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자 카운팅

이런건 아니어도, 블로그에 로봇의 방문자 카운팅을 무효화하는 플러그인을 달았더니 하루 방문자 숫자가 거의 1/7, 1/8로 뚝 떨어졌다. 전에 원영이와 술먹으면서 ‘대체 설명이 불가능한 내 블로그의 방문자 카운팅 (하루에 거의 80~100명 가까운) 의 원인이 무얼까’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부동산 거품도 걷히는 세월이니, 방문자 카운팅의 거품도 걷혀야 하리라.

몰아서

1. 촛불집회 &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
연이어 두개의, 대추리와 관련된 글을 옮기고 나니까 돌멩이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딸깍 왔다. 주말 저녁 멍하니 보내지 말고 광화문에 나가보자는 얘기였다. (양심상) 갈 수 밖에 없었고 또 가려고도 했었고 평택까지야 힘들더라도 광화문에 못나가겠냐 싶은 마음에 그러겠노라고 답하곤 집을 나섰다.
정말 몇년만에 집회에 나가본 것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도 몇몇 보여서 정말 이바닥이 좁긴 좁구나 싶기도 했고…

다닥다닥 붙어 앉아 영상물을 보고 노래패 공연을 보고 연사의 절절한 사연을 듣고 하며 시간이 흘렀다. 주제넘게 얇은 반팔 티 하나만 입고 가서 저녁이 되고 바람이 심하게 불자 무척 추웠는데, ‘마음에 평화에 대한 열망이 꺼지지 않는 이상 내 체온은 언제나 36.5도!’를 연신 외우며 견뎌냈다.

그런데 사실 대추리에 대한 생각보다는, 오래간만이다 라는 마음이 더 깊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피(유인물)를 깔고 앉아 보는 것, 팔뚝질 하며 쨍가를 불러 보는 것, 힘차게 구호를 외쳐 보는 것이 마치 처음 해보는 일인양 생경했다. (아마도) 노찾사가 부른 ‘그날이 오면’도 참 오랫만이었고…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민중가요 스트리밍 서비스 Plsong.com

그렇게 집회가 끝나고 일행과 저녁 겸 술을 마시러 인근 국밥집에 들어갔다. 한참을 난상토론(?) 중이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 집회의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셔서 아마 집회가 끝나자 행사 관계자분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오신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계속 기회를 엿봤다. 꼭 인사를 드려야 해, 인사를… 그러다가 식사를 다 마치시 나가려 하시길래 기회를 노려서 성큼성큼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오늘 노래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노래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했더니 정태춘 선생님이 슬쩍 웃으시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손을 씻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 다음날 무심결에 씻어버리고 말았고…

아무튼 그렇게 끝난 주말.

2. 은행여직원
이건 지난주 중에 일어났던 일. 조금 늦게 퇴근해서 귀가하는 중에, 동네 은행 앞을 지나가 매우 얼굴이 익은 여자 하나가 바쁜듯이 걸어가는게 보였다. 내가 동네에서 그렇게 낯을 알아 볼만한 여자가 없을텐데, 아무튼 기억에 있는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겠다 싶어서 일단 아는척이라도 하려고 손을 반쯤 들었다.

그런데 반쯤 들다말고 번쩍 그 여자가 누군지 떠올랐다. 내 주거래 은행인 우리은행의 창구여직원이었던거다. 창구직원 가운데 가장 젊었고 얼굴 생김도 서글서글해서 사실은 내가 약간 좋아했었던 (-_-;;) 사람이었다.

물론 공적인 일 외에 말을 걸어본 적은 없다. 게다가 가능한 모든 은행업무는 집에서 인터넷뱅킹으로 해결하니까 은행에 갈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간혹 은행에 갈 일이 생기면, 타이밍을 잘 조절해서 그 여직원이 담당하는 창구에 가곤 했었던거다.

그래, 정말 우리는 모르는 사이다. 내가 아는척하면 이 쪽팔림을 어찌 감당하리오. 해서 반쯤 든 손을 어색하게 기지개 펴는 시늉으로 바꾸고 그 여자 옆을 지나쳤다.

그런데 정말 멋져보였다. 유니폼만 입고 있는 그녀와는 차원이 다른, 나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겠지만서도 왠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그런 느낌.

