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불투명한 막 같은게 겹겹이 서 있었다. 하늘로는 그것이 없어서 그대로 푸른 하늘과 구름 같은 것들이 보였다. 전력으로 그 막에 몸을 부딪혀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고 그대로 부드럽게 나를 다시 되 튕겨내었다.
이 막은 미로처럼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으므로 온전하게 전진하기는 매우 힘이 들었다. 이를테면 머리 속으로 전진하려는 진로를 그리고 가급적이면 그 진로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막을 돌아가다 보면, 이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막이 왜 나를 가로막는지, 막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등은 사실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마도) 막이 있으니까 그걸 돌아서 가곤 했던 것이다.

가끔 쏴아-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걷다가 힘이 들면 막 아래에 누워서 바람에 얼굴을 맡겼다. 정말로 달콤한 맛이 났다. 좀 더 정교하게 이야기하면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맛이었다. 혹은 전지분유같은 맛. 혹은 얼음사탕같은 맛. 스산했지만 사실은 풍부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어디엔가 나처럼 이 막에 가로막혀 걷고 있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는 것을 걷기의 목표로 삼았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는건 의미가 없어, 알지?’
‘그렇겠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해.’
‘그런 다음엔?’
‘내가 세계에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해.’
‘그리고?’
‘꼭 살아야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피 속에 각인된 그런 외침. 현무암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로 그런 얘길 했었지. 건방지다는 느낌은 없었어, 왜냐하면 현무암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으니까. 나는 슬며시 웃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그렇게 나는 백만년 동안 걸었다. 백만년 동안 사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정해진 것 일테니까. 단지 누군가 나처럼 이렇게 헤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납득하기 위한 시간일 뿐이었다. 서서히 나와 내가 분리되었고 그 뒤에 분리된 나는 바람이 되었고 남은 나는 또 막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육만년 쯤 뒤에 바람이 된 나는 나를 만나 소슬거리는 희망을 준다. 힘 내. 여긴 너 말고도 수많은 너들이 걷고 있는 땅이야.
그래서 나는 세상에 나처럼 가로막혀 걷고 있는 수 많은 다른 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제, 술을 마셨다. 정말 몇년 만에 만나는 녀석들도 있었고 해서 학교엘 갔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술을 마시게 되어서, 처음엔 밥을 잠깐 먹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소주를 먹고 맥주 먹으러 또 가고, 마지막엔 전통주점에 가서 또 마시고… 마지막엔 내 몸이 알콜이 된 것 같았다. 손을 펴 보니 반대편이 투명하게 비쳤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상한 것은 집에까지 잘 와서 문을 열고 한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 기억이 없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술이 전혀 깨지 않았다. 계속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예전엔 술 마신 다음 날이 너무 힘들어서 계속 토하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아직 흡수되지 않은 위장 속의 알콜을 다 토해내고 억지로 미음을 끓여 조금 먹었다.

저녁 즘이 되자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저렸다. 간혹 근육이 뭉쳐서 그렇게 아프기도 하는데, 대체 잠을 어떻게 잤길래 이리도 어깨가 저린 건지 모르겠다. bullet proof, i wish i was. 저주파 안마기를 한참이나 하고 있으니 조금 괜찮아졌다.

또 하루, 아니 이틀을 이렇게 보낸다. 밖은 날씨가 참 맑다.

2월 17일자 tom mcrae 일기

February 17th, 2006
Got to be quick…. new downloads in the music section. Let’s call this the audience participation collection.

This is a giraffe. He lives in Niger, Africa. I was with my driver heading back to the capital, Niamey, when we veered off the road and weeved round bushes and trees and suddenly there stood this beautiful creature. It was welcome distraction from the reason I went to Africa in the first place. Maybe the news will start reporting that the situation still isn’t good out there, but then again maybe not. I have no idea why I’m telling you this. Because otherwise I have nothing interesting to say. Still writing songs, getting ready to start recording. Still drinking coffee.

