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MBC에서 일요일에 하는 진실 혹은 거짓인가.. 하는 프로에서
영국의 음악그룹인 ‘첨바왐바(Chumbawamba)’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귀에 익은 음악의 뒷편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손이 불끈 쥐어졌다. (그나저나 오락프로에서 이런 내용이 방영되다니
놀라울 뿐이다.)
관계의 최상급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 역지사지 일
것이다. 영어의 숙어 가운데 ‘put yourself in the other person’s shoes’ 즉, ‘남의
신을 신어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역지사지의 개념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발에 잘 맞지도 않는 남의 신을 신어 본다는 것은 그만큼 역지사지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이 노동자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것, 영국인이 아닌 우리가 리버풀항만노동자들의
절규에 동참한다는 것, 천재지변에 신음하는 동남아시아 인민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
언제 폭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 중동 어린이의 불안함을 공유한다는 것은 모두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래, 가장 현명한 자가 있다면 그는 쇼펜하우어식의 천재일 것이다. 신적 직관을 인간의 몸에
담고 세계를 꿰뚫어 사물을 보편으로 경험하는 자. 그에게 세상은 이질적이고 불편한 대립자들로
가득찬 곳이 아니라, 대립을 넘어 하나의 전체인 세계이다.
그 아래 단계는 깊고 끈질긴 헤아림을 통해 동일성을 체득한 자 – 철학하는 자이다. 그에게는
물론 직관 같은 것은 없다. 그는, 그러나, 합일의 가능성을 믿는다. 근대의 사유, 차등하는 사유,
구분짓고 전체에서 ‘나’를 분리해 내고 ‘너’를 존재의 저편에 유기하는 사유가 있었다.
철학하는 자는 끝내 이 대립을 끝장내고 찟긴 ‘너’와 ‘나’를 하나로 기워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하는 자는 경험하지 않아도 대립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 다음으로는 경험을 통해서만 ‘아는’ 자가 있다. 고통받는 타인이 바로 자기임을,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에게 세계는 닫혀있으며, 어둠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폭력의 세월은 닥쳐온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주체로 남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타인에 의해서 언젠가 그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런 후에야 그는 간신히 자신의 공간에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경험해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 이 자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지함이 순수함을 의미한다면, 그래도 좋겠지만, 이 자의 무지함은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신적 직관을 갖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므로 이런 경우는 논외로 한다고 하고, 숙고를 통해
하나됨에 이르는 철학하는 자의 길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내가 비정규직이 아니더라도, 지진이나 태풍에 상처입지 않더라도, 전쟁의
참화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그런 자리에 내가 있다면 나 또한 같은
고통을 받게 되리란 것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로 알리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연대는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함께 행동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세계을 회복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