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

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과장님이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치고 가는 통에 화들짝 깼는데, 얼마나 침을 흘리며 잤는지 입가에 흰 자국이 가득하더라. 옆자리 윤경씨는 내가 그 상태가 될때까지 혼자 킥킥대며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과장님이 지나간 다음엔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다가 결국은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말더라구. 아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낮잠 시간에 꿈을 꾸었거든. 어느 무료한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글쎄 그게 네 전화지 뭐니. ‘형, 뭐헙니까. 내 지금 화곡동인데 배고파 죽것소. 얼렁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사주소.’ 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아, 네, 네. 지금 당장 달려갑죠.’ 하고 과장님 한테는 거래처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고 뻥치고선 화곡동으로 달려가는거지. 아, 냄새가 어찌 나던지 순대국 하나 얼른 사주고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는데, 등을 미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아주 혼났다. 완전 구렁이 수준이야. 너는 엄살피우면서 ‘형, 나 등 아파. 살살 밀어.’ 하면, 또 나는 손자국 나게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다 큰 놈 자식이 이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하는거지.

꿈이고 뭐고 잘 안믿는 성격이지만서도, 간만에 네 소식 전해 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생각에 일은 손에 안잡히고 해서 몰래 휴게실 구석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우리 애 한참 못봤지?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간단다. 현경이는 벌써부터 무슨 조기 교육인가 뭔가 시킨다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내 얇은 월급봉투 보고 한숨 내쉬는 처지지만, 언제는 우리가 부유해서 행복했더냐. 함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던거지.
동훈이는 미국에 거 뭐시냐 무슨 좋은 대학교 닥터 한다고 준비하더니 그게 잘 안된 모양이고. 동훈이 처만 맨날 내게 전화해서 자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내가 언제 한 번 동훈이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야겠어. 까짓꺼 닥터야 나중에 해도 하는거고 먼저 가정을 챙겨야하는거 아니겠니. 지네 아부지가 물려준 재산이 꽤 된다지만 그것도 까먹다 보면 금방이잖아. 요즘엔 동훈이 처가 이것저것 많이 살림을 줄이는 것 같더라. 불쌍하고 고맙기도 하지. 나는 사실 동훈이 이놈보다는 동훈이 처가 더 살갑고 좋다.
참, 너 철민이형 기억나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우리 학생회실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으면 찾아와서 국밥에 소주 사주던 형. 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형 보안법으로 끌려가서 계속 재판을 받았거든. 이래저래 십년도 한참 넘으면서 질질 끌었는데, 그 재판 드디어 무혐의가 되어서 이번에 나오게 되었단다. 법대 민규가 철민이형 재판중에 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되어서, 사실은 민규가 정말 고생했지, 가망없는 그 싸움 묵묵히 혼자서 다 끌고 결국엔 이겨버렸으니까. 시퍼렇게 젊은 놈이 재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벌써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었단다. 며칠전에 민규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는게 결국 그놈 울컥하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그러더라. ‘형, 내가 왜 이 좃같은 대한민국에서 변호사질 하려고 그렇게 이 악물었는지 알아요? 철민이형이 너무 불쌍해서, 철민이형 내 손으로 변호해주고 싶어서 변호사 됐어요. 나 방세도 밥값도 없이 친구 하숙방 전전할때 철민이형이 어느 날은 오만원, 어느 날은 이만원 그렇게 쥐어주는거야. 자기도 거지같이 다니는 주제에 뭔 돈인가 싶었는데, 그게 글쎄 가끔 투쟁 없는 날에 공사판에 가서 벌어 온 돈 나한테 다 줬던거에요…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

이놈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면 그 다음날 발목이 시큰거려서 자주는 못나가지만서도, 이제 신문보다 인터넷 만화 보면서 낄낄대는게 하루 낙이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돌아올 너 기다리면서 우리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네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지?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 ‘생활투쟁’해야한다고.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이어야 한다고.

에고 과장님이 휴게실 밖에서 나한테 손가락질 하고 있어. 얼른 마저 쓰고 퇴근준비 해야겠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이 편지는 일단 내 우체통 서랍에 넣어 둘께. 돌아 오면 몽창 다 모아서 한아름 안겨줘야지.

이만 총총.

잠든 꿈

가끔 의식적으로 감각을 끊고 – 마치 플러그 뽑듯이 – 자욱한, 검고 어두운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 앉는 시늉을 한다. 가끔의 대부분은 외풍이 드는 내 작은 방이 너무 춥게 느껴질 때고,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이 어느 날 다 팔려서 그날 밤 소녀는 켤 성냥을 구하지 못해 얼어 죽었다는 블랙코메디를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아니, 그런데 어차피 소녀는 성냥이 있어도 얼어 죽었던 것 아니었나? 이래저래 가망이 없다.

