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이 raw-data의 형태로 서로에게 전해지는 세상을 떠올려보자. 물리적인 발화는 목적를 잃고 세계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오히려 진화하여 서로는 서로에게 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고 해서, 그러나, 다툼과 증오, 질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타협해야 할 부분들이 남아있다. 완전한 의미의 전달이 곧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심지어 우리는 불완전하기까지 하다.
몇번이고 말이 가지는 무서움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참혹한 곳인지, 문만 열면 날선 말들이 도산검림을 이루는 사회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적다 보면 내 말도 똑같이 비수같이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어서 지우고, 또 쓰다가 지우고 그랬다. 완전한 소통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 두렵다.
애정과 사랑,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개인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평가하고 평가된다. 그 매개체는 말이다. 이건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내 사랑의 증거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해도, 네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매 순간 나는 평가된다. 평가되는 순간 말은 가지치기를 당하고 무한한 가능성들이 하나의 사실로 수렴된다. 평가되어 고정된 말은 발화되기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투고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토론하고 선전하고 외치고 웅변하고 호소해도,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말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의 계층 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봤다. 그것은 권력이다.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 우위자는 항상 너일 수 밖에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너는 열리지 않는 신비고, 나는 그 숲을 탐색하는 여행자이다. 너는 조용히 세계 속에 흐르며 그 대지 위에 나를 가둔다. 나의 상상은 항상 네 대지 위에서만 가능하다.
검찰은 용산 참화의 원인이 시위 주동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말의 가공할 힘이다. 그것은 비가역적이다. 우리의 상상은 이제부터 계속 그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인풋보다 더 뛰어난 아웃풋은 불가능하다. 평가되는 순간 결과는 고정된다. 바뀔 수 없다. 어디에선가 ‘희망이 모조리 사라진 순간이 바로 절망이다.’라고 적었다. 인간은 절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전복하는 힘은 가능하지 않은 꿈꾸기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모순어다. 그것은 신을 넘어선다. 신은 결코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없지만, 인간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어. 나는 불가능한 것을 꿈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네가 날 사랑하는 것을 꿈꾸는거야.
거꾸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말이다, 모든 것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해야해.
말을 멈추는 순간 존재는 의미를 잃어버려.
사랑해, 라고 말하고
아니야, 라고 말하고
모두 부숴버리자, 라고 말하고
승리, 라고 말하고
네 냄새가 그리워, 라고 말하고
안녕, 하고 말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