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데도 많은 비가 내린다. 어딘가 모르게 검은 음모의 냄새가 나는 비다.
오늘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틈틈히 전에 사 두었던 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소설을 다 읽었다. 학교 서점에 교재를 사러 갔을때 서가에 이 책이 즐비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이 책을 교재로 쓰는 수업이 있는 것 같다. 애써 찾아볼까 하다가 의미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이 책이 중대하냐, 고 하면 별로 그런 책은 아니다.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만큼 문제작들이 실린 것도 아니고 2005년 올해의 소설이긴 해도 2008년이나 2010년에 읽어도 무방할 것들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대한 책이다.
전에 언급했다시피 나는 지난 몇 달, 혹은 몇 년간 글다운 글을 읽지 못했다. 습기를 갈무리 하지 못해서 퍽퍽 터져나가는 고목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일단 머리가 맑아졌고 (한쪽으로만) 아침에 일어나 쓸데없이 우는 일도 많이 줄었다. 어제 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어떤 녀석이 “자화상을 썼을때의 서정주 나이가 스물 셋이더라.”는 말을 꺼냈는데, 그러면서 나는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는 문장을 아무런 고통없이도 상기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괜찮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막상 뚝이 터지고 사막에 홍수가 나자 모래는 미친듯이 물을 머금는다. 정신없이, 혼란스럽게. 아아, 이 좋은걸 왜 마다하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챙피한 표현이지만, 질질 쌀 정도로. 아 그렇구나. 그건 오르가즘이었다. 몇년을 참아왔던 사정(射精) 같은 것.
박완서, 구효서, 윤대녕 이 세 고수들은 정말로 훌륭했다. 특히나 윤대녕의 탱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했다. 내가 그 동안 윤대녕에게 바래왔던 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오직 그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산 것은 의의가 있다, 할 정도로. (그래서 읽을 작품들은 내가 그 동안 뒤에서 호박씨를 까대던 윤대녕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그의 모든 작품을 샅샅이 찾아 읽기로 했다.) 박완서는 이 사람이 아직도, 할 정도였고 구효서는 나름대로 기품이 있었다.
이름을 잘 모르는 젊은 작가 가운데에선,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이 매우 즐거웠다. 그는 분명히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다.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은 매끄러웠지만 너무 정직했다.
이혜경의 피아간, 은 너무 뻔한 얘기 같아서 읽다가 말았고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은 단편소설이 가지는 힘을 십분 발휘해내는 힘이 있었다. 정이현 (아 정이현!) 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뭐 대개가 그랬지만) 그냥 노코멘트 할란다. 다 읽고 난 다음에 “혹시 서울예대 출신 아닐까?” 했는데 이력을 찾아보니 역시나 그랬다. 까닭없이 화가 나는 서울예대 출신들. (혹시나 상처받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는 아직 읽는 중.
마지막으로.. 조성기의 작은 인간이 남았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왜 이게 좋은 소설에 뽑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품평을 읽어봐도 뭔가 두리뭉실하고 확연하지가 않다. 미안하지만, 이 선집에 실린 작품중에 제일 재미없었다.
사실 오늘 대학생활 7년 가운데 최악으로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 오며가며 책을 읽다보니 짜증이 싹 사라졌다.
여러분 책을 읽으면 재밌습니다! 하하하.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 좋던데? 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계간지에서 보았지만..학교 다니니 좋겠다. 아, 일하기 싫어
하성란씨도 서울예대 아닌가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 에쿠니 가오리류의 한국적 대안이 된다면 좋겠는데요;
소운// 네 무용지물 박물관 좋았어요. 근데… 음.. 누나 말도 이해가 되는게, 내가 만약 이 단편을 그 단편 자체로 어디 다른 곳에서 봤다면 굉장히 빠져들었을꺼에요. 근데 워낙 쟁쟁한 작품들이 포진한 선집이라 상대적으로 "정직하게" 보였죠. 어떻게 보면 뻔하잖아요. 타인에 의한 구원, 혹은 자기 발견, 자기 긍정, 희망, 그런 것들… 아무쪼록 구스 반 산트의 커트 코베인 어쩔씨구리가 엄청 기대되네요 ㅎㅎㅎ (뜬금없다 -_-;;)
렌// 그냐… 에쿠니 가오리류.. 하니까 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웨하스로 만든 집은 좋았다. 예의 "서울예대는 싫다" 병은 어쩌면 굉장히 핑계인지도 몰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