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어깨가 또 굳어왔다. 민방위 훈련장에서는 내내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핵폭발시 행동요령을 듣고 있자니 쓴 웃음이 났다. 굵은 팔뚝에 퍼렇게 문신을 한 사내와 세 번을 마주쳤다. 한 번은 담배 피우다가, 또 한 번은 화장실 앞에서, 마지막은 훈련이 끝나서 귀가하던 도중에. 버스를 한참 기다리다가 그 곳에서는 어느 노선을 타도 집에 갈 수 없다는걸 깨닫고는 다시 한 번 쓴 웃음이 났다.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운전 내내 딸과 아들 자랑이었다. 그의 딸은 노스랜드인가 뉴질랜드인가에서 2년간 영어를 배웠고 무슨 교육 자격증을 따서 귀국 후 유치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그게 돈이 꽤 된단다. 젊은 것이 독하게 하루에 몇 탕을, 그의 표현을 빌자면, 뛰는걸 보고 세 탕만 뛰고 나머지는 과외를 하라고 호통을 쳤다는, 그게 그의 딸에 대한 염려라면 염려였다. 전문대 밖에 못나온 아들은 기특하게도 삼성 하청 회사에서 일한다는데, 3년만에 대리를 달았고 연봉이 또 얼마라는 이야기를 했다. 최근엔 매월 20만원을 더 준다는 경쟁 회사에 스카웃 제의를 받고 고민했다는데, 또 호통을 치며 옮기지 말라고 했단다. 가만 있기가 뭐해서, 잘 하셨어요 회사 자주 옮기는건 좋지 않죠, 하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다른 한쪽으로 진저리를 쳤다. 다행스럽게 그 즈음에서 내릴 곳이 되었다.
돌아오며 동사무소에 들러서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제출할 등본을 떼고 언덕을 내려가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십분 전 기억이 꿈처럼 모호했다. 실시간으로 모호함이 갱신되었다. 한쪽으로는 자기파괴가 진행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수복이 진행되는, 터미네이터의 T-1000이 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자체로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있기만 하면’ 되었다. 항상 전쟁은 나의 최전방에서만 일어났고, 중심의 뒷편에 있는 나는 관찰하기만 하면 되었다. 알아서 하라지, 알아서 세 탕을 네 탕을 뛰라지, 알아서 이직을 하고 알아서 대리를 달라지, 나는 여기서 계속 관찰할테다, 움직이지 않을테다. 하지만 이 어지러움과 구역감의 원인은 세계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음을, 나는 여전히 알고 있고 부인할 수 없다.
오래 전에 나는 가능하면 내가 믿는 이야기 대신 믿지 않는 이야기만 하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더 좋아했다. 그래서 차마 당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