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들은 일찍 사라진다.

자려다가 문득 책장 구석에 먼지 쓰고 잠들어 있던 고장난 셀빅 pda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이걸 고쳐서 다시 쓸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놈하고 참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것 같다. pda로 전화를 한다는 것이 요즘에도 낯선 일인데, 02년도에 지하철에서 셀빅으로 이북을 보다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바로 그놈을 귀에다 대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신기하다기 보다는 (미친게 아닐까 걱정된 표정으로) 경악하며 나를 쳐다봤다. 한번은 궁금해서 못참겠던지 어떤 아저씨가 그건 뭐하는 기계냐고 묻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그만한 가격에 자체 os와 수많은 공개 어플리케이션, 게다가 16 gray까지 지원하여 시원한 가독성을 보이는 pda는 아직도 없다고 감히 단언할 정도였다. 계속되는 판매부진으로 망했다는게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솔직히 pda로 이동하며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pmp가 있고 심지어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mp3? 요즘 mp3 플레이어 없는 사람 (도 있겠지만) 도 있나? 가장 기본적인 text 중심의 개인 데이터 오거나이저의 역할만 제대로 해낸다면, 그게 바로 최고의 pda다. 셀빅이 그런 존재였다. (나는 그 뒤로 명품이라는 바이저 프리즘도 클리에도 wince 계열의 pda도.. 이것저것 다 써봤지만, 예전과 같은 시원한 만족감은 느낄 수 없었다.)

삼성에서 만든 것중에 유일하게 맘에 들었던 이지프로도 그렇다. 핸드헬드 피씨라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아이템 (타블렛 피씨의 효시격이라고나 할까..) 으로, 동급 최강의 화면과 화면이 돌아가서 마치 노트패드처럼 보이는 ‘스위블’ 기능까지 갖춘 궁극의 기기. 이걸로 이북보면 정말 책보는 느낌이 났다. 노트북과는 비교도 안되는 배터리 용량 (구동장치가 없으므로 배터리 효율도 노트북에 비해 극히 높다.) 으로 한번 충전해서 학교에 갖고 가면 이틀은 레포트 쓰랴 학생회 회의록 정리하랴 아무 걱정도 없었다. 게다가 노트북에 비해 크기도 월등히 작고 가벼워서 극강의 휴대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바보같은 삼성은 이 라인업을 잘 살려 주무기는 못되어도 꽤나 인정받는 제품들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단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종시켜버렸다. 예전에 프리챌에 이지동이 제일 컸는데, 거기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겨웠던 기억이 난다. 이 제품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어떤 사람은 기기 자체를 개조해서 사용할 수 없었던 마우스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던가, 삼성이 마음을 고쳐먹고 이지프로의 업그레이드 버젼을 비밀리에 개발중이라는 fake 기사를 인용한다던가 하기도 했었다. (말 나온김에 수집해둔 프리챌 이지동 글 몇개 링크.. 1 2 그리고 정말 ‘말 나온 김에’ 프리챌에 다시 들어가봤더니 이지동 아직도 살아있었다…)

모든게 좀 더 손 끝에 가까웠던 시절. 마음이 충실하게 움직였던 시절..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