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에릭 크립튼의 하이드 파크 공연 실황 가운데 “그래 내가 보안관을 쐈다.”를 들으면 피가 끓는다. 목구멍으로부터 간질간질하니 까끌한 욕설같은게 튀어나오려고 발악을 한다. 왠지는 잘 모르겠다. 가사 가운데 “내가 쏜건 보안관이지 보안관 대리 따위가 아냐” 라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쏘려면 보안관 정도는 쏴야 하는거 아닌가. 같은 교수형이라면 차라리 보안관 살해죄로 죽는게 낫지, 안그래? 아님 말고.

아무튼 요즘 상황이 좀 그렇다. 크게 한 건 하고 잠적할까 하고 생각중이다. 그리고 이 잠적은 아마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가 잠적하면 슬퍼할 많은 팬들이 있기에. 여러분 정말 사랑해요. 내 입에서 이런 고백이 쑥스럼 없이 튀어 나올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네. 아님 말고.

내가 없어도 다들 잘 살고.. 내가 없어도 너는 어제와 같고. (아마) 나에게도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다. 검은 현무암이거나, 겠지. 그정도가 딱 좋다. 검은 현무암. 서사모아 제도 같은데서 지구 생성부터 지구가 폭발할때까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현무암 말이다. 파도에 녹기도 하고 바람에 쓸리기도 하면서 차츰 키가 줄어드는 나는야 검은 현무암(이 되고 싶다). 아님 말고.

친구

불투명한 막 같은게 겹겹이 서 있었다. 하늘로는 그것이 없어서 그대로 푸른 하늘과 구름 같은 것들이 보였다. 전력으로 그 막에 몸을 부딪혀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고 그대로 부드럽게 나를 다시 되 튕겨내었다.
이 막은 미로처럼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으므로 온전하게 전진하기는 매우 힘이 들었다. 이를테면 머리 속으로 전진하려는 진로를 그리고 가급적이면 그 진로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막을 돌아가다 보면, 이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막이 왜 나를 가로막는지, 막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등은 사실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마도) 막이 있으니까 그걸 돌아서 가곤 했던 것이다.

가끔 쏴아-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걷다가 힘이 들면 막 아래에 누워서 바람에 얼굴을 맡겼다. 정말로 달콤한 맛이 났다. 좀 더 정교하게 이야기하면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맛이었다. 혹은 전지분유같은 맛. 혹은 얼음사탕같은 맛. 스산했지만 사실은 풍부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어디엔가 나처럼 이 막에 가로막혀 걷고 있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는 것을 걷기의 목표로 삼았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는건 의미가 없어, 알지?’
‘그렇겠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해.’
‘그런 다음엔?’
‘내가 세계에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해.’
‘그리고?’
‘꼭 살아야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피 속에 각인된 그런 외침. 현무암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로 그런 얘길 했었지. 건방지다는 느낌은 없었어, 왜냐하면 현무암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었으니까. 나는 슬며시 웃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그렇게 나는 백만년 동안 걸었다. 백만년 동안 사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정해진 것 일테니까. 단지 누군가 나처럼 이렇게 헤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납득하기 위한 시간일 뿐이었다. 서서히 나와 내가 분리되었고 그 뒤에 분리된 나는 바람이 되었고 남은 나는 또 막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육만년 쯤 뒤에 바람이 된 나는 나를 만나 소슬거리는 희망을 준다. 힘 내. 여긴 너 말고도 수많은 너들이 걷고 있는 땅이야.
그래서 나는 세상에 나처럼 가로막혀 걷고 있는 수 많은 다른 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감기

