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joins.com/society/200506/16/200506161518453171300038003810.html
이틀째 한겨례가 왕창 젖어서 배달되고 있다. 집이 반지하라 며칠전부터 어딘가에서 자꾸 복도 바닥에 물이 스며나오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서 당분간 신문을 계단에 던져주던지, 메일함에 넣어달랬는데 여전히 바닥에 그냥 던져 놓는다. 내일, 아니 그러니까 오늘도 그런 식이면 정말 화낼꺼다. 어쨌든.
그래, 어쨌든 그래서 중앙일보를 본다. 중앙일보는 주말마다 Weekly였나 하는, 뭐랄까 레져/라이프스타일류의 섹션판이 추가로 배달되는데, 화장실에서 힘주며 그걸 본다.
네가 얼마냐 뛰어나냐, 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이천만등 정도는 한다, 고 농담삼아 답변할지도 모르겠다. 내 수준은 그정도다. 그런 내 수준으로도 중앙일보 문화/사회면의 기사들은 정말로 수준 이하의 행태를 보인다. 중앙일보는 문화/사회면 기자 채용시에 논술고사를 보는지 안보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4대 일간지의 문화/사회면에 실리는 기사를 편집장이 읽어보지도 않는건지 정말 한심할 정도다.
예전에, 기억에 뭐였더라.. 인크리디블보이를 두고 평등주의를 재치있게 꼬집은 수작이라고 평한 기사가 있었다. (http://service.joins.com/asp/article.asp?aid=2504244) 읽어 보면 알겠지만,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거다.
“인크리디블보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거기엔 예전엔 끝발 날렸던 그러나 현재는 보험회사 직원인 슈퍼맨 가족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법이라는 수단으로 사교육을 금지시키거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이유로 몇몇 신문을 규제하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도 한다.”
일관성도 없고 왜 사람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인크리디블보이라는 애니메이션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이 기사는, 말하자면 소위 자유-실용주의적 중앙일보 노선이라는 관념이 내뱉는 불평이다. 쉽게 말하면 “아 씨발, 잘난걸 어쩌란 말야.” 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기사의 속셈이나 내용이 아니라, 기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수준인 것이다. 만약 기자가 저러한 내용을 재치있고 논리적으로 풀어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그냥 중앙일보적 신문기사가 될 뿐이다. 고민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 심지어 재미도 없는 저런 기사를 전면에 내보내는 중앙일보. 이건 명백한 사기다.
자, 제목이 텍사스전기톱살인마 니까 그 영화에 대한 얘길 해야겠다. 난 원작과 리메이크작 전부다 안봤다. 그냥 안봤다. 언젠간 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현재는 안봤다. 역시나 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다.
기사 원문을 읽어보시라.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에 새로 리메이크된 텍사스전기톱살인마란 영화는 졸라 무섭다.”
아, 젠장. 그 영화가 졸라 무섭단거는 포스터만 봐도 사람들 다 안단 말이다. 그러니까 응? 그게 어떻게 무서운건데? 응 말해봐.
“같은 호러영화라도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유별나다. 공포를 위한 공포에 주력한다. 어둡고 음산한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이 신경세포를 자극하고, 연속되는 핏빛 살인극이 모세혈관을 긴장시킨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감정에만 매달리는 신경질환인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
그러니까… 음산한 밤하늘과 연속되는 핏빛 살인극이 나오니까 무섭다는거야? 엉, 그런거야?
“전기톱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듯 화면은 섬뜩함 그 자체다. 부릉~ 부릉 굉음을 내는 전기톱 소리만 들어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때론 속이 뒤집힐 것 같다. 웬만한 강심장도 오금이 저려온다.”
뭐? 전기톱 소리도 이 영화를 무섭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구? 젠장… 그런건 엠파스나 네이버 들어가서 영화 프리뷰만 봐도 다 아는 얘기잖아. 좀 다른 얘기를 해봐! 내가 왜 돈내고 니네 신문을 보는건데? (사실 중앙일보는 엄마가 돈을 내지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2003년) 은 전설적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텍사스 살인광(1974년, 토브 후퍼 감독)을 리메이크했다. 단돈 15만 달러를 들여 무려 1억 달러를 벌어들였던 원작의 무게를 의식한 듯, 아니 더 끔찍한 장면을 빚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한 듯, 신작은 더 깊고, 더 높은 공포를 향해 줄달음을 친다. 1973년 미국 텍사스주 트래비스 카운티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33명 연쇄살인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전대미문의 이 엽기적 살육극은 지금도 미제(未濟)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랄까. 하지만 색채는 180도 다르다. 살인사건을 파고드는 수사관의 애환에 초점을 맞춘 살인의 추억과 달리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관심은 오직 하나, 관객을 무한공포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잠시 쉬어가는 유머도, 그리고 숨을 돌리는 웃음도 필요없다. 남는 건 딱딱하게 굳은 신경세포뿐이다.”
그렇구나. 너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썼구나..
솔직히 난 이 영화(원작과 리메이크작 모두)를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리뷰는 본 적이 있다. 74년 원작이 히트를 쳤던건, 그리고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컬트호러 매니아들 사이에서, 혹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높은 관심을 이끌어내는건 이 영화에 당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리뷰에서 봤다.)이다. 정말 아무런 연유도 없이 사람을 전기톱으로 무차별하게 살해하는 살인광의 모습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무차별하게 베트남 인민을 학살하는 미국 정부와 미군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도, 또 그러니까 리메이크작은 별볼일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좀 더 의식있고 책임감 있는 기자라면 “이 영화는 졸라 무섭습니다.” 류의 내용 대신에 좀 다른 얘기를 해야한다.
인민은 어떻게 사회를 보는가. 인민 스스로가 주체적 신념을 투영해 사회를 분석해 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멋진 사회가 또 어디있겠냐만은, 현실은 소수의 여론선동가에 의해 움직인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여론선동가, 음 어감이 좋지 않네 아무튼, 들은 좀 더 치밀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바른 소리를 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개인적인 톤으로 읽히는게 아니라, 그 선동가를 신뢰하는 다수의 독자들에 의해 공적인 톤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한때 만두소에 들어가는 쓰레기 무 파동이 있었다. 그때 언론은 너도나도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다. 물론 먹는걸로 장난치는 놈들은 꿀밤 백대도 모자라지만, 우리 식품 유통에 문제 많다. 특히 만두가!라는 책임감없는 언론의 발언에 의해 정작 그러한 문제와는 상관없는 건실한 기업들이 수도 없이 도산했거나 도산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어떻게 맺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