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에 가능한 모든 수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무지개엔 모든 색깔이 숨어있지. 천년도 더 된 이야기야. 어느 날 검은 현무암이 내게 전해준 이야기지.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면서.
그 현무암을 만난건 내가 오백살이 되어 기념으로 친구들이 보내 준 세계여행에서였어. 거기는 아마 스코틀랜드, 였던가 오슬로였지. 나는 유럽을 잘 몰라. 다 거기서 거기인가 싶은거지. 어쨌든 그 날은 매우 흐렸고 비나 눈이 올 것처럼 기어가는 날씨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폭음을 내는 엔진소리가 신경을 긁어대는, 삼만년된 낡은 관광버스를 타고 야트막한 사랑을 하나 넘어가던 때였는데 결국 버스는 사랑의 정점에서 엔진과열로 멈추고 말았지. 두더지 운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십분간 정차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지저세계로 수리공을 부르러 떠났고 관광객들은 투덜대며 버스에서 내려 잠시 머리를 식혔어. 나는 사랑을 헤매였다.
“관광객. 여길 좀 봐. 내 얘길 들어보겠나? 절대 기념품 같은걸 팔려는게 아냐.”
처음엔 그게 현무암이 한 말인지도 몰랐어. 너도 알다시피 현무암들은 눈에 잘 띄지 않잖아. 딱히 말을 하는 현무암인지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는 한참을 어리둥절했지.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앞으로 두 걸음, 왼쪽으로 세 걸음 걷고 보이는 나무를 왼손으로 잡은 뒤에 270도를 시계방향으로 돌아봐. 그럼 내가 보일꺼야.”
그래, 거기 그 녀석이 있었어. 꽤나 몸집이 큰 녀석이더군. 나는 무의식적으로 현무암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매끈하지? 칠천만년동안 비와 바람이 날 쓰다듬었더니 이렇게 되었어. 칠천만년이라… 어때, 너는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있어?”
“아니.”
천만년 이상의 시간을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웰즈의 ‘타임머신’을 떠올려. 물론 거기엔 80만년밖엔 안나오지만, 그 어느 소설보다 리얼하게 시간을 묘사하지. 시간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알아? 자주색 하늘과 보이지 않는 바람, 물질의 시체들이 있어. 그리고 영원동안 매직아워지.
현무암한테 웰즈의 이야길 하진 않았어. 어차피 그는 읽어보지도 못했을테니까.
“담배 가진거 좀 있나?”
“운이 좋네 너. 딱 두 대 남았는데.”
“그럼 한대씩 피우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서 현무암의 얼굴에 난 구멍 가운데 적당한 크기의 구멍에 꼽아줬지.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어.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슬쩍 버스 쪽을 쳐다보니까 두더쥐 운전사가 수리공과 함께 연신 버스 밑을 오락가락 하더라고. 금방 고쳐질 것 같지 않아서 현무암에게 그러라고 했지.
“나는 사실 강물이었다. 어두운 지하수로를 한참이나 굽이 돌다가 지상으로 스며 나왔을 때, 감격하고 말았지. 햇빛과 꽃과 바람, 때로는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발목을 휘감아 흘러가기도 했고 무거운 배를 밑으로부터 밀어 올려 수면에 띄우는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계속 하류로 밀려갔어. 밀려갔다, 고 해야 옳을꺼야. 당시에 나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그랬던건 아니었거든. 뭐랄까, 이 언덕에 가만히 앉아 일년 가운데 칠천팔백삼십일쯤 흐린 저 하늘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따금씩 홍수가 나는 것처럼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걸 볼 수 있어. 구름이 반으로 갈리면서 말이지. 그런거였어. 오월의 빛, 장마처럼 내리는 빛.”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흘끔 하늘을 올려다봤지. 잠자리가 낮게 날았어, 잠자리가.
“강물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아니? 노을이 있다. 검지만 완전히 검지는 않지. 도무지 그 빛깔이 생각나지 않아, 분명히 나는 그걸 봤는데 말야. 사람들은 정오의 태양을 찬미해, 그 강렬함, 그 아둔함을 좋아하지. 오 솔레 미오, 어쩌구 라는거야. 오 솔레 미오? 아, 언젠가 바람이 전해 준 노래야. 바람은 우체통에게서 배웠다더군.
하지만 노을은 완전한 빛깔이야.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모든 색이지. 무지개를 봤니? 무지개는 노을의 사촌쯤 되는 녀석이야. 녀석은 비가 내린 뒤에 내키면 나타나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어. 비록 내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그런게 아니겠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동경할 수 밖에 없어. 그래서 현무암이 되기로 했지.”
“왜 하필 현무암이?”
“현무암이 되면 영원히 동경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키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돼. 가끔 바람이 놀러 와 세상 일을 전해주지. 나는 그냥 응, 응, 그렇구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거야. 그 외에는 누구도 내게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아.”
“너 오늘 현무암치고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가.”
“외롭지는 않았어?”
“어떤게 외로운거니. 나는 항상 외로웠어. 하지만 그 어느때에도 행복했지.”
“그럼 이 구멍이 네 눈물이 솟는 자국이란 말야?”
“응. 마치 네 두 눈이 항상 충열되어 있는 것처럼.”
“… 나는 말야,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몸이나 마음이 몹시 허탈해져. 꼭 뭔가 엄청나게 서러운 일이 있어서 두세시간동안 온 기력을 쏟아 울고 난 다음처럼. 하지만 난 전혀 슬프지 않았는걸.”
“나는 너보다 구십오억년이나 더 살았어. 시간은 진실의 알을 품고 있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힘이 난다.”
“고맙다면, 이제 담배를 빼 주겠어? 아까부터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바람에 몹시 맵다.”
“엇, 미안해.”
하고 나는 담배를 조심스럽게 빼 주었지. 우리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봤어. 혹시나 빛이 내리지 않을까 하고. 대신 노오란 나비가 날아와 현무암 머리에 앉았다.
“현무암씨. 너는 언젠가 사라지니?”
“아니. 희미한 웃음이 될꺼야.”
“나는?”
“너는 바람이 되겠지.”
“나도 누군갈 사랑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넌 그럴 수 없어. 이미 네 안에서 모든 세계가 죽어버렸어.”
“너무 아프다…”
“미안. 하지만 내 잘못이 아냐. 모두 네 잘못이야.“
“난 바람이 되지 않을거야. 대신 현무암이 될래. 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너도 이미 네 안의 모든 세계를 죽여버렸구나!”
순간 현무암은 희미한 웃음이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