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개를 돌리니 BBC 월드 뉴스에서 김대중 서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술집 안은 시끄러웠고 애초에 화면만 보는 텔레비젼이었으므로, 게다가 뉴스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한마디 알아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고 다시 떴다. 이번에는 티아라 쇼 시즌 4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그가 그녀의 쇼에 출연했을 당시를 회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여섯, 열넷, 열여섯살의 미국 애들이 나왔다. 타이틀로는 ‘(오바마가 미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미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열여섯살의 데이비드’ 뭐 이런 것이었다. 티아라는 그 중에 열여섯살 먹은 흑인 소녀에게 대통령 선거 당시 가족이 참여했던 오바마 선거 유세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내가 죽기 전에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다니 참 감개가 무량하다’고 하셨어요.”
티아라의 눈물이거나 열여섯살 흑인 소녀의 감회 같은건 사실 우리가 자본을 소비하는 새로운 양태라고 생각한다. 체의 티셔츠이거나 자서전 같은게 ‘소비’되는 것처럼. 그런데 좋은 소비와 나쁜 소비가 있을까. 에이 씨발, 그런게 어딨어. 사는거 자체가 다른 존재를 씹어먹는 죄악의 연속인데, 소비는 죄다 나쁜거지. 어쨌든.
그래도 그 눈물을 믿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순도 구십구쩜구퍼센트의 개뻥이겠으나, 그래도 영쩜영일퍼센트 정도의 진실이란게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거다. 삼성카드로 엘지데이콤이나 아이엔아이, 모빌리언스 같은 결제대행사를 통해 대략 결제당 이퍼센트에서 사퍼센트 사이의 수수료를 물고 저 머나먼 나라의 머나먼 가난에 기부하는, 쪼금 아이러니컬한 상태를 인정하고 싶은거다.
이런 상황에서 당위를 말하는건 정당하다. 왜냐하면 당위가 당위가 아니니까. 아무도 선하게 살지 않는데, 선하게 살자는 당위를 말하는건 혁명을 하자는거다. 혁명을 하자는건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씨발 그럼 애새끼들도 바꾸게?), 내적으로는 보수지만 외적으로는 진보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라는게 아니다. 자기 자신부터가 원자수준에서 변하하자는거다. 이제 제발 ‘유년기의 끝’을 보자는거다. 꼰대들이 아무리 졸라게 세상을 부여잡아도 애들은 점점 더 이해 불가능하게 변한다. 어른들을 능가한다.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란 이야기다.
테드 창이 그랬다. 니가 인정하건 인정할 수 없건 간에 우리는 이미 변화의 도중에 있으며, 오직 환상 속에서 귀환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세상을 이전 상태로 고정시키려고 시도한다. 나는 그걸 정치적으로 (누가 뭐라든!) 읽었으며, 그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제도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정치다.
술 좀 먹어서 말이 자꾸 꼬리를 문다.
나는 조금씩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한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