목이 많이 붓고 코가 막혀서 아프고 답답하며 짜증이 난다. 심하게 감기에 걸렸다. 어디 나갈 힘도 없고 다행스럽게도 오늘 하루 쌍십절 덕분에 학교엘 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침부터 멍하니 누워서 껌뻑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고를 반복했다. 와중에 스무통쯤 전화가 왔다. 절반은 일때문에 온 전화였고 절반은 핸드폰때문에 엄마가 건 전화였다. 아버지가 핸드폰을 바꿀때가 되어서 (실은 어머니도) 주말 내내 바꾸니 마니 오늘은 문을 연 대리점이 있니 없니 하면서 소란을 떨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젠가 한번 웃기지도 않은 에스케이텔레콤 우수 고객이라고 쓰던 아주 구형의 플립형 핸드폰을 중고 폴더형 핸드폰으로 바꾼적이 있다. 무료였는데, 그 속보이는 선심에도 부모님은 무슨 엄청난 혜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주 좋아했다. 그러던 것이 또 몇 해가 지나자 배터리가 금방 닳고 통화도 잘 안되고 등등의 이유로 핸드폰을 새로 개통해야 할까 말까 하는 중이었다. 에스케이텔레콤의 통화료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엘지냐 케이티에프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그만 지난 주말에 아버지가 핸드폰을 분실, 어머니는 잘 됐다고 이 기회에 바꿔버리자, 하게 된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왜 내 핸드폰은 화음벨이 안되냐, 왜 내 핸드폰은 칼라가 안되냐 하시면서 거의 매년 할부기간만 끝나면 최신형 핸드폰으로 바꾸는 동생의, 그야말로 2005년 최신형 위성 DMB폰을 만지작거리는게 끝내 마음에 걸려서 “제가 돈 낼테니까 바꾸세요.” 했는데, 드디어 오늘 은행앞에서 한달에 삼만 얼만가만 내면 된다는 그런 기종으로 어머니가 구입한 모양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신용 어쩔씨구리 상태이므로 내 명의로 개통하시느라,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도 대리점 직원이 “명의 확인차” 건 전화를 두 통인가 세 통쯤 받고 어머니의 전화도 받고… 아무튼 난리도 아니었다.
혼몽한 상태에서 내내 나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하면서 짜증을 부렸다. 대리점 직원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길래 한번 불러줬는데, 한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 또 전화가 오더니 본인 확인을 해야한다고 또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까 그 사람이었다. 짜증을 내면서 아까 당신이 한번 확인하지 않았냐, 왜 또 확인하냐 했더니 이건 절차상의 문제라는데 개뿔 와.. 속에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꾹 참았다. 분명 옆에 어머니가 계셨으므로 내가 욕을 막 하면 어머니 입장만 난처해지겠지, 하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내내 미칠것 같았다. 내 몫의 카드를 내어주고 백만원이건 이백만원이건 긁어버리세요, 하고 싶었다. 제발 나한테 말걸지 말고 맘대로 하세요. 게다가 오후쯤에 갑자기 수도가 안나오기 시작했고.. 그 뒤는 더이상 말하면 그때의 짜증이 상기되는 것 같아서 그만두련다.

저녁엔 조금 정신이 들어서 앞집 윗집으로 물이 안나오는 이유를 물으려 다녔다. 다들 모른다고 했다. 우편함에 보니 울산MBC에서 온 우편이 있었다. 지난주에 고래사랑 사이트 관리하시는 이재훈님이 귀신고래 다큐 DVD를 보내주신다고 하더니, 그거였다. DVD-ROM에 넣고 몇 분쯤 보다가 머리가 아파와서 그만 정지시켰다.

아아… 나는 언제쯤 숲 속 옹달샘, 토끼도 찾지 않는 깊은 물이 되어서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다. 배가 고프면 더 춥고 추우면 열을 내기 위해 몸을 떨게 되므로 더 배가 고파진다. 이 두 고통이 이중나선구조로 상승한다.

오늘 하루 나는 매우 심란했다. 계속되는 복통과 피로, 무력감 같은 것들이 나를 잡고 뒤흔드는데 제발 놔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듣질 않았다. 거의 모든 일반적인 것들이 구토가 날만큼 혐오스럽다. 오직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은 담배와 잠, 뿐이다. 어떤 녀석이 있는데, 난 그 녀석이 매우 싫어졌다, 지난 몇 일 동안 나는 기차의 덜컹임처럼 그 녀석을 떠올렸다. 떠올릴때마다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매우 싫어지게 되었다. 술집에서 들었던 말들, 그냥 상상, 생각.. 아마도 이런 것들이 싫어지게 된 요인 같다. 그런데 그 뿐이다.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비교적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맹렬하게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스러워 할 뿐이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살아간다. 나는 천칠백명 정도를 싫어하고 오십세명 정도를 극도로 미워하며 열세명 정도를 죽이고 싶다. 이미 머리 속에서는 수없이 살인이 이뤄졌다.

요즘 정말, 계속 현무암이 되고 싶다. 현무암.. 깊은 음영.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들.

무지개 – 그는 드디어 외톨이가 되었다.

파이(∏)에 가능한 모든 수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무지개엔 모든 색깔이 숨어있지. 천년도 더 된 이야기야. 어느 날 검은 현무암이 내게 전해준 이야기지.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면서.

그 현무암을 만난건 내가 오백살이 되어 기념으로 친구들이 보내 준 세계여행에서였어. 거기는 아마 스코틀랜드, 였던가 오슬로였지. 나는 유럽을 잘 몰라. 다 거기서 거기인가 싶은거지. 어쨌든 그 날은 매우 흐렸고 비나 눈이 올 것처럼 기어가는 날씨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폭음을 내는 엔진소리가 신경을 긁어대는, 삼만년된 낡은 관광버스를 타고 야트막한 사랑을 하나 넘어가던 때였는데 결국 버스는 사랑의 정점에서 엔진과열로 멈추고 말았지. 두더지 운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십분간 정차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지저세계로 수리공을 부르러 떠났고 관광객들은 투덜대며 버스에서 내려 잠시 머리를 식혔어. 나는 사랑을 헤매였다.

“관광객. 여길 좀 봐. 내 얘길 들어보겠나? 절대 기념품 같은걸 팔려는게 아냐.”

처음엔 그게 현무암이 한 말인지도 몰랐어. 너도 알다시피 현무암들은 눈에 잘 띄지 않잖아. 딱히 말을 하는 현무암인지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는 한참을 어리둥절했지.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앞으로 두 걸음, 왼쪽으로 세 걸음 걷고 보이는 나무를 왼손으로 잡은 뒤에 270도를 시계방향으로 돌아봐. 그럼 내가 보일꺼야.”

