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번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동네 노점으로 떡볶이며 오뎅이며 튀김 등등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그다지 곱게 늙었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할 정도로 얼굴에 굴곡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 그런 할머니.
언젠가 한 번 10개 한정의 특제 오징어 튀김을 가까스로 한 개 먹어 본 일이 있는데, 이게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떤 오징어 튀김보다도 더 맛있었단 거다. 식어도 한참을 식었고, 게다가 할머니가 센스 완전 빵점이라 기름에 다시 데워줄 생각도 안하고 준 튀김이어서 이만큼 입이 튀어 나와 삐쭉거리다가 말을 잊게 만든 환상의 오징어 튀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노점 앞을 지날때면 유심히 오징어 튀김이 있나 없나 살펴봤는데, 영 오징어 튀김을 꺼내 놓을 생각을 안하는거다. 그래서 한 번은 작정을 하고 떡볶이 천원 어치를 사면서 물어봤다.
“할머니, 전에 오징어 튀김 맛있던데 왜 안하세요?”
“맛있죠? 그거 내가 직접 시장에서 오징어 사다가 만든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사가질 않아서 못하겠어. 그거 하면 남지도 않거든.”
신월동 인민들은 죄다 혓바닥이 돌로 변해버렸단 말인가! 그래놓고 일식당 가서 접시당 몇 만원씩 하는 튀김을 먹으면서 맛이 어떻고 저떻고를 논한다 이거지! 아무튼 그러다, 오늘 아침 훌쩍 학교 가느라 그 앞을 지나는데 오징어 튀김이 먹음직스럽게 가판 위에 놓여 있는게 아닌가… 아침 댓바람 부터 노점에서 오징어 튀김 깨작 거리기가 뭣해서 집에 오면서 꼭 먹어야지 하고, 결국은 또 다시 파랗게 식은 오징어 튀김 2천원 어치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돈이 더 있었으면 있는 만큼 사고 싶었는데 수중엔 그것밖에 없었다. 역시나 녹슬지 않은 이 맛의 풍부함, 식어도 식감이 죽지 않는 노장의 노련함… 게다가 더 행복한 건, 지금 이 시간 (10시 반) 나는 슈퍼에 가서 맥주 천씨씨를 사왔고, 저녁에 먹다 만 오징어 튀김이 두개나 남았다는 것이다.
그 외에 나는 대체로 피곤했다. 오늘은 흐린 하늘만큼 머리 속이 멍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우연히 과사에서 지석이형을 만나 커피 한 잔 할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어딜 갔고 뭘 했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었는데, 상철이랑 윤기는 약속이 있댔고 우현이는… 우현이는 그냥 집에 갔다. 거창하게 먹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오면서도 몇 명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다 안받았고, 나머지는 전화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결국엔 동생한테까지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언젠가 돈을 많이 모으게 되면 국적을 포기하는거다. 그리고 조금 큰 배를 하나 사서 태평양에 나가는거다. 태양열로 담수를 만들고, 해초랑 고기를 낚아 음식을 해먹고 글을 쓰고 시규어 로스랑 레드 제플린, 에릭 크립튼을, 바하를, 비틀즈를, 로이 부캐넌과 레너드 스키너드와 라디오 헤드와 피아졸라와, 그리고 구레츠키를, 노찾사를, 전화 카드 한 장을, 청계천 8가를 십만번쯤 되풀이해 듣는거다. 운이 좋아서 십년쯤 지나도 살아 있다면,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배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게 될 때, 비행기 사고로 라디오 헤드 전원이 사망했다거나 대한민국이 통일 되었다거나 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국가가 전복되어서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거나, 외계인이 지구에 방문해서 요즘엔 길거리에서 외계인 보는게 자연스럽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 까무러치겠지? 아마 그때쯤이면 나는 배멀미의 달인이 되어 있을꺼다.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한 뱃사람들은 육지에 오면 멀미를 한다던데,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혹시 흐르다 흐르다 보면 포우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에서처럼 남극에 흘러 들어가 온 몸이 검은 원주민들을 만나서 죽다가 살아난 다음에 간신히 포로 한 명을 잡아 작은 카누에 몸을 싣고 남극점으로, 남극점으로 더 가는거다. 커튼같은 짙은 흰 안개 속에서, 그 잔잔한 수면 아래로부터 하얀 거인이 솟아 오르면 나는 까무러치겠지?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고보니 배에 탈때 포우는 꼭 가져가야겠다. 우울과 몽상 그 양장본은 꼭 사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왔단다. (작별인사) 안녕, 그리고 또 (만났을 때 인사) 안녕.
일본에 공부하러 가있는 친구가 잠시 귀국하면서 HOPE 를 사왔다.
비록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란색은 아니고 빨간색의 호프 라이트이긴 하지만 짤막한 담배갑을 손에 쥐어보니 흐믓했다.
이 담배는 말이야 -파란색 호프의 경우- 꽤나 독한 담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촉촉한 느낌을 주는데 이게 기가막혀. 보통 담배는 까놓으면 며칠, 아니 하루만 지나도 퍼석거리고 향이 다 날아가버리는데 이건 까놓고 몇달 지난후에 피워봐도 그 풍미가 살아있거든. 아 피고싶다.
문제는 내가 1월 1일 부터 담배를 안피우고 있다는 건데…
난 왜 담배를 안피우고 있는걸까.
이봐, 오늘 술한잔 사지 않겠어?
그런데 도대체 왜 난, 오징어 튀김을 생각하면서 담배이야기를 쓰고 말았을까?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뵌 적이 있었지. 차마 그 앞에서 ‘전 선생님 노래 가운데 정동진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 왜 어쿠스틱 버전 있지요.’ 하고 말 하진 못했는데, 왜 그랬을까?
영시 십분. 내일은 아침부터 수업이 있고, 비가 오고, 기어이 정동진을 걸어 놓고 답글을 단다.
세계와 마주친 인간. 거대한 부피감과 압력에 몸서리치는 인간. 그러나 기어이 이겨내고 마는 인간. 또 내일, 나는 지구를 어깨에 이고 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