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눈 쌓인 둔덕들이 자그마한 음영을 만들어 내다가 이내 흰 빛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흰색 포드 승용차가 보인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차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차는 나를 지나쳐 조금 더 달리다가 멈춰서더니, 다시 후진해 내게로 다가왔다.
“어디까지 갑니까?”
“그냥… 다음 마을에서 내려주시면 고맙겠어요.”
…
..
“멀더, 정말 그 신부의 말을 믿는거에요?”
“왜 믿지 못하죠, 스컬리? 그는 우리의 속임수를 단번에 알아차렸어요.”
멀더는 그 말을 마치더니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당신은 ‘영매’를 믿습니까? 그러니까… 초자연 현상 같은 것들을?”
“글쎄요… 적어도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현상들은 믿는 걸로 해두지요.”
“허, 참. 그런걸 어떻게 판단합니까? 왜 솔직하지 못하죠?”
“단지 난 그런 것들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그런 당신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나요?”
“멀더, 그만해요. 미안해요. 이 남자는 어딘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전혀 보지 못하거든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요? 갑자기 영매라니…”
멀더와 스컬리는 서로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별 일은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환영을 본다고 해서 말이죠.”
“계시 같은거 말이죠?”
“네.”
눈보라는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침묵했고 엔진 소리만 요란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적에 그런 드라마를 본 적이 있어요. 초자연 현상을 조사하는 수사관에 관한 이야기였죠. 외계인도 나오고 괴물도 나오고 유령도, 혹은 그 이상의 설명 불가한 사건도 나오는 그런 이야기였어요. 그런걸 보는걸 즐겨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니, 내가 그걸 수년간 계속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흥밋꺼리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인 두 수사관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해 가면서 ‘믿음’ 그 자체를 믿는 모습에 감동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사실 뭘 믿느냐는 중요한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린 모두 서로의 믿음을 갖고 있고 또 그런 믿음들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는다는 행위 그 자체인거죠. 나는 정말 끊임없이 희구하고 경탄하고 싸워서 지켜내며 소중하게 여길 만 한 어떤 것들을 갖고 있을까…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을까… 온 세계가 나의 믿음에 대해 적대적일 때에도 나는 믿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멀더 그리고 스컬리, 그래서 말이죠.”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나는 당신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당신들은 지난 십년 간 수많은 멸시와 모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고 있군요. 멀더, 당신의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믿기를 바래요. 스컬리, 나는 아직 자기의 꼬리를 무는 뱀을 기억해요. 피해자가 멀더를 의지하고 멀더가 당신을 의지한다면, 과연 당신은 누굴 의지하고 있나요? 그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단 한 번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의 믿음 또한 나는 존경해요.”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길의 끝에서 마을이 나타났다.
…
..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우린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덕분에 따뜻하게 올 수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멋적게 쳐다보았다.
“멀더, 할 말이 있어요. 핸드폰 잘 챙겨요.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스컬리에게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스컬리. 포기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손을 흔들며 그들과 멀어져 갔다. 뱃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서 길을 걷기가 수월해졌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눈보라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
믿는 자들의 기록
스프는 있습니다. (김진혁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