전에 말 했던 것 같은데, 자각몽 말야. 꿈 속에서 그것이 꿈인 것을 깨닫게 되는 꿈. 드디어 조금씩 나는 그 신비로운 땅으로 접어드는 것 같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지. 첫번째 자각몽은 부끄럽게도 통제불능의 난교파티가 되어버렸는데 – 그마저도 끝까지 다 꾸지 못해서 아쉬워 – , 그 꿈을 꾼 다음에 나는 단단히 다짐했어. 고작 포르노 주인공이나 되는데에 귀중한 체험을 소모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두번째 자각몽을 꾸었을 때에, 기억을 역류해서 묻힌 의식의 공간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

네가 사기꾼이라고 말하던 그 프로이트 말야. 그 사람이 그랬데. 꿈은 의식의 검열이 약해지는 시간이라고. 짐작도 못 할 무의식의 꿈틀거림이 투사되는 것이 꿈이라고. 그렇다면 약해진 검열 과정 안에서 명징한 의식을 갖은 사람은 무의식도 총천연색으로 직시할 수 있는게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문을 열었어.’

물론 ‘문을 연다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지. 좀 클리셰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엔 그것 밖에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더라구. 그 곳은 아마 사월이나 오월쯤이 된, 숲 속의 고풍스러운 저택의 서가였던 것 같아. 문득 나는 이것이 꿈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되자마자 초록 잎들에 반사된 녹색광이 넘실거리는 창문 맞은편 벽에 문이 생긴거지.

두려움 같은 건 없었어. 왜냐하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나의 내부와 외부의 적극적인 모순성 같은게 느껴지질 않았거든. 이건 꿈이니까, 탁자며 집이며 바람이나 햇빛, 이 세계 전체가 나의 산물인거야. 그리고 그걸 엄청나게 실감해.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그게 꼭 이런 기분일꺼야.

미리 짜여져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향해 걸어갔어. 그리고 힘주어 문고리를 돌렸지. 빛, 그리고 빛, 그런데 빛, 그러나 빛, 그래서 빛. 초신성이 폭발하는 순간에 바로 그 앞에 있다면 태양의 백만배나 되는 빛을 볼 수 있데. 그런데 눈부시지가 않아.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그 다음이 정말 중요한 대목인데 말이지.

그런 굉장한 경험들을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까 너와 무척 이야기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밖엘 나갔더니 이미 겨울이더라. 하늘이 파랬어. 공기는 시려워. 너와 교감하고 싶어. 보고 싶어.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주소는 불명. 안녕, 와일드 오키드. 코퍼스 크리스티 캐롤도 네게 안부를 전해달래.

그럼.
이만 총총.

겨울같은 가을

지난주 서울은 내내 안개만 가득했다. 그건 미세먼지였을지도 모르고, 대중교통수단의 매연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사무실 배란다에서 내다 본 서울은 그냥 안개만 가득 한 것 같았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약간은 의식적으로) ‘무진기행’의 첫 장면이 떠올랐고 그 짓눌어 딱딱해진 고대의 기억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탈출했는가, 에 관해서 몇 자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는 겸허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어둠으로 녹아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고작 한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지난 주말에는 사납게 비가 내렸, 던 것 같다 사실은 집 밖에 나가질 않아서 모르겠다. 아주 먼 곳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혹은 혼몽한 꿈 속에서 그게 현실이라고 오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나는 너무 많이 몰랐다. 후배 하나는 가장 쓸쓸한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딴 사람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많이 욕을 하고 싶다. 벌떡 일어나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상스러운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지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단어를 내뱉은 그 직후에 얼마나 참담해질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슬프다. 그 말 밖에는, 사실 그 말도 마음 속으로만 두세번 말했다.

구십팔년도에 우리는 만났고 그때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서로를 기억하고 위안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때는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을, 아니 그래 하기는 했었지만서도 그보다 더 큰 아늑한 희망같은게 분명 있을꺼라고 호기있게 장담했었지. 그러나 사람의 말들은 얼마나 쉽게 세월에 녹아 사라지는지. 나는 왜 몰랐을까. 왜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나는 정말 싸가지가 없을까. 이제 막 걸어가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주저 앉고 싶을까…

가슴이 아프다. 미안하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여도, 그렇게 뻔뻔스레 미안하다는 말 하는 것도 또 미안해. 미안해..

한참을 뭘 써놓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쓰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나갔다가 흐린 하늘을 봤고, 봤다가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 거렸다.

비 온다.

