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or shot to le guin!

르귄에 대한 감회를 짧게 트위터에 올렸더니 @jaeyun 님이 바로 리플을 달아주시는데 내용이 이랬다.

‘liquor shot to le guin! liquor shot to all the dragons in Earthsea!’

최근에 재출간된 르귄의 ‘어둠의 왼손’을 오늘 다 읽고 나서야, 나도 같은 감회에 충분히 젖을 수 있었다. 나 역시 르귄에게 한 잔을! (맥주긴 하지만…)

르귄여사,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장르문학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단연코 첫번째 수상자가 될’ 이란 수식어에 피식한 적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예전에 잠깐씩 훑고 지나갔던 르귄은 당최 가까워지기 힘든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 말랑말랑한 수사며, 미몽에 찬 세계를 방황하는, 실존적 고뇌에 가득찬 주인공들은 심정적으로야 공감이 가지만서도 도무지 머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작자들이었다.

어둠의 왼손을 읽어나가면서도 은근슬쩍 짜증이 나기도 했다. 대체 왜 지들끼리 (행복하게?) 지지고 볶아대는 게센 행성의 인민들에게 에큐멘의 동맹이 되기를 강요해야 하는가? 자기 신념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외부세계로 확장될때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이 되었던가는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던 것 아닌가. 에큐멘은 결국 멋지게 포장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일단 다음 문장을 만났을때 나는 지하철 안에서 부끄러움도 잊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 앉을뻔 했음을 고백한다.

‘아니오. 제가 말하는 애국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공포’입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결코 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증오와 분쟁. 침략, 이 모든 공포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매일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해마다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 ‘어둠의 왼손’ p39

그리고 앞부분의 이 문장은 한참 뒤에 가서야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 성찰된다.

‘오르고린 사람들은 요리하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르고린을 싫어한다고요?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한 국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티베는 물론 그런 말을 합니다만, 제게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나는 그 나라의 사람들을 알고 도시들을 알고, 농장과 언덕이며, 강과 바위들을 알고, 가을이 되면 구릉에 태양이 어떤 모양으로 지는가를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것에 경계선을 긋고 이름을 붙인 다음,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곳은 더 이상 사랑해선 안 된다니 대체 그 이유가 뭐지요? 그리고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자기 나라 아닌 곳은 미워하고 증오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도 중요한 것입니다만 미덕이 될 수는 없지요. …… 인생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에스트르 영지의 언덕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사랑에 증오의 경계선은 없어요.’
– ‘어둠의 왼손’ p 271

현미누나는 오히려 후반부로 갈 수록 주제의식이랄까 하는 것들이 희미해지는 바람에 (겐리와 아스트라벤의 엑소더스가 그리도 지루했다는) 생각했던 것만큼 후한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피상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는 게센과 에큐맨, 개인과 사회, 국가와 국가 간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 관계들에 대한 르귄의 주장이 후반부의 두 남녀(?)가 오르고린을 탈출하며 겪게 되는 개인적인 체험들로, 즉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녹아드는게 아닌가 싶었다.

뭐, 게센인의 독특한 생리적 특징들에 대한 알레고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살려내려는 시도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서도.

아무튼 어둠의 왼손을 읽고 단숨에 르귄의 팬을 자처하게 되었고, 헤인 시리즈를 구매목록에 넣어두었다. 어스시 시리즈는 일단 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퍼언 연대기나 테메레르를 (이것도 구매 목록에 넣어 두었다. 르귄 작품은 아니지만.) 다 읽고 난 다음엔 어스시도 읽고 싶어질지 모른다.

멋진 징조들, Good Omens

 지구 대기를 이루는 층의 가장 높은 곳에 ‘인류의 잠재의식’이라고 불릴 만 한 것들이 떠다니고 있고, 가끔 그 의식이 내키는대로 한 개체에게 계시를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로부터 기억한 것인지 무슨 사상서나 아니면, 인터넷에서 누군가의 몽상으로부터 기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걸 꽤나 진지하게 믿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아주 대중적인 것이나 제대로 언급할 가치가 없는 생산물, 쓰레기 영화나 소설로부터도 나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낀다. 인류의 잠재의식을 개인의 머리로 고스란히 인식할 수 있는 지적 천재들은 분명히 자신의 생산물이 가지는 모습을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만들어 놓고도 자기가 뭘 ‘발견’ 했는지 모르는 그런 것.

