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밤

지금 막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사가 퇴근했고 덕분에 사무실엔 나 혼자 있다.

어쩌면 파견근무 나간 대리 하나가 들어 올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들어와도 상관없고…

하루 종일 킹즈 오브 컨비니언스의 ‘텅빈 거리의 폭도들’을 듣는다.
왜냐하면 노트북에 그 앨범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잘 살펴보면 에릭 크립튼의 하이드 파크 공연 실황 앨범도 있을텐데, 왠지 지금 그건 어울리지 않는다.)
낮에 한참 킹즈.. 를 듣다가 요즘 귀에 익은 선율이 나와서 앞자리의 디자이너에게 농을 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어요?’
‘음… 맥스웰 인가?’

그정도.

슬슬 또 오른쪽 어깨가 결리기 시작했다. 어제는 두통까지 너무 심했는데, 상황에 따라서 의미없다고 판단되면 절대로 아픈 내색을 안하기 때문에 그냥 있었다.
가끔 생각만으로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면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지만 절대로 잠을 이룰 수 없는, 그런 꿈을 꾼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꿈인지 제대로 분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며칠째, 사실상 불면의 상태에 있다.

낮에는 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강변을 달리는 꿈을 꿨다. 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둔치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하는 사람들은 온통 쭉쭉빵빵의 아가씨들이었고 (욕구불만인걸까) 몇몇은 차가 다니는 차도에까지 나와서 한가롭게 누워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동생은 아가씨들에 시선을 뺏겨 앞에 여자들이 누워 있는지도 모르고 달렸다. 나는 그만 사람을 칠 것 같아서 동생에게 멈추라고 소리질렀지만, 덜컹, 덜컹 하면서 동생은 몇 명의 여자를 깔고 지나갔다. 여자들은 아팠을까. 하지만 그건 꿈이었다. 누구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오직 내게만 거대한 죄책감같은게 남았다.

나를 백퍼센트 이해해주는 편안한 여자를 만나기는, 내가 어떤 여자를 백퍼센트 이해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정말 내 옆에서 아침에 함께 일어나는 다른 이를 생각할 수가 없다. 조용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뿌연 얼음물 같은 마을…

오늘은 자도 자도 졸렵다. 벌써부터 졸려워서 이제 조금 있다가 누워 잠을 잘 것이다. 내일은 또 거짓과 유치한 자기긍정 같은 걸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조금만 나를 칭찬해도 우쭐해지는건, 저녁에 퇴근하면서 생각해보면 죽고싶을만큼 부끄럽다.

이런 나에게도 기적같은 날이 올까..

여름 밤

그건 아주 검은색이었지. 모닥불 말야. 굵은 강모래 위에 피워 놓았던 그거. 적은 내부에 있다. 불길은 아주 검게 타들어가다 졸아붙어. 무거운 눈꺼플이 감기기 시작하면 병풍같은 절벽 위로 하얀 달이 떠올랐어. 나는 노래를 불렀지, 차가운 물이 날 휘감을때… 하는 노래를. 삼십육도가 넘는 열대야 속에서도 나는 추워서 벌벌 떨었다.

머리가 복잡해.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이 불어 넘치는 것처럼, 머리 속이 꼭 그래. 한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라. 아주 추웠지. 달빛이 눈처럼 내렸어. 뽀드득뽀드득 얼음물을 건너서 호빵같은 돌들을 타넘다보면 아주 제대로 돌았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어. 누구는 화를 내고 누구는 야단을 치고 누구는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모닥불 앞에서, 내가 목마르다. 누구 나를 위해 잔에 소주를 채워줄 사람 어디 없소. 없어.

한 세번째 말하는건가 싶은데, 왜 이렇게 나는 옅어지는걸까. 외롭다거나 슬프거나 그런 감정을 말하는게 아냐. 물론 외롭고 슬프기도 하지.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편의점 가판대 위에 놓인 물건들같아. 아주 공평하게 진열된 감정들. 말하고 싶은건 그냥 옅어진다는거야. 말 그대로, 점점 더.