집에 와서 오랫만에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켠다. 정크 메일 140통을 비우고, 필터링된 스팸 6통과, 가입한 사이트들에서 날아 온 무익한 정보메일을 모두 지운 편지함으로 보내고 나면 받은 편지함엔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네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지치는 것에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더라. 더 이상은 지치는 일 없이 낮게 활강하는 도중인데, 가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전원이 나가버려 이상하게 허탈해지는 일이 많지.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아니라고 되뇌이면서도 끝끝내 침 한 번 크게 삼키고 씨익 웃고 나면, 받은 편지함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가끔 네가 미칠것처럼 보고 싶으면 담배를 먹고 추악한 추억같은 것들, 이를테면 항상 내가 되기 싫은 것들, 을 뱉는다. 깊게, 그리고 느리게.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너는 실제하지 않는 상징같은거니까.

그래 또 이렇게 시작한다. 네가 떠난 그 다음날부터-. 지긋지긋하도록 넌 항상 떠난 그 다음날부터만 존재하지. 이런걸 믿을 수 있겠어? 넌 한번도 떠나기 전엔 존재한 적이 없어. 누구더라, 박상우인가가 쓴 어떤 소설에서 ‘환(幻)’이라는 여자처럼, 하지만 그 여잔 항상 존재하기 전에 당도해서 존재한 뒤엔 떠나지, 그렇게 엄청난 가속력으로 추진하는 사실들. 손에 쥐기만 하면 사라지는 비눗방울. 뭐 상관은 없지만 말야.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추억을 이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가봐.

좋다. 상관없다. 네가 없어도 나는 잘 날 수 있다. 아주 잘, 또 멀리, 또 깊게, 느리게.

이 편지도 거북이 등에 붙여 보낼꺼야. 잘하면 태양이 거성이 되기 전에는 네게 전해질 수 있겠다. 혹은 매 순간 멈춰있는 화살이거나.

그럼.
이만 총총.

꿈에

문득 불길한 꿈을 꿔서 편지를 쓴다.
한참 전에는 한영이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꿨지. 얼마 전엔 예전에 사귀던 아가씨가 다치는 꿈을 꿨어. 그러다 어제는 급기야 끔찍한 꿈을 꾸고 말았다. 꿈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조금 열어 주었더니 괴상하게 생긴 사내가 화살을 들고 그 틈을 비집어 들어오더라. 나는 깜짝 놀라 못들어오게 막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그 사내가 씨익 웃더니 내 얼굴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입을 통과해서 아래턱까지 튀어나왔는데, 그리 아프게 느껴지진 않았고 급한 마음에 화살을 잡아 빼서 그 사내의 목에 대고 그었다. 내 입에서 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시꺼먼 피와, 사내의 잘린 목에서 흐르는 피가 사방에 넘실대는데 그제서야 입 안에 아렸다. 그리고 깼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인가 그랬고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올랐던게 바로 너였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평소에 네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못난 녀석아,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는거니. 어젠 주명이가 집에 다녀갔다. 평소 주명이가 과묵한건 알고 있지? 어젠 이상하게 다변이더라. 오자마자 맥주가 마시고 싶다 해서 통닭에 생맥주를 천씨씨인가 시켜서 둘이 나눠 먹고 그것도 모자라 소주와 맥주를 더 사와서 마셨다. 그러면서 주명이는 내내 자기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도무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색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지. 자기는 도무지 사회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둥, 지금 붓고 있는 적금을 타면 일전에 봐둔 시골 빈집에 들어가 살거라는 둥… 시골 빈집이라니! 뭐, 그래도 주명이 정도면 일주일에 두서너 마디만 할 수 있는 외진 곳에서라도 잘 살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짐작인데, 아무래도 주명이 이 녀석 연애하는 것 같다. 예전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서너번 전화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문자라도 보내던 녀석이 최근엔 연락이 뜸하다. 그래서 어제 주명이가 집에 온 것도 의외였고. 연희가 슬쩍 귀뜸해주었던 것도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였고 말야. 주명이도 슬슬 자리를 잡을 때가 된거지, 그치? 그래도 주명이 마저 연애를 하거나 (혹은)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조금 더 쓸쓸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 되면 지금보다 더 날 보러 오기가 힘들꺼 아니겠니. 주책맞게 이런 이야기 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걷기가 힘들다. 물리치료를 그렇게 오래 받았는데도 이놈의 다리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안보이는구나. 이젠 팔 힘도 없어서 간신히 휠체어를 끌고 집 앞, 그 너그러운 언덕을 오를라 치면 숨이 턱까지 차온다. 점점 내가 닿을 수 있는 곳들은 좁아지는데, 점점 너희들은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있지. 그리고 항상 그 선두엔 네가 있고 말야.
그래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천둥벌거숭이마냥 제대로 하는건 없어도, 왠지 네게는 불끈불끈한 것이 느껴진다. 지금 또 몇 년 방황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걱정하는건 그저 험한 객지 생활에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 뿐이고, 그 외는 뭘 하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땐 마음이 조급했는데, 슬슬 잠이 오고 그만 쓸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다시 예전처럼 여유로워졌다. 역시 심란할땐 네 생각을 해야겠어.