 멋진 징조들을 읽으면서, 잠시 행복했다. 제기랄, 운명이라던가 거룩함 같은건 높으신 양반들이나 열심히 섬기라고 하지. 지구에 남겨진 천사와 악마는, 그래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정확히 말하자면 처연하게 느껴질만큼 악독한 인간성과 그것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보스’에게 대적하기로 한다.

 ‘추락했다기보다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갔다고 할 정도의 타락천사’인 크롤리와 ‘천사이며, 부엌으로 희귀 서적상을 하고 있’는 아지라파엘이 고뇌하며 신의 계획에따라 적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좌하며 아마겟돈을 통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초밥과 모짜르트를 위해 신에게 반기를 들어야할지 갈팡질팡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그다지 불경스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야기 가운데 인용된, 신곡의 다음 구절로 압축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존재의 본질이 ‘거짓과 반항’인 악마 크롤리 (이 웃긴 악마는 결국 사탄에게까지도 반항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자기반성적인 존재란 말인가!) 는, ‘진실과 충성’이 본질인 천사 아지라파엘을 집요하게 (신의 계획에 반대하게 하기 위해) 꼬시는데, 에덴동산 시절에 뱀이 하와를 꼬시는 식의 교훈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크롤리는 계속 아지라파엘의 진심에 호소한다. 그의 결단을 촉구한다. 그게 신의 계획이므로 그것에 따르는 것은 무조건 옳다, 는 자신의 본질에 각인된 무반성적인 행위보다 스스로 판단으로 다음의 한 발을 내딛기를 요구한다.

 수상한 시절이다. 시대가 이야기를 만들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시대보다 앞서있다. 그것은 항상 엔트로피를 역전한다. 아지라파엘은 그가 수천년간 인류와 함께 지내오면서 쌓아 온 추억을, 결국 앞지르지 못한다. 그에겐 돌아가야 할 고서점이 있다. 그 서점은 책을 팔기 위한 곳이 아니라, 자신이 읽을 책을 보관하기 위한 서점이다. 그래서 때때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는 ‘혹시라도 책을 사갈까봐’ 안절부절 못하기도 한다. 그는 초밥을 사랑하고 모짜르트를 사랑하고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인간이었다.

 테리와 닐은 거의 농담처럼 주고 받으면서, 다 읽고 나면 ‘어, 이거 꽤나 두꺼운 소설이었잖아 (500페이지가 넘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긴 이야기를 완성했다. 분명 그 안에 억지로 의미나 가치를 구겨 넣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래도 분명히 든든해지는 이야기다. 아마도 인류의 잠재의식이 그때에 잠깐,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의 책

“왜 그런 책을 읽어? 무서운 꿈이나 꾸겠지.”

– 사랑이 지겨워졌어. 이제는 공포야.

“제대로 사랑은 해 봤니?”

– 자신을 동정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나는 너무 금새 모든걸 깨닫는거야. 오직 내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건 정신이지. 인간의 총체적 정신. 요즘엔 거기에 사랑보다는 공포가 더 닿아 있는 것 같다고 느껴.

“너 기독교인이면서도 그런 말을 해?”

– 하나님은 공포의 하나님이야. 말 안듣는다고 사십일 동안이나 전 세계를 물로 벌했잖아.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이 자애로운 애정의 어머니에서 언제든 자신의 적대자가 될 수 있는 아버지로 바뀌는 시점이 바로 그때였어. 그제서야 인간들은 깨닫게 된거지. 저 거룩한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우리 존재는 모래처럼 흩어지는구나. 애초에 게임이 안되는구나.

“하지만 아버지도 결국은 부모잖아. 자식을 벌하는 아버지는 있어도 죽이는 아버지는, 아 물론 일반적으로 말할 때 말이야, 없잖아?”

– 그는 우리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 말해봐, 어째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거니.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 어째서 우리는 이 지상에 불완전한 모습으로 지음 받은거지?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따서 우리를 완전히 만드셨어.”

– 어쩌면 네 말은 맞을지도 몰라. 인간은 완전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불완전해. 가장 비극적인건 보편 개념으로써 인간을 자각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는거야. 그건, 바로 내가 인간이 아닌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럼?”

