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명품위조단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는 그들의 치밀한 짝퉁 명품가방 유통과정을 밝히면서, 그들이 만든 제품이 진품과 매우 흡사해서 본사 직원이 와서 확인을 해도 제대로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대로 에이전시 샾에 걸어 놓아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걸 두고 한국인 손재주의 쾌거라고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웃지 못할 일이 되었다.
그런데, 진품과 그정도로 흡사하다면 그건 이미 진품이 아닐까? 심리철학의 사고실험 가운데 ‘중국인의 방 논증’이라는 것이 있다. 밀폐된 두 방에 다국어에 통역에 능통한 사람과 기계가 들어 있고 그 두 방에 번역되기를 바라는 영어 문장을 넣었을 때 우리는 이 조건만 가지고는 기계의 상태, 즉 기계가 인간과 같이 입력받은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처리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가에 대한 답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고실험은 다시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관찰자가 타인을 관찰할 때 결코 그의 심적상태를 활자 읽듯이 명징하게 사실화 할 수 없다. 밑천이 빈약해 더 이상 깊게는 안들어가지만…
아무튼 진퉁과 짝퉁의 얘기다. 표면적 증거만으로는 두 제품의 진/가를 판단할 수 없을때, 과연 어느 하나를 짝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재질이 다를 것이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명품을 구매할 때 엄증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 제품의 재질을 하나하나 검사하지는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커다란 상자처럼 생겼고, 안에 식재료를 넣어 두면 시원하게 만드는 기계를 ‘냉장고’라고 하지 않는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자, 그런데 확실히 진퉁과 짝퉁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이한 소비 유행에 근거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진품 구찌가방은 결코 진품 구찌가방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건 구찌에서 만든 가방이다. 그게 짝퉁이라도 구찌에서 만들었으면, 즉 일반적인 명품의 제품 기준 (견고성, 디자인 등등) 에 미달하는 제품이라 할지라도 그건 진퉁이 되는 것이다. 명품이 더 오래 쓰니까 결국은 합리적 소비다 라고 하는건 순전히 거짓이다. 백만원짜리 진품 가방을 십
년 쓰느니 만원짜리 짝퉁을 일년씩 열번 사는게 훨씬 더 경제적이다.
뻔한 얘기지만 결국 우리가 소비하는 명품은 제품 자체가 아니라 명품이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럼 왜 우리는 그토록 광적으로 진퉁과 짝퉁을 구분하려고 하는가. 왜 짝퉁을 그리도 못살게 하는가. 그정도로 구분하기 힘든 짝퉁이라면 오히려 값싼 짝퉁을 구매해서 진퉁처럼 여기면 될 일이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 이거 진품이야, 하고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진퉁 제조사의 입장에서 그건 말도 안될 일이다. 짝퉁을 인정하고 소비하는 풍조는 그들의 매출 격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애초 구분하기도 힘든 진퉁과 짝퉁을 계속적으로 구분하게 만들고, 지적재산권이니 무역협정이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진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게 자본의 논리다.
꼬리를 내려야겠다. 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고, 결코 짝퉁 옹호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가져올 수도 있는 경제적 혼란을 노리는 사회교란세력도 아니다. 가끔 우리는 모든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신한카드가 준다는 엄청난 포인트를 당연히 생각하고 쇼를 하면 극장표도 막 주는 걸로, 국민 건강을 걱정한다는 보복부가 매년 담배값 인상을 시도 하는 것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당연한건 당연한게 아닌게 될 수도 있다. 속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