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나는 쾌활한 젊은 커플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어둡고 황폐해진 옛집에서,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황폐한 삶을 살고 있는 형이었다.

올 해 블로그에 대고 하나 다짐하는 것은,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작년에도 몇 번 시도했는데, 워낙 거창한 작품 비평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매번 첫 문단을 넘어가기도 전에 힘에 부쳐 ‘나중에…’ 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2007년 첫 기록의 대상은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아직 50페이지도 읽지 않았는데, 소슬거리는 초가을의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는) 따뜻한 예감 같은걸 느꼈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첫 챕터의 시작부터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은 조금 희안한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변주곡을 들으며 한 손에 ‘미사고의 숲’을 들고 퇴근을 위해 현대백화점 지하를 지나고 있었다. 거긴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에 나아가는데 깊은 주의를 필요로 했다. 2/3쯤 지나가고 있을때, 순간 사람이 몰려 잠시 길을 멈추는 순간에 번개처럼 ‘즐겁다!’ 는 기분이 든 것이다. 아니면 한참이나 잊고 있던 기억을 운좋게 떠올린 것처럼 ‘아! 나야말로 즐거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던 (아.. 겨우 50페이지도 안읽은 주제에)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역자 본인이 SF소설 애호가이며 (기억이 맞나 모르겠는데) 현재 ‘행복한 이야기 총서’의 편집을 맡고 있는 분이어서 더욱 애착을 갖고 세심하게 번역했다는 기분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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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크리스찬은 사랑을 발견했다. 크리스찬은 사랑을 상실했다.

출근하다가 밑줄 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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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이 거의 다 갈 때쯤에야 ‘미사고의 숲’을 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 50페이지 정도가 고비였는데, 그건 작품의 내적인 요인들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였다. 핑계라면 큐브를 돌려 맞추는데 매료되어서 책을 가방 안에서 거의 꺼낸 적이 없다는 것도 있다. 어쨌든, 간만에 있는 힘을 다 해 단 몇 미터가 남은 정상을 기어 올라가는 기분으로 마지막 50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인과율은 작품 내에서 (혹은 숲 속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신화의, 혹은 심리의 원형, 수만년을 이어 내려온 전설들, 이야기들, 그것은 곳곳에서 재현되고 다시금 원형 속으로 융합된다.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신화적 원형들의 결과로 작품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 원형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으로써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즉, 귀네스(귀네비어 여왕) 전설은 스티븐에 의해 결말지어지는 것 (혈족만이 아웃사이더를 죽일 수 있다) 이 아니라, 스티븐으로부터 시작된다.
신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실에 기반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았다. 인류가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있어왔을 것이다. 모든 세대로부터 종의 기억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적 상상력들을 공급(Feedback)한다. 그러한 기억들이 위치하는 곳은 아마도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미사고의 숲 – 무의식’ 일 것이다.
흔히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우리는 꿈에서 상황을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던지.. 육식동물의 앞에서 대적하기 위해 총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던지.. 살인자로부터 도망치려고 열심히 뛰어도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려는 어떤 행위’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은 항상 해석당하기를 거부한다. 꿈은 항상 마음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꿈은 그럴듯한 거짓들 사이에 교묘히 진실을 숨긴다.
숲이 외부인들을 유혹해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명확한 (영웅적) 사실들로부터 집단적인 무의식은 해석되기를 거부하며, 디테일을 뭉그러뜨린다. 누구도 호랑이와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