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문득 불길한 꿈을 꿔서 편지를 쓴다.
한참 전에는 한영이형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꿈을 꿨지. 얼마 전엔 예전에 사귀던 아가씨가 다치는 꿈을 꿨어. 그러다 어제는 급기야 끔찍한 꿈을 꾸고 말았다. 꿈에 누가 문을 두드려서 조금 열어 주었더니 괴상하게 생긴 사내가 화살을 들고 그 틈을 비집어 들어오더라. 나는 깜짝 놀라 못들어오게 막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데, 그 사내가 씨익 웃더니 내 얼굴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입을 통과해서 아래턱까지 튀어나왔는데, 그리 아프게 느껴지진 않았고 급한 마음에 화살을 잡아 빼서 그 사내의 목에 대고 그었다. 내 입에서 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시꺼먼 피와, 사내의 잘린 목에서 흐르는 피가 사방에 넘실대는데 그제서야 입 안에 아렸다. 그리고 깼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인가 그랬고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올랐던게 바로 너였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평소에 네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못난 녀석아,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는거니. 어젠 주명이가 집에 다녀갔다. 평소 주명이가 과묵한건 알고 있지? 어젠 이상하게 다변이더라. 오자마자 맥주가 마시고 싶다 해서 통닭에 생맥주를 천씨씨인가 시켜서 둘이 나눠 먹고 그것도 모자라 소주와 맥주를 더 사와서 마셨다. 그러면서 주명이는 내내 자기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하는데, 도무지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색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지. 자기는 도무지 사회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둥, 지금 붓고 있는 적금을 타면 일전에 봐둔 시골 빈집에 들어가 살거라는 둥… 시골 빈집이라니! 뭐, 그래도 주명이 정도면 일주일에 두서너 마디만 할 수 있는 외진 곳에서라도 잘 살 것 같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짐작인데, 아무래도 주명이 이 녀석 연애하는 것 같다. 예전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서너번 전화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문자라도 보내던 녀석이 최근엔 연락이 뜸하다. 그래서 어제 주명이가 집에 온 것도 의외였고. 연희가 슬쩍 귀뜸해주었던 것도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였고 말야. 주명이도 슬슬 자리를 잡을 때가 된거지, 그치? 그래도 주명이 마저 연애를 하거나 (혹은)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조금 더 쓸쓸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 되면 지금보다 더 날 보러 오기가 힘들꺼 아니겠니. 주책맞게 이런 이야기 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걷기가 힘들다. 물리치료를 그렇게 오래 받았는데도 이놈의 다리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안보이는구나. 이젠 팔 힘도 없어서 간신히 휠체어를 끌고 집 앞, 그 너그러운 언덕을 오를라 치면 숨이 턱까지 차온다. 점점 내가 닿을 수 있는 곳들은 좁아지는데, 점점 너희들은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있지. 그리고 항상 그 선두엔 네가 있고 말야.
그래도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천둥벌거숭이마냥 제대로 하는건 없어도, 왠지 네게는 불끈불끈한 것이 느껴진다. 지금 또 몇 년 방황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걱정하는건 그저 험한 객지 생활에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 뿐이고, 그 외는 뭘 하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땐 마음이 조급했는데, 슬슬 잠이 오고 그만 쓸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다시 예전처럼 여유로워졌다. 역시 심란할땐 네 생각을 해야겠어.

슬쩍 창문을 여니, 깊은 밤, 사방에 안개비만 자욱하다. 이 편지를 다 쓰면 누구에게 부탁해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하나 (아니 그러고 보니 난 네 주소도 모르는구나.) 고민했는데, 그냥 서랍속에 또 넣어두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네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 전해주면 되겠지.

사랑과 존경,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담아.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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