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제는 일이 좀 일찍 끝나서 나오려다가 어떻게 저떻게 해서 비교적 가깝게 된 과장님 한분이 맥주 한 잔 하고 가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맥주를 한 참 마시다가 학교에 가서 학회 후배들을 만나 소주를 또 먹고 가까스로 집에 왔었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땐 몸이 쇳덩이처럼 무거워서 너무 힘들었다. 점심을 먹고 노곤해지려는 정신을 꼬집느라 세수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무려 석잔씩이나 마셨는데도 퇴근시간은 여전히 멀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잠이 깨어서 정신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이다.

멀리 돌아가는, 그러나 답답한 지하철보다는 훨씬 아늑한 버스를 타고 방배동 근처를 지날 즈음에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 서 있는 어느 커플 가운데, 여자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저기, 어디까지 가세요?”

짐작으로, 그녀는 매우 피곤한듯 보였고 내 목적지가 멀다고 판단되면 다른 자리 옆으로 옮기려는 것 같았다.

“봉천동까지 갑니다.” (봉천 사거리에서 다시 한 번 버스를 갈아탄다.)

남자친구가 함께 있는 여자를 동정할 여유가 내게는 없다. 그리고 나는 냉담하게 읽던 신문에 코를 묻고 마음 속에선 여러가지 핑계가 떠오른다. 저도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저는 대중교통수단에서 장애인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형평성의 문제지요. 만약 지금 당신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내게 있어서 그 동안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 되거든요. 물론 이상한 생각이지요. 그럴듯한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세계는 타인과 공유가 가능한 간섭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속에서만 살아서 자기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뱀이지요. 이것에 관해서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자리가 하나 비어서 커플은 냉큼 그 곳으로 옮겨갔다.
갑자기 맥이 풀려서 읽던 신문을 접고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꺼낸다. 꽤나 얇은 책이어서 한번 읽고 이번이 두번짼데, 여전히 프랑스인들은 난해한 문장을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그래서 그것도 몇 장 읽다 말고 가방에 집어 넣고 말았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본다. 하루가 서서히 착륙하는 저녁. 그 어느때 보다도 길게 늘어진 차량의 빨간 후미등들이 명료하게 빛난다. 다들 돌아가고 있다.
엠피쓰리가 없어도 이제는 어느 정도 견딜만하다. 언젠가 누가 한 말처럼 정말 좋아하는 음악은 듣고 있지 않아도 잘 들린다. 머리 속에 저장된 수 많은 음원들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되살린다. 매우 낡아서 가끔 원하지도 않는 구간반복이 되는 그런 음원들이다. 그래도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나는

서서히 공기에 융해되기 시작했다.

…2”에 대한 4개의 생각

  1. 라일락 향기에 숨넘어가는 밤이다.
    숙취에 시달리며 새벽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들었는데
    꽤 괜찮았어.
    Muse의 Falling away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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