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앞 뜰에서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노천카페의 형식으로 맥주를 판다. 맥주값은 놀랄만큼 싸고 (이 말은 상상했던 것만큼 비싸지 않다는 얘기다. 500 한 잔에 2000원) 맛도 놀랄만큼 진하다. 물론, 안주는 시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까짓 일로 종업원이 얼굴을 찌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나에겐 일종의 거만과 허위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세종문화회관. 단 한번도 그 곳에서 실연되는 공연을 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때가 되면 이 맥주맛을 잊지 못해서 때론 혼자서 때론 몇 명의 친구들과 지나가다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삼년째구나 벌서.
어젠 인사동에서 일때문에 미팅이 있어서 갔다가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왔다. 걸어가기엔 좀 빠듯한 거리, 라고 느꼈다. 역시 연애할때하곤 다른 모양이다. 날씨도 더웠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여서 정류장 앞에 도착했을땐 거의 녹아웃 상태였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간이 테이블이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콜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나서 무작정 나도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시킨다.
별다른 집회일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짭새들은 불온하게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건너편 미 대사관 앞에선 한양대 학생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깃발을 들고 서 있다. 그마저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여전히 고가의 대형카메라를 든 멋진 남성과 귀엽고 아담하면서도 역시 상당히 고가인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를 든 멋진 여성들은 연신 세종문화회관을 찍어댄다. 재잘재잘. 여전히 버스들은 줄을 이어 정류장에 도착했다가 출발하고를 반복. 공복에 마신 맥주탓인지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딱히 전화해서 불러낼 사람도 없었고 기다리는 것도 지쳐서 혼자서 홀짝홀짝 맥주를 마신다. 세종문화회관의 거용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서 지친 청춘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갑자기 심한 복통이 몰려왔으나 이내 취기로 인해 통증이 가셨다.
그런데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동기도 없고 대상도 없는 막연한 분노. 서울의 중심, 이 지리적 중심 혹은 이데올로기적 중심, 그것도 아니면 소문의 중심이거나 서민들이 가지는 막연한 자부심으로써의 중심. 그 중심에다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 싶었거나, 혹은 내 머리위로 핵폭탄을 떨어트리고 싶었다. 무기력과 교만과 낙담의 중심에다가 말이다.
잠시 머리를 텅 비웠다. 젠장. 욕이 나온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왜 여기서 대낮에 맥주나 마시고 자빠졌나. 다시 사물이 분주히 가속한다. 나는 점진적으로 고도를 높였다.
버스가 도착해서 시원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이어폰에선 피아졸라의 센트럴파크 공연실황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전 지금 농담하려는게 아닙니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 악기는 비현실적인(surrealistic) 역정을 겪었지만 이것은 마치 탱고가 어떻게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 같은 곳에서부터 태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뉴올리언즈 재즈같이. 이런 것들은 그 시작이 분명하진 않지요. 하지만 오늘은 분명할껍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자유, 음악 그리고 사랑같은게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매우 감사합니다. 제 음악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