아무튼 난 여름 밤이 싫어.
그리고 또 이렇게 며칠전에 쓰다 만 글의 꼭지를 억지로 더 쓰려고 쥐어 짜는 것도 싫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묻다

‘그래도 요즘엔 쥴리 런던이 날 위로해준다. 괜찮다.’

원영이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까맣게 타들어가는 하얀 태양 아래 그늘을 찾아 숨어들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나는 오랜만에 나를 되찾는다. 그동안 나는 꾸준히 내 안에 현실을 꾸역꾸역 구겨 넣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가진 모든 것들을 내던졌던 모양이다. 걸어 온 자리마다 흉하게 잔존물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는 지루하게 혼자 걸어가야 하는 운명들이란거, 누군가 발로 걷어 찬 것처럼 생각이 났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가슴은 이상하게 얼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서늘했고…

일부러 사람들이 먼저 떠난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먼지가 적란운처럼 일어나는 시골길, 낡은 버스에 몸을 싣고 덜컹이며 돌아오는 길, 숲이 푸르다. 버스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착실히 경로를 되밟아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문득 쥴리 런던이 처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부른다.

blue was just the color of the sea till my lover left me…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가 두려워졌다.

오늘의 노래

Norah Jones – Carnival Town Lyrics
축제의 마을

Round ‘n round
Carousel
Has got you under it’s spell
Moving so fast…but
Going nowhere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그 마법에 빠져 본 적이 있나요?
매우 빨리 움직이긴 하지만
결국 아무 곳에도 당도하지 못하는걸

Up ‘n down
Ferris wheel
Tell me how does it feel
To be so high…
Looking down here
오르락 내리락 관람차
어떤 느낌인지 말해줘봐요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정말 까마득해요.

Is it lonely?
Lonely
Lonely
외롭지 않나요?
외로워요
아주 많이

Did the clown
Make you smile
He was only your fool for a while
Now he’s gone back home
And left you wandering there
어릿광대는 당신을 미소짓게 해
하지만 잠시뿐이죠
그가 떠나고 나면
당신은?

Is it lonely?
Lonely
Lonely
외롭지 않나요?
외로워요
아주 많이
—>

왠지 모르게 필이…
더불어 seeklyrics.com 의 부활을 축하하며.
귀찮아서 음악은 링크 안함.

어떤

갑자기 황지우를 읽었다. 사실 나는 황지우를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데, ‘흐린주점..’ 시집 발간 기념으로 사인회를 했던 수(십)년전 어느 날 교보문고에서였다. 그때 나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스승님에게 바칠 책을 골라보려고 나간 것이었고 마침 때가 그 날이었다. 뱀처럼 길게, 지렁이처럼 서 있는 사람들 뒤에서 한참을 멍하니 교보문고 천장 유리에 비친 모습들로 시간을 떼우다가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서 시집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름이 뭡니까?’, 내 이름으로 하긴 그랬고 스승님의 이름을 댔다. ‘뭐라구요?’, 다시 한 번 스승님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적은 시집을 건내주었다.

수(십)년이 지났다. 스승님은 (물론) 다 나았다. 그러나 어떤 조짐들, 이를테면 회복 불가능의 유리판에 생긴 금 같은 것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듯이 그는 다시 이륙하는 법이 없었다. 까닭없이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상처받는 일이 많더라도 힘내라, 고 오늘자 스포츠신문 79년생의 운세에 그렇게 나와 있어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황지우를 읽었다. 매우 아득한 느낌의 황지우. 시인들은 매우 엘레강스하게 망가지는 반면에, 우리는 핵연쇄반응처럼 망가졌었다. 절대 다시 재조립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원영이는 동해인가 목포인가에 가버렸다고 하고 원식이형은 미아처럼 터미널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때 밤을 새고 까칠한 살갗으로 멍하니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안토니오 뽈시오네의 기타소리같은 명멸하는 빛깔로 흰 구름이 몰려왔다 몰려갔다.

삼십도를 웃도는 열기가 휘몰아치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이십삼도에 맞춰진 에어컨 바람 아래서 피아노를 쳤다. 딸깍딸깍소리만 나는 고장난 피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