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같은 가을

지난주 서울은 내내 안개만 가득했다. 그건 미세먼지였을지도 모르고, 대중교통수단의 매연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사무실 배란다에서 내다 본 서울은 그냥 안개만 가득 한 것 같았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약간은 의식적으로) ‘무진기행’의 첫 장면이 떠올랐고 그 짓눌어 딱딱해진 고대의 기억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탈출했는가, 에 관해서 몇 자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는 겸허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어둠으로 녹아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고작 한 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지난 주말에는 사납게 비가 내렸, 던 것 같다 사실은 집 밖에 나가질 않아서 모르겠다. 아주 먼 곳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혹은 혼몽한 꿈 속에서 그게 현실이라고 오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나는 너무 많이 몰랐다. 후배 하나는 가장 쓸쓸한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딴 사람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많이 욕을 하고 싶다. 벌떡 일어나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상스러운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지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마지막 단어를 내뱉은 그 직후에 얼마나 참담해질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슬프다. 그 말 밖에는, 사실 그 말도 마음 속으로만 두세번 말했다.

구십팔년도에 우리는 만났고 그때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서로를 기억하고 위안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때는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을, 아니 그래 하기는 했었지만서도 그보다 더 큰 아늑한 희망같은게 분명 있을꺼라고 호기있게 장담했었지. 그러나 사람의 말들은 얼마나 쉽게 세월에 녹아 사라지는지. 나는 왜 몰랐을까. 왜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나는 정말 싸가지가 없을까. 이제 막 걸어가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주저 앉고 싶을까…

가슴이 아프다. 미안하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여도, 그렇게 뻔뻔스레 미안하다는 말 하는 것도 또 미안해. 미안해..

한참을 뭘 써놓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쓰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나갔다가 흐린 하늘을 봤고, 봤다가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 거렸다.

어제 YES24에 책을 주문해 놓고서, 퇴근하다 말고 서점에 들러 또 책을 한 권 샀다. 그리고 또 오늘 YES24에서 책 주문. 모두 7권이던가 8권이던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괴델, 에셔, 바흐 (상, 하)’
‘라마와의 랑데뷰’
‘영원한 전쟁’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무려 전 4권!!)’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회사가 많다보니 근처 서점엔 재테크나 자기개발, 베스트셀러 중심의 책밖에는 없다. 게다가 요즘엔 왜 이리 일본작가들 책이 많이 나오는지… 가까스로 고른게 ‘스밀라..’ 였고, ‘괴델, 에셔, 바흐’는 엄청난 오역이라는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내 YES24 리스트에 올라가 있던 책이었으므로 이 기회에 그냥 사버렸다. ‘라마와의..’, ‘영원한 전쟁’은 SF소설인데 ‘라마와의..’ 는 존경해 마지 않는 클라크 형님의 작품. ‘세계를..’, ‘양심과..’도 오래전부터 리스트에 올려 뒀던 책이라서 이 기회에 함께 주문했고…

다른 인터넷 서점도 그런가 모르겠지만, YES24에는 원하는 책을 목록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애용하고 있다. 일단 눈에 띄는 것들은 죄다 ‘구매예정’이라는 항목에 몰아 붙여 넣고 구매한 것은 분류해서 ‘시집, 소설, 비소설, 미디어’ 등등의 항목으로 이동시킨다. 요거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튼 나는 요즘 매우 의욕저하다.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책을 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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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나서 추가.
‘라마와의 랑데뷰’. 역시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모란공원

추석을 맞아서 모란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일행은 김원영과 자칭 베스트 드라이버라는 그녀.


매번 방문할때마다 이상하게 더워서 땀을 뻘뻘흘리게 됩니다.

추석이 가까워서 그런지 성묘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래전이형 옆자리의 전태일 열사 묘에는 어떤 아주머니와 외국인, 그렇게 둘이서 묘지를 다듬고 있었어요. 원영이가 그녀에게 짧게 래전이형을 소개하는 동안 저는 땀을 뻘뻘흘리면서 간단히 묘지 주변을 청소했지요. 우리는 사간 소주와 북어를 놓고 간단하게 형의 안부를 물었고 형의 그 굳은 표정 아래서 술을 마셨습니다. 북어가 참 맛있었고… 음.

글쎄요, 정말 변하긴 변한걸까요. 으리으리한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었어요. 분명 모란공원에는 열사들만 묻혀 계시는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괜한 심술이 났습니다. 좋은 차, 좋은 음식,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 머리가 너무 어지럽군요.

하지만, 변한건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2001년 숨진 어느 여성열사는 예쁜 두 아이의 어머니였어요. 묘지 앞 유리케이스에는 두 아이의 해맑은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같은건 전혀 예감하지 못하는 그런 미소였지요. 정말 변한건 쥐똥만큼도 없어요.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갑니다.

아, 참.

추석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