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러니까

무슨 말부터 해야하나? 시간상으로 따져보면 호프집에서의 일이 먼저니 그 일부터.

일때문에 선배와 이야기하다가, 저녁 먹다가 결국 2차로 호프집엘 갔다. 맥주는 시원했지만, 역시나 옅은 지린 맛이 낫다. 아무래도 살아서 다시는 삼년전 세종문화회관 앞 노천카페에서 마셨던 그 알싸하고 짜릿하게 씁쓸한 맥주는 다시 맛보지 못할 것 같다. 선배는 많이 취해있었고 나는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
계속 무슨 말인가를 서로 주고 받았다. 대부분은 했던 얘기를 또 한 것 같다. 의외로 이런 분위기를 잘 견뎌 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세월이 쌓이는 것이 싫다. 그리고 아 씨발, 이 The One은 도저히 못피겠다. 형 담배 사올께. 하고 편의점에서 형꺼 The One하나하고 내꺼 디스를 사서 돌아왔을 무렵이다.

형의 뒷편, 그러니까 내게선 정면으로 대각선 자리에 새 일행이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며 메뉴판을 보고 이것저것을 시키고 있었다. 형은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까 내게서 정말로 정면 대각선 자리에 앉은 여자는, 분홍색 꽃무늬 원피스, 그것도 하늘거리는 그것을 입고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다 정말) 나는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나이는 좀 있어 보였어. 한 서른 다섯? 혹은 넷? 대담하게도, 아니 자신있게 그녀는 치마를 정돈하지도 않고 앉아 있었지. 사실 그래서 계속 힐끔거렸던거다. 다행스럽게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서 혼자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지만 허벅지 깊숙한 곳까지 어떤 장애물도 없이 one-shot으로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예뻤냐? 그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얼굴이었다. 평범하지만 웃을때 눈매가 가늘어지는 모습은 자신있게 보였다. 그렇다고 다리가, 소위 뭣한 말로 쭉쭉 뻣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냥 평균적인 서른 다섯살 정도의 다리였다. 햇빛을 받지 못해서 하얗게 남아 있는 그런 다리. 그런데 뭐랄까, 분홍색 원피스와 퍼머한 단발머리와 서글한 눈매와 또 그 하얀 허벅지가 교차하자, 부끄럽게도 맹렬한, 그야말로 핵폭발같은 성욕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내 성욕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여자라면 모두 성욕을 일으키는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생각해도 어이없을만큼 강력한 성욕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성욕. 그 여자랑 사귀고 싶다거나,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거나 하는 것은 티끌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은 성욕 뿐이었다. 까놓고 얘기해서 당장 그 테이블에 다가가서 저, 죄송한데요, 시간 있으시면 저하고 섹스하지 않을래요? 라고 말하고 싶은걸 두 손으로 무릎을 내리 누르며 참을 정도로. 물론 지금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형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또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외계어를 서로 주어담을때에도, 내 머리 속에는 그냥 그 여자랑 내일 약속이고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서로 서먹해지는 일이며 나갈때 아침(혹은 점심)은 먹고 헤어져야 할지, 연락처를 받아야 하는건지 아닌지 그런거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 도중 형 몰래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내 그녀는 허락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도 – 나보단 나이가 많은게 분명했으니 – 능숙하게 거절했으리라. 글쎄요. 오늘은 그다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하면서 말이다.)

두번째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시간이 꽤 지나서 우리는 호프집에서 나와 부랴부랴 지하철을 탔다. 형은 다른 방향이어서 곧 지하철에서 내렸고 나는 PDA를 꺼내 읽다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내 옆, 문 가의 작은 공간에 어느 커플이 극도로 밀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는 별볼일 없었는데, 여자는 나름대로 귀여웠다. 여자는 조금 취한 것 같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기분이 좋은 정도 같았다.
연신 여자는 남자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며 기분좋게 웃는다. 의도적인 것인지 일부러 그런건지 스치듯이 남자의 목에 키스를 하기도 하고, 기회를 노려 날렵하게 입을 맞추기도 한다. 뭐 좋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
그런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건, 여자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녀의 웃음을 묘사하려다가 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댑따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화가나기도 했다. 저 여자는 왜 내게는 그런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걸까. 왜 나는 그 남자가 될 수 없나, 바로 그 때에.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나는 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걸까. 다.

이제 행복해지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우습고, 언젠가 어느 선배가 했던 얘기처럼 행복이 생활을 통해 내게 사기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되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조적인건 더욱더 아니다.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나는 어어 그럼 하면서 요구한 무언가를 준다. 그런 모습을 또 다른 내가 팔짱끼고 바라보는거다. 그래, 이놈들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뭐랄까 이런 상황, 그러니까 내가 살아서, 아니 살아 있음으로 앞으로도 계속 살아 가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음… 뭔가 좀 다른 얘긴거 같은데 잘 설명을 못하겠다. 어쨌든 그랬다. 그 하얀 허벅지의 여자를 봤을때도 그랬고 (성욕은 얼마간 맹렬한 감정, 즉 분노나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눈치있는 귀여운 여자를 봤을때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상황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도 날 열어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울하다.

지금 내가 정말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줄 알아?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 이건 아니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지금까지의 내 생을 다 뒤 엎어서 나오는 모든 것을 더한 것보다 훨씬 더 거룩하고 숭고하게,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치명적으로 극단적이거나 모호하게 깊고 더 투명하게… 그렇게 하나가 되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그(그녀)도 내게 그렇다. 우리 둘은 말 그대로 서로에게 너무나 깊게 빠져 있어서 주위를 돌아보거나 심지어 생활에 가장 필요한 요소들까지 잊어버리고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미 영혼이 서로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어느 어두침침한, 그러나 하루 반나절 정도는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 골방에 두 손을 꼭 잡고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가능한 뜬 눈으로 밤을 보낸다. 눈물도 난다, 가끔. 왜냐하면 한참을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가면, 로돕신이 광폭하게 광분해되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 상대방을 만나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때때로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이제는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 긴 시간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발작적으로 몇 마디 내뱉는게 전부다.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다. 우리는 계속, (그때야 온전하게 우리란 말을 쓸 수 있게 되리라.)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비친 자기 모습의 눈동자에서 서로를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다. 그건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아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게 대단히 바보같은 일이란건 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그것뿐이다. 정말 바보같은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