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다 제자리에

아무도 말을 않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면, 이곳이 마치 수심 1000미터 아래를 고요히 항행하는 잠수함 내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에어콘과 서버만 웅웅 소리를 내고, 가끔 메신저에 누가 접속했다, 는 신호음만 들린다.

일을 많이 해야 하는데, 피곤해서 그런지 진척은 늦고 아무래도 휴가 이야기는 꺼내기 힘들게 될 것 같다. 휴가는 커녕 주말에 단 하루라도 좋으니 쉬었으면 좋겠다고도 말 하기가 쉽지 않다. 결혼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하는 어떤 사내가 된 기분이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해 다 모순적이다. 그래서 무생물 기계처럼 나도 웅웅거리며 작게 진동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입력에 대한 출력만 하고, 어떤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도 필요없는 평온한 내부 공간처럼 나를 힘껏 구부려 유리처럼 투명한 어떤 상자 안으로 구겨 넣는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시간은 사라지고 나는 언제나 있었으므로, 조금씩 고통스러운 날들로부터 이격될 수 있을 것이다. 왈츠처럼 평화롭게.

바람이 불어 올까. 장마가 끝나자마자 다시 장마는 시작된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는 확실히 종료되는 것들은 없다. 적어도 내년에 다시 봅시다, 만 있었다. 한번 썼던 코드들은 언젠가 다시 작성해야 한다. 즐겁지가 않다.한번 내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생각하다가 너무 끔찍해서 그만두었다. 아마도 희망하는 것들을 볼 때 나는 그것들을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화보듯이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필요없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된 사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도 웃긴 것 같다. 휙휙, 삶을 넘겨가며 살 수 있다면 누군들 오분 이상 살 수 있을까. 이것도 봤고 저것도 봤고, 하면서 끝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하겠지.

아니. 좋은 음악, 좋은 친구, 좋은 술과 먹을 것. 좋은 저녁만 있으면 돼.

비 온다.

집에 와서 오랫만에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켠다. 정크 메일 140통을 비우고, 필터링된 스팸 6통과, 가입한 사이트들에서 날아 온 무익한 정보메일을 모두 지운 편지함으로 보내고 나면 받은 편지함엔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네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지치는 것에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더라. 더 이상은 지치는 일 없이 낮게 활강하는 도중인데, 가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전원이 나가버려 이상하게 허탈해지는 일이 많지.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아니라고 되뇌이면서도 끝끝내 침 한 번 크게 삼키고 씨익 웃고 나면, 받은 편지함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가끔 네가 미칠것처럼 보고 싶으면 담배를 먹고 추악한 추억같은 것들, 이를테면 항상 내가 되기 싫은 것들, 을 뱉는다. 깊게, 그리고 느리게.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너는 실제하지 않는 상징같은거니까.

그래 또 이렇게 시작한다. 네가 떠난 그 다음날부터-. 지긋지긋하도록 넌 항상 떠난 그 다음날부터만 존재하지. 이런걸 믿을 수 있겠어? 넌 한번도 떠나기 전엔 존재한 적이 없어. 누구더라, 박상우인가가 쓴 어떤 소설에서 ‘환(幻)’이라는 여자처럼, 하지만 그 여잔 항상 존재하기 전에 당도해서 존재한 뒤엔 떠나지, 그렇게 엄청난 가속력으로 추진하는 사실들. 손에 쥐기만 하면 사라지는 비눗방울. 뭐 상관은 없지만 말야.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추억을 이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가봐.

좋다. 상관없다. 네가 없어도 나는 잘 날 수 있다. 아주 잘, 또 멀리, 또 깊게, 느리게.

이 편지도 거북이 등에 붙여 보낼꺼야. 잘하면 태양이 거성이 되기 전에는 네게 전해질 수 있겠다. 혹은 매 순간 멈춰있는 화살이거나.

그럼.
이만 총총.

일상

만일 계속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면, 한국 최초라는 우주인 선발에 최선을 다해 임했을 것이다. 그때 지원서를 내면서 나는 ‘그래, 이걸 타고 우주로 가서 달나라에 망명하는거야’ 하고 내내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혼자, 반쯤은 자조하며 엄청 낄낄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반쯤은 정말 진지하게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람 일이란거 참 뜻대로 되는 것 없고, 아무리 계획적으로 산다고 해도 5분 앞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법이라 우연찮게 취직을 하고 어째저째 오늘까지 온 걸 보면서, 이게 나에게 희극인지 비극인지 제대로 분간하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서 오늘 우주인사업단인가 뭔가에서 계속 보내오는 저 메일을 보면서 잠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 그랬었지 내가, 하면서.

나는 내내 평범한 삶이 꿈이었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결코 평범해질 수 없는 내가 되도록 어떤 노란선 같은걸 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일년인가 이년쯤 전이었다. 아, 아니다. 올 해 초구나. 학교 관두면서. ㅎㅎㅎ

‘야, 나 학교 관뒀어.’ 했더니 ‘그래, 잘 했어. 어쩐지 너는 학교하곤 안어울렸어. 네가 잘 할 수 있는 다른게 있겠지.’ 하는 옛 여자친구를 두고 참 이 여자 아쉽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쩔 수 있을까. 이미 다른 남자하고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데. 그렇게 세상엔 내 실수, 내 잘못, 내 상처 투성이다.

아무튼 최근 취미는 퇴근하고 한두시간, 잠까지 아껴가며 Joey라는 외화를 다운받아 보는 것이고 얼렁뚱땅 이런 생활에 한편으로는 익숙해지면서도, 아침엔 이를 악물고 만원버스에서 한겨례를 꼭꼭 씹어먹는다. 도저히 이렇게라도 안하면 말 그대로 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데, 한 발 물러서 보면 용서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Joey를 다운받아 봐야겠다. 이크, 빡빡하게 봐도 두 편 못보겠군.

(참고로, Joey 초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