슬쩍 창문을 여니, 깊은 밤, 사방에 안개비만 자욱하다. 이 편지를 다 쓰면 누구에게 부탁해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난 네 주소도 모르는구나.) 고민했는데, 그냥 서랍속에 또 넣어두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네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 전해주면 되겠지.

사랑과 존경,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담아.
이만 총총.

오늘 하루

잘 지냈니. 마침 비가 오는구나. 슬슬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고 웹브라우져를 닫기 전에 막 발견한 바람의 목소리 어쩌구 하는 음악을 듣는다. 비가 내리고 바람의 목소리. 강철로 된 방충망에 슬피 달린 빗방울들도 있다. 없는게 있다면 담배, 아까 퇴근하면서 담배를 사려고 했는데 그만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사질 못해서, 가 없고 또 네가 없지. 컵에 받아 놓은, 그젠가 혹은 그 이상 전날인가에 마시려고 떠 놓은 물을 마신다. 그래도 괜찮다. 육신이 피곤하면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아지는 법이다.

아니지.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니고, 효진누님이 며칠 전에 잠깐 깨어나서 네가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 하시고 다시 눈을 감더라. 나는 그냥 ‘네 누님. 준영이 잠깐 뭐 사러 나갔어요. 곧 돌아올꺼에요.’ 하고 말았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누님은 다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준영이가 참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하셨고.

노래가 바뀌었다. 슬픈 바람의 노래, 혹은 바람의 슬픈 노래. 거 왜 있잖아. 군대에서 야간행군 정신없이 하다가 불빛 하나 없는 숲길을 앞사람 다리만 보면서 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환청이 들리는거. 그게 가끔은 북한에서 들려주는 자장가이기도 했고 여우인가 뭔가가 우는 소리이기도 했고 더러는 고참의 욕설이거나 누군가 몰래 듣고 있는 라디오방송이기도 했던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뭐였을까?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이 혹시나 네게 그런 식으로, 슬픈 바람이거나 노래를 타고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너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고 말겠지만.

아무튼 뭘 하고 돌아다니든 잘 지내고 있음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부디 누님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꼭 한 번 서울 들렸으면 좋겠다. 나나, 명철이 윤형이한테 얼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냥 누님 손이라도 한 번 몰래 잡고 다시 사라져도 좋으니.

밤이 깊고, 이젠 정말 자야겠다. 비가 오는데 혹여나 네 놈 잘 곳을 정하지 못해 멀뚱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빗줄기나 쳐다보고 있지 않은지…

이만 줄인다.

다시 여름

무사히 또 여름을 잘 버텨내고 있는지. 서울에서 몇 자 적는다.

말도 없이 네가 사라진 때부터 벌써 몇 해가 지났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반쯤은 그럴듯한 변명이라고 자위하면서 안부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명식이하고 소주 한 잔 하면서 갑자기 네 이야기가 튀어나와 조금 어색했다. 명식이 녀석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것 같더라. 네 이름 넉자가 튀어나오니까 안절부절 못하더니 급기야는 서럽게 울기도 했고. 나는 우리 셋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참을 옆에서 담배를 피워댔지. 그래도 명식이 착한거 알잖아. 끝내 네 원망 한마디 않고, 마지막에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씩씩하게 소주 두 병을 싹싹 비워냈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 명식이가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한달에 한 번 통원치료를 받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옆에서 순애가 고생 많이 했지. 그래도 가장 큰 건 명식이 자식이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덕택이 아니었나 싶다. 너도 알지? 그 녀석 고래 심줄같이 굵은 정신을 갖고 있는거. 대신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방비상태이긴 하지만. 물론 우리가 셋이었을 때 네가 명식이에게 들려줬던 많은 이야기도 녀석에게 도움이 되었을꺼라고 믿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사귀던 아가씨는 다시 고이 접어 원래 있던 장소에 잘 되돌려 주었다. 올 해 늦가을 쯤 명식이하고 순애는 드디어 결혼하게 될 것 같고, 경준이형은 여전히 재판중이고… 다들 죽어도 이 악물고 다시 살아내고 있다.

아무튼 명식이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널 다시 만나게 되는 상상을 몇 번 했는데 잘 되질 않아서 그냥 그러고 있는 중. 네놈은 여전히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겠지. 그렇게 바라던 생명같은 연애는 성공했는지, 술밤에 달 한 잔 하는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싱숭생숭해지는 늦은 밤.

자, 나는 내일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할 몸.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편지 적고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넣고, 제발 이 편지가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