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귀뚜라미가 울지 않는 밤, 그냥 잠에서 깨어났다 할 일이 없어 컴퓨터를 켠다.
며칠 전부터 스피커가 좀 이상했는데 콘센트를 좀 만져주고 설정 패널에서 이퀄라이져를 조절했더니 마치 내 방이 작은 콘서트홀이 된 것 같다. 김원영이네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이름을 모르는 어느 여가수가 부르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듣는다.

그냥 그런 가을밤.


사당동야밤DJ의 선곡을 감상해보세요.

저장장치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해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주변장치들을 이용한다. 대개는 멍청이같이 시간이 되면 알람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멍청이라기 보다는 멍충이같이. 멍멍충이. 어쨌든 그 알람에 맞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은, 오오 상상해보세요, 엄청 근사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멋지다. 그러면 나는 상뇌와 하뇌를 구분해서 하뇌에게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시키고 상뇌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망상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 그러니까 “잘 모르는 올드팝을 듣고 있다.”라고 쓰려고 했는데 막 (인터넷 방송의) 다음곡으로 넘어가면서 얼 그린이 나왔기 때문에 “아 쫌 아는 가수의 올드팝을 듣고 있다.”라고 써야겠다. 뭐면 어떠랴.

세상에. 휴대폰으로도 인터넷 방송을 들을 수 있데. 라디오 프리 콜로라도의 디제이 게리 버크씨는 징하게 삼십분을 멘트만 하다가 두 서너곡 음악을 틀어주고 또 삼십분씩 멘트를 한다. 대부분 자기네 스테이션 자랑인데, 320kbps로 스트리밍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네 어쩌네 하는 얘기였다.

콜로라도. 미국에서 콜로라도와 오레곤, 하면 나는 불곰하고 울울창한 침엽수림하고 만년설이 듬성듬성 쌓인 삐죽한 청년기의 산맥밖에 생각 안난다. 거기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체크무늬 셔츠에 멜빵 청바지를 입고 어깨엔 아이 머리통만한 도끼를 들면서 씨익 웃어주는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왕년에 내가 이 도끼로 세콰이어를 찍어 넘기는데 말야…”

아, 그러고 보니까 정말 저런 아저씨를 알고 있다. 내가 막 제대하고 복학까지 잠깐 비어있는 6개월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도보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미국 끝에서 끝이다. 육개월. 정말 긴 시간이었어.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걷는 도보 여행은 꽤 유명한데, 왜냐하면 MWOS(MiddleWay of the States)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직통으로 샌프란시스코와 필라델피아까지 연결해준다. 상상이 안가지? 거의 2000km에 가까운 거리다. 5년마다 이 길을 도보로 횡단하는 대회가 있을 정도로 미국 내에서는 유명한 길이기도 하다.
아무튼 애초에 도보여행을 의도한건 아닌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연히 만난 도보 여행가 아더 요셉 맥타가트(Arthur J. Mctaggart)씨가 자꾸만 같이 가자고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 사람 나중에 알고보니 남미와 동남아시아를 순전히 도보로 여행한 것으로 이 쪽에선 많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야 막 제대한 예비역 군바리의 깡으로, 까짓꺼 힘들면 40km 행군만큼이나 힘들겠어, 하고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군대행군하곤 많이 달라서 꽤나 고생했다.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에서 네바다주를 거쳐 유타, 와이오밍, 네브라스카즈음을 지날때였다. 네브라스카는 지겨운 로키산맥으로부터 안녕을 고하고 끝나고 슬슬 평지가 시작되려는 곳이기 때문에 비교적 걷기가 수월했다.
네브라스카의 미주리강의 수계가 시작되는 곳인가 그랬다. 그만 맥타가트씨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르고 (전문용어가 뭐더라..) 말았다. 아직 완전히 산맥을 벗어난 것도 아니어서 다른 도보 여행자들이나 차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무척 난감했다. 아무튼 엉터리 영어로 “내가 좀 더 걸어가서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더니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10km쯤 걸었을까, 벌목창고쯤으로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줄기 근처에 있었는데, 아마도 이곳으로부터 강을 통해 원목을 배로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겁지겁 그 건물로 달려가 아무나 붙들고 사정을 어렵게 설명했다. 대충 “my friend’s leg was broken. 솰라솰라..” 하면서 손짓 발짓을 섞었더니 내 또래로 되어 보이는 무식한 것들이 계속 “what? what? speak english, sucha idiot.” 하면서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이걸 확 뒤 엎어버려? 하고 있던 차에 창고에서 예의 그 수염 덥수룩하게 난 할아버지가 무슨일인가 하고 나오는게 보였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다시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먼저 옆에서 웃고만 있던 녀석들에게 뭐라고 막 욕을 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엄청 낡은 웨건을 몰고 왔다. 뭐 그렇게 해서 맥타가트씨는 스티번씨티(steaburn city : MWOS와 76번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네브라스카의 도시 이름)의 작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응급실에서 그 할아버지와 드문드문 얘기를 나눴었다.
지금은 그 할아버지 이름도 잘 기억 안나는데, 그때 나눴던 이야기는 이상하게 또렸하다.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태권도, 휙휙(손짓 발짓). 태권도 할 줄 아니?”
“그럼요. 한국사람은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태권도를 배워요. (라고 뻥침)”
“부르스 리가 그래서 태권도를 그렇게 잘하는 거구나. (잉? -_-;;)”
“할아버지는 벌목꾼(lumberman)이세요?”
“예전엔 그랬지. 지금은 그냥 늙은이야. 작업소엔 소일거리삼아 나가는거지.”
“젊었을땐 나무 꽤나 찍어 넘겼을 것 같으신데요.”
“그땐 도끼질 한방에 나무가 하나씩 넘어갔지.(a chop, a wood)”
“하하.. (원 이 할아버지 농담도..)”
“너는 한국에서 뭘 하고 있니?”
“이제 막 제대해서(discharge from military service) 잠시 쉬고 있어요.”
“군인이었어?”
“한국 남자는 스무살만 넘으면 누구나 군인이 돼야해요.”
“희안한 나라네.”
“맞아요. ㅎㅎㅎ”