당신을 공개 수배합니다! 내 맘을 빼앗아간 당신! 우리은행 신월동지점, 이름도 모르는 그대여! (아니 사실은 외웠었는데, 까먹었다.) 이 글을 보면 제게 연락을…

그냥

이 밑에 글, 도 아니고 음악과 가사만 놓아 둔 무책임한 그 책장에 누군가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하면서 집에 왔다.
아주 간료한 안부라도 좋고,
아주 뜬금없는 불평이라도 좋고,
아주 사랑스러운 찬사라도 좋으니
뭔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많이 취했는데,
기어이 집에 왔다.
기어이 침대에 눕고,
기어이 또 꿈을 꾼다.

나도 그게 너무 너저분한 넋두리란거 알아.
젠장, 씨발.

나도 안다고.

아주 긴 식사

저녁에 J를 만났다. 이 바닥의 교류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 사람은 어떤 생김일 것이다, 하는 추측은 완전히 빗나간다. (이자벨 아자니급의 사기성 외모) 분명 나보다 연상인데, 맥주 마시면서 나는 언젠가 이런 일이 한번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꾼 꿈 같기도 했다. 언젠가 누구에게서 당신은 참 편한 사람입니다, 라는 이야길 들은 이후로 사람을 만나면 강박처럼 편하게 대해줘야 한다는게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너무 편하게 있었다. (기쁘고 즐거운 종로의 저녁!)

그리고 우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리의 비둘기처럼, 시간에 화들짝 놀라 서로의 집으로 흩어졌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게 계속 기대오는 어떤 젊은 처자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나도 살폿 잠이 들었다.

사실은 이 기쁘고 즐겁다가도 열두시가 되면 유리구두 하나 던져놓고 도망쳐야 하는 신데렐라의 운명, 그와 유사한 나른한 피로감을 그대로 이어 침대로 다이빙까지 가려고 했으나, 버스 안에서 잠깐 든 잠때문에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오늘 밤은 어째야 하나,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하늘이 두쪽나도 가야 하는 곳이 있기 때문에 일찍 자긴 자야할텐데, 고민하다가 마침 출출해진 배 때문에 마침 길 가 24시간 기사식당에 닭곰탕이 삼천원이라고 해서 나도 모르게 문을 드르륵 열고 테이블에 앉았다.

절대 소주를 함께 시키려던건 아니었는데, 손님도 하나 없는 해장국집이 24시간 연중무휴로 오픈한다는 말이 너무 서글퍼서 어쩔 수가 없었다. 파리도 날아가다 잠들만큼 지루한 식당 안에서 아저씨는 반쯤 누은 자세로 웃찾사를 본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브라운관에 어느 지점을 응시하다가 벌컥 소주 한 잔 마시고, 해장국을 뜨고.

꾸역꾸역 곡식을 채우고 나는 소주에 내 이름을 쓴다. 방년 스물 여덟, 만으로는 그보다 하나 아래. 무직에 백수에… 터져 나오는 배와 찌를듯이 솟구치는 과민증. 영화를 보면 항상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계속 조제와 헤어진 쓰네오처럼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조제가 잘 지내고 있을까? 요즘도 혼자 그렇게 생선을 구워서 먹고 있을까? 혹시 또 옆집 변태아저씨의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지내지는 않을까? 정말 쓰네오와는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까? 가 떠올라 한참을 (속으로) 울펐다.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무사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나는 눈물도 기쁘고 슬픔도 즐겁다.

교향악축제 & 선명비디오 아줌마

막내외숙모가 수원시향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언젠가 초대권이 생기면 좀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꽤나 오래전 일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갑자기 외숙모에게 연락이 왔다. 교향악축제에 초대권이 두장 있으니 친구랑 같이 오면 좋겠다고 말이다. 마침 축제의 피날레가 수원시향이었고 (사실 프로그램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지만) 간만에 외숙모도 뵐겸 해서 그러겠다고 말하곤 누구랑 같이가나 한참 고민했다. 처음엔 후배 몇 놈을 떠올렸는데 생각해보니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해서 말도 못꺼냈고 다음엔 널널한 친구들 몇에게 연락을 넣어봤으나 다들 이래저래 사정이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혼자 갔다. (<- 중요)

