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이미 한 번 이야기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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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글 목록: 2월 2009
where am i?
결혼한다는걸 잘 상상할 수 없는 동기가 갑자기 전화해서 결혼한다고 하고, 아는 선배가 낸 책이 오늘 인터넷 서점에 걸렸다고 하고.
나는 블로그에 들어와서 스팸 트랙백을 지우고 그 소식을 전한다.
남에게 솔직하기란 무척 쉽다. 무관심하면 되니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는 그래서 훨씬 더 어렵다. 특히 나는 내 자신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나의 모든 과거가 시시 때때로 유령처럼 되살아나서 조소한다. 별 볼 일 없는 사내라고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걸 깨닫는 순간, 나는 까무러칠만큼 지쳐버린다. 그래서 사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긍정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자가 어떻게 타인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단 한번도 진실을 말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지극히 얍삽한 인간이다. 순서를 정해본다면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자신이다. 이 비열한 토막들의 악취는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나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오랫동안 아무도 들춰보지 않아 썪은 내를 풍기는 이 두엄더미를 뒤엎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삶은 너무 길다. 아무도 날 구원해주지 못할꺼라는 불길한 상상이 나를 휘감는다.
찬 바람
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과장님이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치고 가는 통에 화들짝 깼는데, 얼마나 침을 흘리며 잤는지 입가에 흰 자국이 가득하더라. 옆자리 윤경씨는 내가 그 상태가 될때까지 혼자 킥킥대며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과장님이 지나간 다음엔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다가 결국은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말더라구. 아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낮잠 시간에 꿈을 꾸었거든. 어느 무료한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글쎄 그게 네 전화지 뭐니. ‘형, 뭐헙니까. 내 지금 화곡동인데 배고파 죽것소. 얼렁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사주소.’ 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아, 네, 네. 지금 당장 달려갑죠.’ 하고 과장님 한테는 거래처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고 뻥치고선 화곡동으로 달려가는거지. 아, 냄새가 어찌 나던지 순대국 하나 얼른 사주고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는데, 등을 미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아주 혼났다. 완전 구렁이 수준이야. 너는 엄살피우면서 ‘형, 나 등 아파. 살살 밀어.’ 하면, 또 나는 손자국 나게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다 큰 놈 자식이 이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하는거지.
꿈이고 뭐고 잘 안믿는 성격이지만서도, 간만에 네 소식 전해 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생각에 일은 손에 안잡히고 해서 몰래 휴게실 구석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우리 애 한참 못봤지?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간단다. 현경이는 벌써부터 무슨 조기 교육인가 뭔가 시킨다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내 얇은 월급봉투 보고 한숨 내쉬는 처지지만, 언제는 우리가 부유해서 행복했더냐. 함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던거지.
동훈이는 미국에 거 뭐시냐 무슨 좋은 대학교 닥터 한다고 준비하더니 그게 잘 안된 모양이고. 동훈이 처만 맨날 내게 전화해서 자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내가 언제 한 번 동훈이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야겠어. 까짓꺼 닥터야 나중에 해도 하는거고 먼저 가정을 챙겨야하는거 아니겠니. 지네 아부지가 물려준 재산이 꽤 된다지만 그것도 까먹다 보면 금방이잖아. 요즘엔 동훈이 처가 이것저것 많이 살림을 줄이는 것 같더라. 불쌍하고 고맙기도 하지. 나는 사실 동훈이 이놈보다는 동훈이 처가 더 살갑고 좋다.