2006년 2월 17일.
빨리 했어야 했는데… 어쨌든 music section에 새로운 음악파일이 추가되었습니다. 가서 들어보세요.

이건 기린입니다. 아프리카, 니제르란 곳에 살지요. 운전수와 함께 니제르의 수도인 니아메로 향하고 있을때, 우린 그냥 길이 아닌 곳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덤불과 나무들이 조금씩 보였고… 갑자기 이 아름다운 생물이 나타났지요. 생각지도 못한 놀람이어서 참 기뻤습니다. 만약 뉴스에서라면 “현재 이곳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습니다.. 어쩌구” 하겠지만, 뭐 아닐 수도 있구요.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아마도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전 그냥 계속 곡을 쓰고… 녹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커피도 마시면서.

—>
언제나처럼 모르는 곳은 어물쩍 넘어가고, 대충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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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것저것을 하다가 밤이 지났고 아침이 되어 근검하게 배달되는 신문을 훑다가 (이건 사실 거짓말) 책을 보다가 밥을 조금 먹고 병원에 갈까 잠깐 또 생각하다가 그냥 침대에 누워 별을 세고 있었다. 타이밍, 이 중요하다 나는 어느 한 시점을 제대로 잡으면, 항상 제대로 일이 풀릴 것이라고 여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때때로 과연 내가 누구 편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꿈 속의 망상으로) 이산화탄소병, 에 걸렸었다. 이 병의 증상은 들숨은 가능하지만 날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물론 조금은 당황했었다. 숨이 내쉬어지지가 않아서 가슴이 계속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당황은 했었다. 틀에 맞지 않는다. 부정교합, 이다. 또 어제는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중고로 내놓는다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두 권을, 가능하면 구하고 싶다고. 그러나 답장으로 온 메일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냥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두 권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 권은 내가 보고 다른 한 권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메일 주소도 맞게 보냈는데… 톰 맥레이가 (차라리 바라는 바 대로) 가죽바지에 길게 머리를 기르고 코카인이나 빨아대는 롹커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노래 부르기나 악기에 전혀 조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족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아, 그런데 지금 내가 왜 깨어 있냐 하면은 어제 마치고 보낸 일감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이다. 큰 문제는 아니다. 컴퓨터를 켜는 것은 내게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듯한 일종의 제의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얄밉게 할 일만 마치고 전원을 내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찬찬히 다시금 사이트를 둘러보고 윈앰프를 켜서 음악을 듣고 (한 두어 곡) 여기에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때로는 열 서너줄도 더 쓰고 그냥 지워버린 다음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다가, 또 때로는 나중에 써야지 하면서 다음에 지워버리거나 한다. 횟배를 앓는,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다. 또 뭐였더라? 딕셔너리 넘어가듯. 날개에서 아마도 주인공의 처는 주인공을 매우 사랑했을 것 같다. 사랑이 무한한 잠재력이라면, 그의 처는 드디어 그에게 없던 날개를 사주었던 것이다. 내가 항상 하는 말처럼, 아주 먼 과거에 들었던 아주 먼 미래의, 혹은 아주 먼 미래에 들었던 아주 먼 과거의 꿈 같은 것. 미안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표현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이게 내 잠재력이라면 잠재력이고, 내 한계라면 한계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이 어떤 것의 미래라면, 그것은 곧 어떤 것의 과거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가 왜 그렇게 과거에 집착하는지, 과거에서 곧 미래인 현재에 때때로 과거가 투영되면서 이 영화가 이야기를 뭉그러뜨려 어떻게 판타지를 만들어 나가는지 잘 알 수가 있다. 아마 나만 아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내게, 여자는 항상 먼 미래에 보았던 과거의 잔영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분들은 이게 무슨말인지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애써도 된다는 얘기) 나는 나만이 아는 언어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미래의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약간이라도 제대로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은 “The Longest Journey”라는 게임을 끈기를 갖고 마지막까지 플레이해보기 바란다.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보름동안이나 플레이 해야만 했던 정말 아름다운 게임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방에 갖힌 인간들이여. *용기를 갖고 / 패배하라.

