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초속 5cm’

고양이의 눈을 통해 바라본, 도시에서의 여성의 삶, 그 고단함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때,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완성도를 지닌 단편이 오직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상대성 이론을 소재로 한, 서로가 필요한 때에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연인들의 이야기 ‘별의 목소리’나, 꿈과 무의식이 현실과 만나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등을 통해 그는 소수 매니아들에게서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단편 애니메이터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디렉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별의 목소리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등을 거치며 그는 서서히 일인 제작자의 모습을 벗고 팀제의 스튜디오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아님 말고. -_-;;)

아무튼 내게 꽤나 오랫동안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되었던 그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이후 신작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은 작년부터 파다했었고, 심지어는 야후 재팬이 그의 신작을 위한 사이트를 오픈하기도 했다.

http://211.222.66.227:8080/online/web/index.jsp?a=1&w=1&s=JA-JP&t=KO-KR&u=http://5cm.yahoo.co.jp

그런데 오늘 사이트에 다시 접속해보니, 드디어 ‘초속 5cm’가 3월 3일 초연을 (물론 일본에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프리뷰 동영상에서 보여지는 작화의 놀라운 퀄리티는 그가 극히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작을 진행하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 하나 하나까지 crystal clear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국내에 그의 신작이 반입(?)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간은 많고, 아직 봄은 당도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일기

오랫만에 음악을 들으며 무언갈 한다. 만화책도 읽고 귤도 까먹고… 이런저런 생각도 했다. 도중에 갑자기 얀 가바렉의 울렁울렁, 마치 성수기가 지난 수영장에 씌워놓은 덮개같은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굉장히 미안한 일일까.

시미즈 레이코의 어느 단편 만화에는 식욕을 갖도록 프로그래밍된 인조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나중에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신의 식욕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필요하지도 않은 식욕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욕을 제거한 뒤로는 좀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사실 이 만화를 처음 읽었던 것은 십수년 전이었는데, 이토록 우울한 이야기를 너무 일찍 읽었던 것 같다.

텅 빈 바람을 마음 속에 꼭꼭 눌러 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하하하.

신경과민

어느 날은 매우 과민된 상태로 깨어난다. 너무 늦게 일어났다 싶어서 서둘러 핸드폰을 열어보면 새벽 다섯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밖에선 엄마가 출근준비로 소근소근… 이를테면 중간지대가 없다. 혼몽한 수면과 명료한 정신이 프레임 하나 차이로 바뀔 뿐이다.

그럴때면 많은 사람들이 머리 속에서 말을 건다. 일상적인 대화도 있고, 일과 관련된 내용도, 그냥 듣고만 있어도 우울해지는 자기고백 (혹은 자기기만) 같은 이야기도 있다. 그런 말들은 마치 직접 뇌를 콕콕 찌르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뇌에는 고통을 느낄 만한 수용체가 없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온 몸의 통각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주체는 통각이 없다.

이럴때는 수가 없다. 가만히, 퍼렇게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며 스스로 다독이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되뇌이는 것이다.

다시는 정글로 들어가지 말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떠올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친구놈과 함께 ‘아귀레 – 신의 분노’를 보다가 사이좋게 잠들었던 기억.
밤새도록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하던 것.
만다린을 처음 마셨던 일.
뽀드득뽀드득 눈이 내린 밤의 산길을 밟아 초소근무 교대하러 간 일.
나를 향해 미소짓던 얼굴들.
인터넷에서 만난 착한, 그러나 항상 어딘가 고장나 있던 사람들..

만세!
내일도 살아남자!

just

07. 12. 01. 역시나 전에 걸어놨던 유투부 비디오 클립이 노 롱거 어베일리어블 떠서, 다른 곳의 소스로 바꿨습니다. 엑티브 엑스 컨트롤 깔아야 합니다만, 파이어폭스에서도 되는군요. 크로스 스크립팅?
—>

오 이런! 미안합니다. 거기 계신지 몰랐어요. 괜찮습니까?
네.
무슨 일입니까? 떨어지신 건가요?
아뇨, 괜찮소. 그냥 가시오.
취한 것 같은데..
취하지 않았소.
그럼 왜 길 한가운데 그렇게 누워있는 겁니까? 목이 부러질뻔 했어요! 이봐요…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와드릴께요.
제발! 건드리지 마시오!
무슨 일이래요? 떨어진건가요?
아뇨, 떨어진건 아니라고 하는군요.
어디 다친건가보죠?
아니에요, 제발 당신들 모두 날 가만히 놔둬주겠소?
어디가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아뇨. 난 미치지 않았소. 제발.. 갈 길들을 가시오.
정말 무슨 일인겁니까.. 말 좀 해보세요.
보시오, 난 말 할 수 없소… 왜냐하면 말해선 안되기 때문이오.
미친게 틀림없어요. 오 저기봐요. 경관님! 경관님!
괜찮습니까?
괜찮소. 제발 부탁인데, 내가 그냥 여기 누워있도록 해주겠소?
그렇게 할 순 없군요.
건드리지 말라니까!
제발 말 좀 해봐요! 어서!
사실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잖소.
인생은 허무하다는 건가요?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다고? 그런거에요? 그래서 그걸 표현하려고 이렇게 누워있는 겁니까?
아니오.
말해요! 젠장 말 좀 하라구!
정말 내가 여기 왜 누워있는지 알고 싶소?
그래요!
정말 알고 싶은거요? 좋소. 내 말해주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말해주겠소. 하지만… 오.. 신이여 나를 용서하소서..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을 구원하소서..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도 몰라…
말하라고!