그래, 거기 그 녀석이 있었어. 꽤나 몸집이 큰 녀석이더군. 나는 무의식적으로 현무암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매끈하지? 칠천만년동안 비와 바람이 날 쓰다듬었더니 이렇게 되었어. 칠천만년이라… 어때, 너는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있어?”

“아니.”

천만년 이상의 시간을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웰즈의 ‘타임머신’을 떠올려. 물론 거기엔 80만년밖엔 안나오지만, 그 어느 소설보다 리얼하게 시간을 묘사하지. 시간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알아? 자주색 하늘과 보이지 않는 바람, 물질의 시체들이 있어. 그리고 영원동안 매직아워지.
현무암한테 웰즈의 이야길 하진 않았어. 어차피 그는 읽어보지도 못했을테니까.

“담배 가진거 좀 있나?”

“운이 좋네 너. 딱 두 대 남았는데.”

“그럼 한대씩 피우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서 현무암의 얼굴에 난 구멍 가운데 적당한 크기의 구멍에 꼽아줬지.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어.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슬쩍 버스 쪽을 쳐다보니까 두더쥐 운전사가 수리공과 함께 연신 버스 밑을 오락가락 하더라고. 금방 고쳐질 것 같지 않아서 현무암에게 그러라고 했지.

“나는 사실 강물이었다. 어두운 지하수로를 한참이나 굽이 돌다가 지상으로 스며 나왔을 때, 감격하고 말았지. 햇빛과 꽃과 바람, 때로는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발목을 휘감아 흘러가기도 했고 무거운 배를 밑으로부터 밀어 올려 수면에 띄우는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계속 하류로 밀려갔어. 밀려갔다, 고 해야 옳을꺼야. 당시에 나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그랬던건 아니었거든. 뭐랄까, 이 언덕에 가만히 앉아 일년 가운데 칠천팔백삼십일쯤 흐린 저 하늘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따금씩 홍수가 나는 것처럼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걸 볼 수 있어. 구름이 반으로 갈리면서 말이지. 그런거였어. 오월의 빛, 장마처럼 내리는 빛.”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흘끔 하늘을 올려다봤지. 잠자리가 낮게 날았어, 잠자리가.

“강물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아니? 노을이 있다. 검지만 완전히 검지는 않지. 도무지 그 빛깔이 생각나지 않아, 분명히 나는 그걸 봤는데 말야. 사람들은 정오의 태양을 찬미해, 그 강렬함, 그 아둔함을 좋아하지. 오 솔레 미오, 어쩌구 라는거야. 오 솔레 미오? 아, 언젠가 바람이 전해 준 노래야. 바람은 우체통에게서 배웠다더군.
하지만 노을은 완전한 빛깔이야.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모든 색이지. 무지개를 봤니? 무지개는 노을의 사촌쯤 되는 녀석이야. 녀석은 비가 내린 뒤에 내키면 나타나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어. 비록 내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그런게 아니겠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동경할 수 밖에 없어. 그래서 현무암이 되기로 했지.”

“왜 하필 현무암이?”

“현무암이 되면 영원히 동경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키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돼. 가끔 바람이 놀러 와 세상 일을 전해주지. 나는 그냥 응, 응, 그렇구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거야. 그 외에는 누구도 내게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아.”

“너 오늘 현무암치고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가.”

“외롭지는 않았어?”

“어떤게 외로운거니. 나는 항상 외로웠어. 하지만 그 어느때에도 행복했지.”

“그럼 이 구멍이 네 눈물이 솟는 자국이란 말야?”

“응. 마치 네 두 눈이 항상 충열되어 있는 것처럼.”

“… 나는 말야,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몸이나 마음이 몹시 허탈해져. 꼭 뭔가 엄청나게 서러운 일이 있어서 두세시간동안 온 기력을 쏟아 울고 난 다음처럼. 하지만 난 전혀 슬프지 않았는걸.”

“나는 너보다 구십오억년이나 더 살았어. 시간은 진실의 알을 품고 있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힘이 난다.”

“고맙다면, 이제 담배를 빼 주겠어? 아까부터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바람에 몹시 맵다.”

“엇, 미안해.”

하고 나는 담배를 조심스럽게 빼 주었지. 우리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봤어. 혹시나 빛이 내리지 않을까 하고. 대신 노오란 나비가 날아와 현무암 머리에 앉았다.

“현무암씨. 너는 언젠가 사라지니?”

“아니. 희미한 웃음이 될꺼야.”

“나는?”

“너는 바람이 되겠지.”

“나도 누군갈 사랑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넌 그럴 수 없어. 이미 네 안에서 모든 세계가 죽어버렸어.”

“너무 아프다…”

“미안. 하지만 내 잘못이 아냐. 모두 네 잘못이야.

“난 바람이 되지 않을거야. 대신 현무암이 될래. 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너도 이미 네 안의 모든 세계를 죽여버렸구나!”

순간 현무암은 희미한 웃음이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