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성에 대한 지리적 우위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지맥이 좋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내가 사는 화평 빌라 앞 마당은 동네 노인들의 다운타운이다. 이런 현상이 시작된 시기는 약 1~2년 정도 된 것 같다. 처음엔 이 빌라에 사는 노인들만 모여서 한담을 나누거나 장기를 두거나 했는데, 점차 인근 빌라의 노인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중심에 대한 욕망은 공평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화평 빌라 마당이 다운타운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 기억으로 원래의 다운타운은 옆 빌라인 신월 빌라의 좁은 골목이었다. 여기에 누군가 버린 것을 주워서 가져다 놓은 의자가 있어서 노인들이 모였던 것이 신월 3동 46번지 일대 노인 다운타운의 시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를테면 ‘신흥’ 다운타운인 화평 빌라로 그 세를 넘겨 주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화평 빌라 마당이 다운타운이 되자 운 좋게 ‘다운타운족’이 되어 버린 A군 노인들과 (화평 빌라에 사는 노인들과 모여드는 인근 빌라 거주 노인들. 인근 빌라 거주 노인들은 대부분 화평 빌라에 사는 노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있다.) A군에 합류하지 못한 B군 노인들로 (아직까지도 신월 빌라를 고집하는 구세력) 이 세력을 나눠 볼 수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B군 노인들은 A군 노인들에 대해서 약간의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 두 세력 간에 별다른 교류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의 소일거리는 다음의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 폐지 수집
페지 수집의 경우 화평 빌라에 사는 C 할머니가 신월 3동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이 할머니의 나와바리는 인근 화곡동까지 넘볼 지경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노인들의 폐지 수집이 ‘하루 벌어서 라면이나 사먹으려고’ 내지는 ‘손주 용돈이나 줘보려고’ 시작하는 생계형 폐지 수집이라면 C 할머니는 거의 기업형 폐지 수집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일단 이 할머니는 폐지를 수집한 그 날 즉시 고물상에 넘기지 않는다. 거의 1.5톤 트럭 두대 분량의 폐지를 모아서 정리해 놓고 나서야 느긋하게 고물상 트럭을 호출한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트럭한 15만원에서 30만원 정도라나. (이것도 지나가며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 않다.) 이 할머니는 폐지를 화평 빌라 바로 옆 도로에 쌓아 놓는데, 이것이 한때 화평 빌라의 집값을 하락하게 하는 중요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지적이 주민들로부터 나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 간에 조정이 이뤄져, 현재는 할머니도 비교적 깔끔하게 폐지를 정리해 놓고 주민들은 주민들 나름대로 의외로 버리려면 어떻게 버려야 할지 고민되는 폐지들을 (박스나 옷가지, 기타 고장난 전자제품들) 쉽게 할머니에게 인계함으로써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누가 정말 생계형 폐지 수집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2. 장기, 바둑
장기나 바둑은 주로 할아버지들의 차지다. 내게 슬슬 졸음이 몰려 오는 하오 무렵부터 장기판에 알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빌라 옆엔 할아버지들이 모여 장기를 두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특기할 만 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를테면 ‘누가봐도 할아버지’인 부류가 있다면 ‘분명 아저씨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들과 같이 놀려고 하는 아저씨’가 있다는 것이다. 나름 다른 할아버지들보다 젊다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아저씨는 이 부류에서 상당한 이슈 메이커다. 매 이슈마다 (비교적) 정확하게 사건의 개요를 들려주는 것이 아마도 매일 아침에 신문을 꼼꼼히 읽고 이야기 할 내용을 정리하는 폼세다.
3. 수다
역시 수다 하면 할머니들. 가끔 수다와 함께 반찬 거리를 다듬는 모습도 보인다. 더불어 급한 일이 생기면 빌라 새댁 애기도 봐준다. 역시 할머니 하면 이런 느낌. 나는 나름 밖에 나가는데 불편해서 (내가 나가면 일제히 할머니들이 날 본다.) 좀 그렇지만.
아무튼 왜 이 다운타운 운운 하면서 이야길 꺼냈냐면, 아까 아침 7시에 담배가 떨어져서 가계에 가다가 구 다운타운 (신월 빌라)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봤기 때문이다. 사실 아침 7시 하면 누구에게는 꽤 시간이 흐른 아침 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겐 이른 아침이다. 특히나 어디 출근 하는 것도 아닌 할머니에게는.
마치 그 자리에서 밤을 샌 것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 뭘 보고 있는 것일까. 마실 나올 친구들을 기다린다고 하면 그건 너무 이른 시간인데, 하고 생각해 본다. 늙으면 잠이 줄어든다고 하지. 새벽같이 일어나 자식 내외 출근 준비 시키고 (혹은 할아버지 아침 올리고) 나니 정전 된 것처럼 할 일이 없어 나와 본 것 일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왜 안 나올까, 너무 빨리 나온걸까, 하고 생각하겠지.
어쩌면 그 할머니는 깨어서 다시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꿈이 아니라 먼 과거의 꿈 말이지.
그나저나 우리 동네엔 왜 노인정이 없는걸까. 구청에 한 번 건의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