첫째, 안내하는 아가씨들이 댑따 예뻤다. (<- 제일 중요) 아 다음부터 이런 기회 있으면 자주 와야지 싶었고.
둘째,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이를테면, 나는 클래식 연주회는 일종의 고급예술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런 곳에 가는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교육 수준으로나 어느 수준 이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징징 짜는 애들을 데리고 온 아주머니나, 나처럼 청바지에 대충 아무거나 걸치 온 (백수로 보이는) 젊은이들이나, 심지어는 휴가중인 것으로 보이는 군복차림의 군바리 한 무리도 보였다. (연주 내내 과연 저들은 어떤 연유로 온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정장 차림의 그럴싸한 커플도 있었다.
셋째, 이 바닥에도 확실히 유명세라는게 있구나 하는걸 느꼈다. 첫번째 연주곡이었던 세자르 프랭크의 교향적 변주곡에 피아노 주자로 강충모씨가 참여했었는데, 이 사람이 꽤 유명한 모양이다. 여기저기 그에 관한 인터넷 기사를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가 나오자 일부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질러대는데 너무 웃겼다.

그렇게 첫 곡은 세자르 프랭크였고 나는 이 사람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너무 좋아하는데 (아마 몇년 동안 질리게 들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 교향곡은 왠지 모르게 지루했다. 그 다음은 부르크너 8번이었고 역시나 부르크너를 별로 안좋아해서 좀 지루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음악에 대해서 일관된 견해 같은걸 갖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곡은 재밌어야한다.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카타르시스… 뭐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다종다양하지만, 나는 어쨌든 재밌는 선율을 가지고 있는 곡이 좋다. 뒷통수를 치는 그런 선율 말이다. 부르크너때도 한참 지루해서 눈을 감고 감상하는 척 하면서 잠깐 잘까 하다가, 3악장이었나 갑자기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순간만큼은 재미있었다.

끝나서 외숙모 잠깐 뵙고 용돈 받고 (한참 이제 돈 안주셔도 된다고 하다가 요즘엔 용돈 준다 하시면 그냥 받는다. 사양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서…) 공연보러 온 사돈어르신 차를 얻어타고 집에 왔다.

아 여기서도 참 신기하고 멋진 일이 있었는데, 사돈어르신 친구분 두 분이 함께 오셨더랬다. 그분들은 지하철 타신다고 해서 어르신이 그 근처까지 차로 바래다 주고 있는데 차 안에서 그분들 나누는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참고로 다들 일흔은 넘기셨다.

“니 예전에 내가 가르쳐준 고전음악 사이트 자주 들어가나?”
“아.. 그 뭐꼬, 무.. 어쩌구 그기 말이가?”
“그래. 그기 좋은 음악 많다.”
“아 그나?”
“내 집에 받아 놓은 것도 다 그기서 받은거 아이가.”
“아 그나?”
“한 백곡 된다.”
“테이프에 아님 씨디에?”
“하드에 다운받았다.”
“그기 용량 꽤 될텐데.”
“아이다 얼마 안된다. 한 2기가바이트…”
“그럼 엠피쓰리에도 들어가겠네?”
“하모!”

일흔 넘으신 분들이다. 나도 없는 엠피쓰리를… 아무튼 그분들 대화 엿들으면서 참 재밌었다.
정말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언제든지 배우려고, 내 안에 무언가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면 영원히 청년이 된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 지하철에 관한 것이다.

“내는 지하철 타면 경로석 거기 안앉는다.”
“오.. 왜?”
“지하철도 꽁짜로 타는데 미안하게스리 우째 앉노? 그리고 요즘 젊은 아들이 우리보다 더 피곤하다 아이가.”
“맞다, 인나라 카기도 미안시럽더라.”
“이제 우리 나이 되모 자가용 타고 댕겨야제 지하철 타고 댕기면서 앉고 그럼 미안해서 몬쓴다.”

전혀 비꼬는 투가 아니었고 스스럼없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피곤하면 계속 앉아서 가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집에 다 와서 슈퍼에서 간식이나 좀 사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돌아봤더니, 중학교때부터 군 제대할때까지 대왕 단골이었던 동네 비디오가게 아줌마였다. 제대하고 난 다음에 장사가 잘 안되어서 가게 그만두었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정말 반갑더라. 잘 지내시냐고, 요즘 뭐하시냐고 묻다가 “야.. 나는 니네 무서워서 요즘엔 동네에서 술도 못먹는다.” 하는게 아닌가. “왜요?” 했더니 “코 찔찔 흘리면서 비디오 빌려가던 녀석들이 이제 길거리에서 만나면 애아빠라고 그러니.. 으으으”. 나는 그만 너무 웃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한살도 안먹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열서너살인가를 한꺼번에 먹고 말았다.

아 더 쓰기 구찬다. 오늘 일 보고 끝!