영어로 독순술이 가능하신 분은 마지막에 누워있는 남자가 대체 뭐라고 했는지 읽으신 뒤에 코멘트로 좀 남겨주세요.

미사고의 숲 – 로버트 홀드스톡

나는 쾌활한 젊은 커플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나를 맞이한 것은 어둡고 황폐해진 옛집에서,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황폐한 삶을 살고 있는 형이었다.

올 해 블로그에 대고 하나 다짐하는 것은,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작년에도 몇 번 시도했는데, 워낙 거창한 작품 비평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매번 첫 문단을 넘어가기도 전에 힘에 부쳐 ‘나중에…’ 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2007년 첫 기록의 대상은 로버트 홀드스톡의 ‘미사고의 숲’.

아직 50페이지도 읽지 않았는데, 소슬거리는 초가을의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는) 따뜻한 예감 같은걸 느꼈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첫 챕터의 시작부터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은 조금 희안한 종류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변주곡을 들으며 한 손에 ‘미사고의 숲’을 들고 퇴근을 위해 현대백화점 지하를 지나고 있었다. 거긴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에 나아가는데 깊은 주의를 필요로 했다. 2/3쯤 지나가고 있을때, 순간 사람이 몰려 잠시 길을 멈추는 순간에 번개처럼 ‘즐겁다!’ 는 기분이 든 것이다. 아니면 한참이나 잊고 있던 기억을 운좋게 떠올린 것처럼 ‘아! 나야말로 즐거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던 (아.. 겨우 50페이지도 안읽은 주제에)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역자 본인이 SF소설 애호가이며 (기억이 맞나 모르겠는데) 현재 ‘행복한 이야기 총서’의 편집을 맡고 있는 분이어서 더욱 애착을 갖고 세심하게 번역했다는 기분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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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크리스찬은 사랑을 발견했다. 크리스찬은 사랑을 상실했다.

출근하다가 밑줄 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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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이 거의 다 갈 때쯤에야 ‘미사고의 숲’을 놓을 수 있었다. 마지막 50페이지 정도가 고비였는데, 그건 작품의 내적인 요인들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였다. 핑계라면 큐브를 돌려 맞추는데 매료되어서 책을 가방 안에서 거의 꺼낸 적이 없다는 것도 있다. 어쨌든, 간만에 있는 힘을 다 해 단 몇 미터가 남은 정상을 기어 올라가는 기분으로 마지막 50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인과율은 작품 내에서 (혹은 숲 속에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신화의, 혹은 심리의 원형, 수만년을 이어 내려온 전설들, 이야기들, 그것은 곳곳에서 재현되고 다시금 원형 속으로 융합된다.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신화적 원형들의 결과로 작품 속에서 태어났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 원형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으로써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즉, 귀네스(귀네비어 여왕) 전설은 스티븐에 의해 결말지어지는 것 (혈족만이 아웃사이더를 죽일 수 있다) 이 아니라, 스티븐으로부터 시작된다.
신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실에 기반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았다. 인류가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있어왔을 것이다. 모든 세대로부터 종의 기억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적 상상력들을 공급(Feedback)한다. 그러한 기억들이 위치하는 곳은 아마도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미사고의 숲 – 무의식’ 일 것이다.
흔히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우리는 꿈에서 상황을 원하는대로 통제할 수 없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던지.. 육식동물의 앞에서 대적하기 위해 총의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던지.. 살인자로부터 도망치려고 열심히 뛰어도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려는 어떤 행위’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은 항상 해석당하기를 거부한다. 꿈은 항상 마음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꿈은 그럴듯한 거짓들 사이에 교묘히 진실을 숨긴다.
숲이 외부인들을 유혹해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명확한 (영웅적) 사실들로부터 집단적인 무의식은 해석되기를 거부하며, 디테일을 뭉그러뜨린다. 누구도 호랑이와 곰이 마늘과 쑥만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