참, 너 철민이형 기억나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우리 학생회실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으면 찾아와서 국밥에 소주 사주던 형. 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형 보안법으로 끌려가서 계속 재판을 받았거든. 이래저래 십년도 한참 넘으면서 질질 끌었는데, 그 재판 드디어 무혐의가 되어서 이번에 나오게 되었단다. 법대 민규가 철민이형 재판중에 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되어서, 사실은 민규가 정말 고생했지, 가망없는 그 싸움 묵묵히 혼자서 다 끌고 결국엔 이겨버렸으니까. 시퍼렇게 젊은 놈이 재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벌써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었단다. 며칠전에 민규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는게 결국 그놈 울컥하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그러더라. ‘형, 내가 왜 이 좃같은 대한민국에서 변호사질 하려고 그렇게 이 악물었는지 알아요? 철민이형이 너무 불쌍해서, 철민이형 내 손으로 변호해주고 싶어서 변호사 됐어요. 나 방세도 밥값도 없이 친구 하숙방 전전할때 철민이형이 어느 날은 오만원, 어느 날은 이만원 그렇게 쥐어주는거야. 자기도 거지같이 다니는 주제에 뭔 돈인가 싶었는데, 그게 글쎄 가끔 투쟁 없는 날에 공사판에 가서 벌어 온 돈 나한테 다 줬던거에요…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
이놈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면 그 다음날 발목이 시큰거려서 자주는 못나가지만서도, 이제 신문보다 인터넷 만화 보면서 낄낄대는게 하루 낙이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돌아올 너 기다리면서 우리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네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지?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 ‘생활투쟁’해야한다고.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이어야 한다고.
에고 과장님이 휴게실 밖에서 나한테 손가락질 하고 있어. 얼른 마저 쓰고 퇴근준비 해야겠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이 편지는 일단 내 우체통 서랍에 넣어 둘께. 돌아 오면 몽창 다 모아서 한아름 안겨줘야지.
이만 총총.
말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이 raw-data의 형태로 서로에게 전해지는 세상을 떠올려보자. 물리적인 발화는 목적를 잃고 세계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오히려 진화하여 서로는 서로에게 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고 해서, 그러나, 다툼과 증오, 질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타협해야 할 부분들이 남아있다. 완전한 의미의 전달이 곧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심지어 우리는 불완전하기까지 하다.
몇번이고 말이 가지는 무서움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참혹한 곳인지, 문만 열면 날선 말들이 도산검림을 이루는 사회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적다 보면 내 말도 똑같이 비수같이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어서 지우고, 또 쓰다가 지우고 그랬다. 완전한 소통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 두렵다.
애정과 사랑,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개인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평가하고 평가된다. 그 매개체는 말이다. 이건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내 사랑의 증거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해도, 네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매 순간 나는 평가된다. 평가되는 순간 말은 가지치기를 당하고 무한한 가능성들이 하나의 사실로 수렴된다. 평가되어 고정된 말은 발화되기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투고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토론하고 선전하고 외치고 웅변하고 호소해도,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말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의 계층 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봤다. 그것은 권력이다.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 우위자는 항상 너일 수 밖에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너는 열리지 않는 신비고, 나는 그 숲을 탐색하는 여행자이다. 너는 조용히 세계 속에 흐르며 그 대지 위에 나를 가둔다. 나의 상상은 항상 네 대지 위에서만 가능하다.
검찰은 용산 참화의 원인이 시위 주동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말의 가공할 힘이다. 그것은 비가역적이다. 우리의 상상은 이제부터 계속 그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인풋보다 더 뛰어난 아웃풋은 불가능하다. 평가되는 순간 결과는 고정된다. 바뀔 수 없다. 어디에선가 ‘희망이 모조리 사라진 순간이 바로 절망이다.’라고 적었다. 인간은 절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전복하는 힘은 가능하지 않은 꿈꾸기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모순어다. 그것은 신을 넘어선다. 신은 결코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없지만, 인간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어. 나는 불가능한 것을 꿈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네가 날 사랑하는 것을 꿈꾸는거야.
거꾸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말이다, 모든 것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해야해.
말을 멈추는 순간 존재는 의미를 잃어버려.
사랑해, 라고 말하고
아니야, 라고 말하고
모두 부숴버리자, 라고 말하고
승리, 라고 말하고
네 냄새가 그리워, 라고 말하고
안녕, 하고 말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