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와서 오랫만에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켠다. 정크 메일 140통을 비우고, 필터링된 스팸 6통과, 가입한 사이트들에서 날아 온 무익한 정보메일을 모두 지운 편지함으로 보내고 나면 받은 편지함엔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네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지치는 것에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더라. 더 이상은 지치는 일 없이 낮게 활강하는 도중인데, 가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덜컥 전원이 나가버려 이상하게 허탈해지는 일이 많지.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아니라고 되뇌이면서도 끝끝내 침 한 번 크게 삼키고 씨익 웃고 나면, 받은 편지함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가끔 네가 미칠것처럼 보고 싶으면 담배를 먹고 추악한 추억같은 것들, 이를테면 항상 내가 되기 싫은 것들, 을 뱉는다. 깊게, 그리고 느리게.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너는 실제하지 않는 상징같은거니까.
그래 또 이렇게 시작한다. 네가 떠난 그 다음날부터-. 지긋지긋하도록 넌 항상 떠난 그 다음날부터만 존재하지. 이런걸 믿을 수 있겠어? 넌 한번도 떠나기 전엔 존재한 적이 없어. 누구더라, 박상우인가가 쓴 어떤 소설에서 ‘환(幻)’이라는 여자처럼, 하지만 그 여잔 항상 존재하기 전에 당도해서 존재한 뒤엔 떠나지, 그렇게 엄청난 가속력으로 추진하는 사실들. 손에 쥐기만 하면 사라지는 비눗방울. 뭐 상관은 없지만 말야.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추억을 이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가봐.
좋다. 상관없다. 네가 없어도 나는 잘 날 수 있다. 아주 잘, 또 멀리, 또 깊게, 느리게.
이 편지도 거북이 등에 붙여 보낼꺼야. 잘하면 태양이 거성이 되기 전에는 네게 전해질 수 있겠다. 혹은 매 순간 멈춰있는 화살이거나.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