– 하나님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자식에게 죽임 당하는 어버이가 되기 위해 우리를 생산했어. 그는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렬하게 자기 자신이 극복되기를 원해. 자기보다 훌륭한 어버이가 되기를 바라는거야. 인간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더 높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 볼 수 있기를 바래.

“그게 네가 말하는 공포하고는 어떤 관계인데?”

– 공포는 음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의 감정이기도 하지. 우리는 압도적인 미지의 대상 앞에서 두려워 떨며 울부짖고, 더 어두운 곳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해. 하지만 그 시점을 넘어서 자기 내부의 모든 생을 소진하고 완전히 텅 빈 상태가 될 때, 이제는 반대로 그것에게 끌리기 시작해. 그 대상의 피를 마시고 그 대상의 살을 먹으며 하나의 몸이 되려고 하지. 그것에게 굴복하는게 아냐. 바로 자기 자신이 공포 그 자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세계로 변태하는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 증거는 겁쟁이들이나 찾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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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책, 클라이브 바커.
스티븐 킹이 그랬다네요. 이놈이야 말로 호러의 미래다! 한참 뒤에야 책장에 보니 이 책이 꼽혀 있는데, 대체 내가 언제 왜 이 책을 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신기한 일이죠. 바커씨가 한밤중에 몰래 꼽고 나갔나.

꽤 괜찮습니다. 찐득한 피와 살육에 대한 묘사를 그럭저럭 견뎌 낼 수 있다면, 그제서야 이 책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문장 묘사가 정말 일품이에요. 개인적으로 ‘피그 블러드 블루스’, ‘언덕에, 두 도시’, ‘로헤드 렉스’가 가장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단편을 모두 주의깊게 읽고 난 뒤에 어쩌면, 제가 위에 갈겨 놓은 낙서를 조금쯤은 이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나는 쾌활한 젊은 커플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어둡고 황폐해진 옛집에서,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황폐한 삶을 살고 있는 형이었다.

올 해 블로그에 대고 하나 다짐하는 것은,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작년에도 몇 번 시도했는데, 워낙 거창한 작품 비평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매번 첫 문단을 넘어가기도 전에 힘에 부쳐 ‘나중에…’ 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2007년 첫 기록의 대상은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아직 50페이지도 읽지 않았는데, 소슬거리는 초가을의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는) 따뜻한 예감 같은걸 느꼈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첫 챕터의 시작부터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은 조금 희안한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변주곡을 들으며 한 손에 ‘미사고의 숲’을 들고 퇴근을 위해 현대백화점 지하를 지나고 있었다. 거긴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에 나아가는데 깊은 주의를 필요로 했다. 2/3쯤 지나가고 있을때, 순간 사람이 몰려 잠시 길을 멈추는 순간에 번개처럼 ‘즐겁다!’ 는 기분이 든 것이다. 아니면 한참이나 잊고 있던 기억을 운좋게 떠올린 것처럼 ‘아! 나야말로 즐거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던 (아.. 겨우 50페이지도 안읽은 주제에)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역자 본인이 SF소설 애호가이며 (기억이 맞나 모르겠는데) 현재 ‘행복한 이야기 총서’의 편집을 맡고 있는 분이어서 더욱 애착을 갖고 세심하게 번역했다는 기분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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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크리스찬은 사랑을 발견했다. 크리스찬은 사랑을 상실했다.

