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피크어와 동무 이야기

요즘 읽다가 중간에 접어 둔 스티븐 핀커의 ‘언어 본능’을 다시 보고 있다. 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 하겠지만, 정신만 좀 집중하면 수월찮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로써의 역할도 충분히 해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가벼운 기분으로 대할 수 있기도 하다.

핀커는 그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몇가지 ‘상식적’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장들에 대해 논박을 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엔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서 심지어 명망 있는 지식인들에게 까지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주장, 즉 ‘언어가 정신을 지배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한다.)’ 는 언어결정론에 대한 것도 있다.

언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주장에 따르면 한국인과 미국인은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에 의한 사고의 간격이 존재한다. 두 집단은 사용하는 모국어가 다르며, 모국어에는 그 집단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유의 개념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가 영어로는 “I have a son.” 인데, 미국인이 존재를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Have) 반면에 한국인은 존재를 자신과의 관계성 안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인의 사고는 물질적이고 실용적이며 객관적인 반면에 한국인의 그것은 정신적이고 관계지향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핀커에 의하면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거나 이렇게 주장할 만 한 뚜렷한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첫번째로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인류학적 관찰들은 허풍이거나 날조거나 도시괴담이다. 두번째로 언어결정론이 수용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어 없는 사고를 가정할 수는 없어야 하는데, 최근의 사례들이나 실험에서는 인간이 언어 없이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최근 인지심리학의 연구 결과에 따른 생각의 작동원리에 관한 이론이 인간의 사고 활동에 관한 의문들을 정치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들의 내용이나 근거는 책에 다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찾아보시길 바란다.)

핀커는 이러한 내용들을 다루는 챕터의 첫번째 장에 오웰의 ‘1984년’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뉴스피크어의 목적은 잉속(Ingsoc, 영국사회주의)신봉자들에게 적절한 세계관과 마음의 습관을 위한 표현 수단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밖의 일체의 사고 방식을 불가능 하게 만드는 것잉었다. 적어도 사고가 언어에 종속되어 있는한, 일단 그리고 영구히
뉴스피크어가 채택되어 올드 스피크어가 잊혀지게 되면 이단적 사고, 즉 잉속의 원칙에서 벗어난 사고는 말 그대로 생각 할 수 조차
없게 되리라는 것이 의도였다. 뉴스피크어의 어휘는 당원이라면 마땅히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의미를 정확하게, 때로는 아주 미묘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반면에 여타의 모든 의미들이나 간접적인 표현방식의 가능성은 배제됐다. 이는 부분적으로 새로운 단어들을 고안함으로써, 그러나 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들을 제거하고, 그렇나 단어들에서 비정통적인 의미를 벗겨내고, 그리하여 가급적 일체의 이차적인 의미를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free라는 단어는 뉴스피크어에도 여전히 남아 있으나, This dog is free from lice(이 개에는 이가 없다). 또는 This field is free from weeds(이 밭에는 잡초가 없다). 와 같은 진술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정치적·지적 자유는 개념으로조차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당연히 명명될 수도 없으므로, 이 단어는 politically free나 intellectually free라는 옛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
… 서양장기에 대해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퀸’과 루크’의 이차적 의미를 모르듯이, 뉴스피크어를 유일한 언어로 사용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equal이란 단어가 한때 politically equal이라는 이차적 의미를 가졌다거나, free라는 단어가 한때 intellectually free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수많은 범죄와 오류들이 지칭할 이름이 없고, 그래서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 일단 언어와 사고가 반드시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란 것에 주목하면서, 다음의 블로그 엔트리를 한 번 읽어보자.

http://poisontongue.sisain.co.kr/325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가 블로거 자격으로 북한에 방문하면서 있었던 일 가운데, ‘내가 본 북한의 10대 얼짱’이라는 제목으로 방문 기간 동안 만났던 안내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는 거기서 각 안내원의 사진을 올리고 그녀들의 이름 뒤에 ‘동무’를 붙인다. 엠파스 국어사전에 따르면 북한어에서 사용하는 동무는 단순히 ‘친구, 벗’을 의미하는 남한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엠파스 국어사전 [북한어] ‘동무’)

고재열 기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댓글에서의 많은 반응들이 이 ‘동무’라는 호칭을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치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많은 보수 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남한 사회의 심각한 안보 불감증을 반증하는 것이거나, 정치적 오염을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보기에 안좋다라는 의견은 재론의 가치가 없으므로 무시함.) 왜냐하면 ‘동무’는 확실히 남한 사회에서는 죽은 언어이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여전히 사용중인 언어이며, ‘동무’가 가지는 북한 사람들이 합의한 사회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댓글들이 지적하고 있는 ‘동무’가 가지는 불온성에 대한 혐의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점, 구체적으로는 ‘동무’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실로 그 단어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견고하게 관련 지을 만 한 근거가 없다는 점으로 벗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한 턱 쏴라’ 할 때의 ‘쏘다’가 총을 발사하는 행위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폭력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듯이.)

차라리 초상권이나 여성을 대상화 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아야 했었다, 댓글러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