뭐 그러면서 노가리를 풀고 있으려니 응급실에서 맥타가트씨가 발을 쩔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이야기를 들으니 부러진건 아니고 조금 부었을 뿐이니까 일주일 정도는 요양을 해야한단다. 맥타가트씨는 내게 미안하다며, 원한다면 먼저 떠나도 좋다고 했는데 내가 혼자 가봐야 타국에서 얼마나 가겠냐며 당신곁에 머물겠노라고 (으웩) 했더니 그는 심하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ㅎㅎㅎ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그 할아버지댁에 머물게 되었다.
할아버지 통나무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마루 벽난로 위엔 엄청 큰 사슴 머리가 박제되어 있어서 오래 살다보니 이런것도 실물로 다 보네,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뭐 이런 얘기다.

가을 일기

가을 (이라고 해두자) 이 되니까 부쩍 모기가 많아졌다. 어째 여름보다 더 극성인 것 같다. 환한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의 절반은 손뼉치며 모기를 잡는 것으로 보낸다. 이 일에도 꽤 능숙해져서 아마 시간당 열마리 정도는 잡는듯하다.
어머니는 가을이 되자 추운 외부에서 좀 더 따뜻한 내부로 모기가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집 모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1. 각방마다 모기들의 성향이랄까 하는 것이 다 다르다. 내가 엄히 모기를 다스려서 그런지 내 방 모기가 가장 빠릿빠릿하고 화장실모기가 제일 둔하다. 아마 화장실에서 누가 열심히 모기를 잡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모기가 빠릿빠릿한지 알아보는 테스트. 손뼉쳐서 잡기 시도 횟수가 10회 이상이면 빠릿빠릿, 5회 부근이면 보통, 3회 이하면 어리버리)

2. 꼭 머리 근처에서 날아다닌다. 아무래도 다리나 등, 팔 근처라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모기들은 아마도 더 오래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놈들은 머리, 특히 귓가에서 날아다니길 좋아한다. 마치 긴장하라고 미리 신호를 주는 것처럼. (그런데 이건 꼭 우리집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럴 것 같다.)

3. 두마리 이상 함께 날아다니지 않는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요즘 모기가 사실은 굉장히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생명체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데, 모기가 나타난다. 한 열번쯤 헛손질 하다가 모기를 잡는다. 이제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면 금새 또 다른 한마리가 나타난다. 또 잡는다. 방심. 또 나타남. 이게 밤새도록 계속된다.

그냥 생각해보면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날아다니고 싶으면 날아다녀야 하는게 맞다. 그런데 마치 번지점프대에서 낙하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이놈들은 꼭 한놈씩만 나타난다. 뭐 지들끼리 정한 약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차라리 한꺼번에 나타나면 확 잡아버리고 좀 쉴 수 있을텐데.

모기 얘긴 이쯤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지난 여름 내 핸드폰 인사말은 “비오는 여름” 이었는데, 뒤에 “여름”만 “가을”로 바꿔도 될 것 같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게 싫다.

그러고보니 영어로 ‘모기’를 뜻하는 모스키토(mosquito)도 ‘모’로 시작하고 ‘모기’도 ‘모’로 시작한다. 나는 바벨탑 때문에 오만한 인간을 심판했다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나는 올 겨울을 잘 지낼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