*”피를 마시는 새” 中

grace

2007. 11. 3
둘러보다가 유투브 링크가 죽어버려서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아마도 유투브쪽의 제프 버클리는 온통 된서리를 맞은 모양이네요. 다른 곳의 제프 버클리 클립들도 다 죽거나, 사용중지 상태입니다. 다행히 한국의 클립들이 살아 있어서 대체했습니다.

나는 정말 죽은 놈들 한번씩 다 만나서, 말은 안통하겠지만 진탕 술 한 번 마셔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묻고 싶어요. 죽을때 안아팠냐고.
—>
음악을 하는 외사촌동생이 있다. 녀석은 드럼을 친다. 나는 사실 녀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는 한 동네에 살았고 녀석은 집에 레고블럭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자주 녀석, 그러니까 외삼촌댁에 놀러가서 함께 레고블럭을 가지고 놀았다.
너무 여렸고 자주 울었다. 그게 어떠한 성격적 결함이라고 한다면, 인간 중에 결함이 아닌 이가 없을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녀석은 그냥 좀 소심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 녀석이 학교를 어떻게 다녔고 중고등학교 시절에 무슨 지랄을 하고 다녔으며 왜 대학을 포기했는지, 왜 합기도를 배우러 다녔는지 왜 음악을 시작해야만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아주 길게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하고 나보다도 껑충 더 큰 키로 나타났을 뿐이다. “형, 잘 지냈지?”, “어, 그래. 짜식.”

이번에 녀석이 새로 컴퓨터를 맞춘다고 했고 내가 조립을 했다. “주헌아, 강욱이 음악하니까 다른건 몰라도 스피커는 좀 좋은걸로 해줘야 한다.” 외삼촌이 부탁을 하셔서 열심히 골랐다. 밤늦게 지하에 따로 있는 녀석의 방에 가서 컴퓨터를 대충 설치해주고 우리는 스피커 조립에 들어갔다. 수많은 선들을 간신히 제대로 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 음악 좀 깔아봐라.”, “형 이거 한번 들어봐.” 했다. 처음에 녀석은 며칠 뒤 공연이 있다며, 공연에서 할 음악을 하나 들려줬다. 익스트림의 무슨 곡이었고 우리는 그 곡을 들으며 막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형, 형 아마 이거 좋아할꺼야.” 하면서 녀석은 멜론 플레이어에 접속해서 제프 버클리를 고른다.

Grace – Jeff Buckley

매우 기묘한 곡이었다. 아득한 과거에 들었던 먼 미래의 꿈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프 버클리는, 그래 그는 90년대 필드에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약에 찌들어 자살했고 김광석이도 자살했고 닉 드레이크(사실 닉 드레이크는 70년대 중반에 자살했지만)도 자살했던 그때다. 그 이전도 그랬지만, 특히나 90년대에는 자살이 하나의 심벌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이상한 나날들(strange days)이었다. 뮤지션들은 인기에 질식했고 외부로 부터 오는 영감들에 더 이상 감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약에 의지해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아마도) 거기서 만난 것은 무한한 검은 지옥 뿐이었을 것이다. 묘사되는 것처럼 뜨거운 불길도 없고 피부를 벗겨내고 소금을 뿌리는 거대한 뿔의 악마도 없는 지옥. 목적도 방향도 알 수 없는 무중력의 지옥.

“형, 근데 이런 음악하면 다 죽는다.”

나는 뜨끔했다.

“왜?”

“얘도 자살했걸랑.”

제프 버클리. 그는 97년 두번째 앨범을 녹음하다가 잠시 친구와 여행을 즐기던 도중, 미시시피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그러나 곧 사라졌고, 일주일 뒤 인근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촌동생은 현재 공장에서 일을 하며 틈틈히 밴드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프레스기에 손을 다쳤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스틱을 쥘 수 있다. 녀석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Everyday Fallin’ In Love” 라는 현란한 이미지가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