출근하다가 밑줄 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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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이 거의 다 갈 때쯤에야 ‘미사고의 숲’을 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 50페이지 정도가 고비였는데, 그건 작품의 내적인 요인들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였다. 핑계라면 큐브를 돌려 맞추는데 매료되어서 책을 가방 안에서 거의 꺼낸 적이 없다는 것도 있다. 어쨌든, 간만에 있는 힘을 다 해 단 몇 미터가 남은 정상을 기어 올라가는 기분으로 마지막 50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인과율은 작품 내에서 (혹은 숲 속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신화의, 혹은 심리의 원형, 수만년을 이어 내려온 전설들, 이야기들, 그것은 곳곳에서 재현되고 다시금 원형 속으로 융합된다.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신화적 원형들의 결과로 작품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 원형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으로써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즉, 귀네스(귀네비어 여왕) 전설은 스티븐에 의해 결말지어지는 것 (혈족만이 아웃사이더를 죽일 수 있다) 이 아니라, 스티븐으로부터 시작된다.
신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실에 기반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았다. 인류가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있어왔을 것이다. 모든 세대로부터 종의 기억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적 상상력들을 공급(Feedback)한다. 그러한 기억들이 위치하는 곳은 아마도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미사고의 숲 – 무의식’ 일 것이다.
흔히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우리는 꿈에서 상황을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던지.. 육식동물의 앞에서 대적하기 위해 총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던지.. 살인자로부터 도망치려고 열심히 뛰어도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려는 어떤 행위’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은 항상 해석당하기를 거부한다. 꿈은 항상 마음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꿈은 그럴듯한 거짓들 사이에 교묘히 진실을 숨긴다.
숲이 외부인들을 유혹해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명확한 (영웅적) 사실들로부터 집단적인 무의식은 해석되기를 거부하며, 디테일을 뭉그러뜨린다. 누구도 호랑이와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듯이.

가뭄에 단비

가을인데도 많은 비가 내린다. 어딘가 모르게 검은 음모의 냄새가 나는 비다.

오늘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틈틈히 전에 사 두었던 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을 다 읽었다. 학교 서점에 교재를 사러 갔을때 서가에 이 책이 즐비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이 책을 교재로 쓰는 수업이 있는 것 같다. 애써 찾아볼까 하다가 의미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이 책이 중대하냐, 고 하면 별로 그런 책은 아니다.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만큼 문제작들이 실린 것도 아니고 2005년 올해의 소설이긴 해도 2008년이나 2010년에 읽어도 무방할 것들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대한 책이다.

전에 언급했다시피 나는 지난 몇 달, 혹은 몇 년간 글다운 글을 읽지 못했다. 습기를 갈무리 하지 못해서 퍽퍽 터져나가는 고목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일단 머리가 맑아졌고 (한쪽으로만) 아침에 일어나 쓸데없이 우는 일도 많이 줄었다. 어제 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떤 녀석이 “자화상을 썼을때의 서정주 나이가 스물 셋이더라.”는 말을 꺼냈는데, 그러면서 나는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는 문장을 아무런 고통없이도 상기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괜찮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막상 뚝이 터지고 사막에 홍수가 나자 모래는 미친듯이 물을 머금는다. 정신없이, 혼란스럽게. 아아, 이 좋은걸 왜 마다하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챙피한 표현이지만, 질질 쌀 정도로. 아 그렇구나. 그건 오르가즘이었다. 몇년을 참아왔던 사정(射精) 같은 것.

박완서, 구효서, 윤대녕 이 세 고수들은 정말로 훌륭했다. 특히나 윤대녕의 탱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했다. 내가 그 동안 윤대녕에게 바래왔던 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오직 그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산 것은 의의가 있다, 할 정도로. (그래서 읽을 작품들은 내가 그 동안 뒤에서 호박씨를 까대던 윤대녕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그의 모든 작품을 샅샅이 찾아 읽기로 했다.) 박완서는 이 사람이 아직도, 할 정도였고 구효서는 나름대로 기품이 있었다.

이름을 잘 모르는 젊은 작가 가운데에선,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 매우 즐거웠다. 그는 분명히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다.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은 매끄러웠지만 너무 정직했다.

이혜경의 피아간, 은 너무 뻔한 얘기 같아서 읽다가 말았고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은 단편소설이 가지는 힘을 십분 발휘해내는 힘이 있었다. 정이현 (아 정이현!) 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뭐 대개가 그랬지만) 그냥 노코멘트 할란다. 다 읽고 난 다음에 “혹시 서울예대 출신 아닐까?” 했는데 이력을 찾아보니 역시나 그랬다. 까닭없이 화가 나는 서울예대 출신들. (혹시나 상처받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는 아직 읽는 중.

마지막으로.. 조성기의 작은 인간이 남았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왜 이게 좋은 소설에 뽑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품평을 읽어봐도 뭔가 두리뭉실하고 확연하지가 않다. 미안하지만, 이 선집에 실린 작품중에 제일 재미없었다.

사실 오늘 대학생활 7년 가운데 최악으로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 오며가며 책을 읽다보니 짜증이 싹 사라졌다.

여러분 책을 읽으면 재밌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