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산맥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신화를 배경으로한 수많은 단편을 써왔다. 물론 크툴루 신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신화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전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개인에 의해 창조된 인공적인 세계는 크툴루 신화가 처음이었다. (반지전쟁의 톨킨처럼) 그는 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여러 아이디어를 직조해 어둡고 광막하며 우주적인 공포(Cosmic Horror)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열광적인 독자들에 의해서 이 신화는 정리되어서 오늘날의 크툴루 신화가 되었다.

그는 장편은 별로 쓰지 않았는데, 그 드문 장편 가운데서도 수작이 바로 광기의 산맥이다. 광기의 산맥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유일한 장편(유일한 장편으로 알고 있다.)인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 관한 오마쥬다. 남극으로 탐사를 떠난 탐험대와 그들의 눈에 펼쳐진 초고대의 거대문명. 그리고 그 어두운 지하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들… 만약 이 이야기가 매우 낯익게 느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이 암중으로 우리의 미디어 곳곳에 침투했다는 이야기다.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모두가 그렇듯이, 그의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이 거대하고 오래된 어두운 세계에 대한 묘사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일부러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산꼭대기 부분에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산마루 뒤쪽으로 보이는 붉은 노을만을 노려보았다…

중략

.. 신경 쇠약의 증세가 한 단계 더 심해진 댄포스는 침착하지 못했다. 초조한 듯 몸을 뒤채던 그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고, 멀어지는 핏빛 하늘과, 이상한 모양의 동굴 입구가 나있는 산봉우리와, 사각형의 구조물이 매달려 있는 산등성이, 거대한 성벽으로 빼곡하게 뒤덮인 구릉지대, 소용돌이치는 구름으로 기이한 모양을 빚어내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중략

… 댄포스는 그토록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던 마지막 공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내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중략

… 이상하게도 그것은 우리가 지나쳐온 거석 도시나 동굴,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기이한 광기의 산맥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고백했었다. 소용돌이치는 수증기 구름 한가운데서, 고대의 존재들조차 멀리하고 두려워했던 거대한 보랏빛 산맥 너머의 끔찍한 광경을 순간적으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번도 공포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선가 밝혔던대로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한 감정은 두려움이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렬한 두려움은 바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무튼 깊은 밤에 두서없이 공포영화를 보다가 문득 광기의 산맥이 영화화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살펴보니, 기예르모 델 토로가 영화화 하려고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는데, 모든 원작을 영화화 하려는 작업이 그렇듯이 과연 이 훌륭한 원작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아무래도 공포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되기 쉽다. 걸작으로 남는 공포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강렬한 캐릭터가 그 중심에 있다. (프레디, 제이슨, 핀헤드… 또 뭐 있지?) 하지만 광기의 산맥의 진수는 인물이 아니라 인물들이 위치한 백색의 대지, 남극에 있는 것이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의 권말에 적힌 서울대 영문과 김성곤 교수의 이야기를 싣고 싶은데, 타이핑으로 옮기기에 너무 길고 귀찮아서..) 여기서는 심지어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쫓기는 사건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것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러브크래프트 매니아가 아니면 매우 지루해 할 것이다. 결국 기예르모는 이 두 영화의 요소를 적절히 배분해야 할텐데, 과연 얼마나 양자(일반/매니아)의 사랑을 받게 될른지는 뚜껑이 열려봐야 알 것이다.

광기의 산맥”에 대한 1개의 생각

  1. 핑백: Kirrie's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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