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부는 강풍에 떨어진 간판을 맞는 기분으로 우울하게 그 분의 부고를 들었고 꿈 속이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으며 아침이 되어 핸드폰 알람에 맞춰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고, 두번째 꿈은 그 뒤로 며칠이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 잔업에 한참을 또 시달리다 억지로 청한 잠 속에서 옛 애인이 나타나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표정이 어색해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었다가, 뒤늦게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찾아 온 후배가 슬쩍 나를 불러 한다는 얘기가 형 누나 이미 결혼했어요 하는데 그만 또 나는 마음이 미어지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눈에서 나는 눈물은 거짓이라. 사실 눈물은 부어 오르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이고 덜컹 내려 앉는 심장에서 나는 것이며, 때로는 이야기 하는 입에서 또 때로는 글을 쓰는 손 끝에서 나는 것이라. 삐걱삐걱 흔들리는, 하루에 단 두번만 운행한다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버스에 두고 내린 손가방, 그리고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잊고 싶은 것들을 적은 쪽지가 변덕스럽게 후회가 되어 한참을 뛰어가며 소리지르고 제발 좀 세워달라고 그 안에 두고 내린 것이 있다고 해도 버스는 나를 위해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런데 우리가 또, 아니 내가 또 언제는 현재의 것을 소중히 여겼던 적이 있는가. 현재는 인식하는 순간 과거, 였었고 그래서 내 아끼는 마음은 언제나 후회형의 것들.

아주 먼 훗날에, 혹은 아주 먼 과거에 우리는 때때로 블랙홀과 마주쳤다. 그 중심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불길한 중력들에 발생한 기조력이 우리를 길게 잡아 찢을 것이다.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깝게 말이다. 슬프냐고, 아프지 않냐고 묻지는 마시길.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까운 상태로 말이다.

하늘 맑음

비온 뒤 갬. 적정 노출에서 한 두스탑 정도 낮추고 찍어야 나올 것 같은 짙은 파랑. 하얗고, 또는 회색인 구름들. 정오가 되어도 어쩐지 태양빛이 인공의 것 같다. 열기가 없이 눈꺼플에만 맴돌다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압정에다 정신을 박고 천정에 고정시키지. 가끔 눈가에 누군가 어른거리는 환상이 보여. 정말 난 아무래도 괜찮아. 라고 했던 말 때문에 벌을 받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