너무 좋은 시간

여섯시 십이분. 요즘엔 꽤 일찍 잠이 드는데 (보통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오늘은 뭐 한다고 아직까지 깨어 있다.

방금 일을 다 마쳤고 틀어 놓은 윈앰프에서 랜덤으로 Kings of Convenience의 Love is no big truth(베를린 공연 실황)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참 고소하다.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드는 아득한 보컬. 시퍼렇고 고요한 새벽에 비스킷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몇달만에 참 충실하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다. 달깍거리는 키보드의 느낌도 좋다.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Kings of Convenience는 제작년인가 누구의 부탁으로 찾게 된 그룹인데, 그야말로 (누구의 표현을 빌자면) 올 해의 발견 (물론 제작년) 에 해당하는 멋진 그룹이다. 그러나저러나 그 사람하고 연락을 못한지가 꽤 되었구나. 잘 지내고 있지요?

작년의 발견은 톰 맥레이였다. 애초에는 The boy with the bubblegun 으로 알게 되었는데, 더 찾아보다가 다른 곡들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음악 이야기를 하는건 정말 즐겁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할 자신이 있다.

정말 올 해의 발견은 아직 없는데, The Czars 같은 경우는 중간에 낀 어정쩡한 것이 되어서 분명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정이 가질 않는다.

정말 좋아하는 그룹이나 노래가 있다면 코멘트로 좀 소개해주지 않겠어요? 트랙백이나.. ^^
—>
의외로 KOC 얘네들 콘서트 정말 못함. 듣다가 한참을 웃겨 죽는 줄 알았음.

연둣빛


일이 있어서 선릉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책을 살 필요가 있어, 강남에서 내려 좀 걸었습니다. (강남 교보문고) 가다가 사거리에 서 있는 나무가 참 연둣빛이어서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이날은 바람이 쏟아지듯이 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죠. 삼십만년 전에는 보통 부는 바람이 이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유행은, 바다 건너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 온 사람들을 자기 집에 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만, 그때만해도 외국인은 곧 외계인이었거든요. 그러고보니 한 번은 제 집에 게오르그 미쉘이라는 유럽인이 묵은 적이 있는데… 에, 네. 뭐 그만 하죠.

오늘 면접보다가 stored procedure를 할 줄 아냐고 해서 잘 모른다고 했더니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레퍼런스를 보고 있습니다. 모르면 배워야죠. 배우는 것은 내게 결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 이상 없데

한참을 떠들다가 이게 아니다 싶었는데 크게 문제될게 없다고 해서 그럼 그렇지 했지.
그런데 의사가 파란색 알약을 주더라. 자기 전에 두알씩 먹고 자라고.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한테 줬던 약 가운데 네오는 무슨 색 약을 먹었지?

한가지 말 안한게 있어.
싫은 것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는 의사가 너무 싫었어.

아픈 계절

한때 내게도, 네게도 날개가 있었지
강철같이 따스한 파도
여명이 내린 남국의 해변
광분하는 풀씨앗
이제 봄이야, 하고 말하던 그 손.

–>

아주 긴 긴 시간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눅신한 근육이 남은 자에게 훈장처럼 수여되면
그래도 봄은 춥다는 말일게다.

–>

드문드문 퍼 올려지듯이 기절 상태에서 벗어나면 환하게 빛나는 커튼이 보였습니다. 꿈 속에서는 잊기로 했던 일들이 리와인드 되고 있었고 내가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커튼을 보고 있으면 온  몸에 열꽃이 피어났겠지요. 아직은 춥더군요, 아직은 봄인지 겨울인지 입이 바싹 마르고.
돌아오면서 나는 몇가지 이야기를 생각해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신발이 발에 혹은 발이 신발에 맞지 않게 된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깁니다. 다른건 멀쩡한 가로등을 고장나도록 수리하는 엉뚱한 가로등 수리공에 관한 이야기고…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보니 어쩐지 다 내 얘기라서, 아 나는 도무지 나를 벗어날 수 없구나 했습니다.
저녁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밥을 먹고 약을 좀 먹고 다시 누울때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감기에 걸렸나봅니다. 몸의 경계가 희미해요. 내가 나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서투르게 변했습니다. 또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허리도 아프고.

지금은 계속 아프리카 누나의 그 해먹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제 멋대로 변형한 내용이긴 하지만, 바닷물을 연료 삼아 뻘겋게 불타오르는 수평선까지 우리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겠지요. 누구도 놓치지 않게 단단히 두 손을 엮어 쥐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