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초속 5cm’

고양이의 눈을 통해 바라본, 도시에서의 여성의 삶, 그 고단함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을때,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완성도를 지닌 단편이 오직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상대성 이론을 소재로 한, 서로가 필요한 때에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연인들의 이야기 ‘별의 목소리’나, 꿈과 무의식이 현실과 만나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등을 통해 그는 소수 매니아들에게서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단편 애니메이터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디렉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별의 목소리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등을 거치며 그는 서서히 일인 제작자의 모습을 벗고 팀제의 스튜디오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아님 말고. -_-;;)

아무튼 내게 꽤나 오랫동안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되었던 그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이후 신작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은 작년부터 파다했었고, 심지어는 야후 재팬이 그의 신작을 위한 사이트를 오픈하기도 했다.

http://211.222.66.227:8080/online/web/index.jsp?a=1&w=1&s=JA-JP&t=KO-KR&u=http://5cm.yahoo.co.jp

그런데 오늘 사이트에 다시 접속해보니, 드디어 ‘초속 5cm’가 3월 3일 초연을 (물론 일본에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프리뷰 동영상에서 보여지는 작화의 놀라운 퀄리티는 그가 극히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제작을 진행하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 하나 하나까지 crystal clear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국내에 그의 신작이 반입(?)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간은 많고, 아직 봄은 당도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내 곁에 있어줘.

좀 늦긴 했어도 결국 올 해가 가기 전에 이 영화를 보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말대로 몇 년 전부터 세계 영화계에는 아시아계 감독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의 제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의 다양한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쨋든, 내 곁에 있어줘, 를 보고 아시아 영화의 약진이라던지 하는 말을 주워담는 것은 좀 비참하기도 하다. 어쩐지 그런 분석적인 말들을 내 곁에 있어줘의 옆에 붙여 놓으면 내 자신이 치졸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는 아주 조용히, 천천히, 젊은 내가 차마 인정하기 힘든 어떤 거대하고 숭고한 희망에 대한 얘기를 한다. 아버지와 아들, 두 동성애 소녀, 멋진 여자를 사랑하게 된 어느 뚱뚱한 경비원의 이야기들은 점진적으로 눈과 귀를 멀고서도 타인을 위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자존과 위엄을 위해 평생을 끊임없이 노력 해 온 테레사의 삶으로 투영되기 시작한다. 김지수를 닮은 그 여배우가 자살하기 위해 건물에서 추락할 때, 경비원은 주체 할 수 없이 피어오르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대신해서 그녀를 구하고 죽는다. 죽은 부인의 환영은 늘쌍 아버지의 주위를 맴돌지만, 아버지는 단 한번도 죽은 부인의 환영에 따뜻한 시선을 주지 않다가, 아들을 대신해 테레사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처음으로 서글픈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환영에게 입맞춤한다. 아들은 경비원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한 소녀를 찾아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위로한다. 아주 작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야기다. 아주 작은 사람들이 아주 작은 사람에게 위안과 사랑을 받는다.

오랫만에 영화를 보고 울었다. 극단적으로 대사가 없는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러나 가슴이 묶이는 단단한 심정으로 보았다. 영화에 출현한 테레사의 이야기는 실화이며, 실화의 주인공이 실제 테레사의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다. 감독인 에릭 쿠의 인터뷰에 따르면, 눈이 멀고 귀가 먹은 테레사와 함께 작업하려고 생각했을때 그녀의 신체적 한계로 인해 작업이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유쾌하고 밝은 그녀의 성격과 농담으로 인해 매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여, 내 곁에 있어줘.
내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아..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 천만분의 일도, 영화를 보고 난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영원과 하루(Eternity and a Day)

설문 같은데 보면 ‘가장 좋아하는’, ‘가장 감동받은’ 하는 문두의 질문들이 있다. 이런건 매우 곤혹스럽다. 아니면 내가 ‘가장’ 이란 말에 두드러기를 일으켜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다.

제발 부탁인데, 이 글을 본다면 아래 두 곡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들어보길 바란다.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담배나 커피 정도는 함께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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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음악을 뛰어 넘고 이야기는 영상을 뛰어 넘으며 인생이 그 이야기조차 뛰어넘는 영화. 아득한 환상과 가슴 저림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눈물, 슬픔 그러나 눈부신 안개… 이런 것들이 서로 화해하는 영화.
그의 영화는 어떤 것이나 그렇다. 작년 사티형과 소운누님의 도움으로 찾았던 부산영화제가 아니었으면, 그 이후 내 삶은 지금보다 백팔만배정도는 더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쁘고 나는 눈물겹다.

흔들리는 구름

…누군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차이 밍 량은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인류 평화와 지구의 안전을 위해 고민하면 상업영화이고, 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면 예술영화입니다.” 이보다 더 적나라하고 맹렬한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고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성일의 사적 부산영화제 견문방문록, 정성일, 씨네21

나는 지금 일을 하다 말고 이 글을 쓴다. 아니 잠깐 잠깐 불안이 발치에 흔들리면 나는 다시 일을 할 것이며, 가슴이 울렁거리면 또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솔직히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다. 누구의 표현을 빌자면, 그러고보니 나는 아직 어렸다, 던가 이를테면 아직 커피의 맛을 잘 모른다 (매우 단 맛만 즐기는) 는 것이다. 나는 종종 외롭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어느 날 그 말마저도 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런 얘기다, 라고 설명해줬다.

아니 정작 극장에서는 덤덤하더니만, 지금은 왜 이리 울쩍해지는 것인지, 매우 아득해지는 일이다. 죽은건지 기절한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자 포르노 배우를 두고 씩씩거리며 힘을 쓰는 남자, 를 벽 너머에서 지켜보다가 대신 절정에 다다르는 여자, 의 입에 돌연 사정하는 남자, 의 정액을 삼키는 여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액체의 교환. 매우 가문 날에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소통해야 하고.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영화는 우습지만, 슬픈 영화는 진정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서 나 또한 슬픈 존재임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정을 과잉하게 만들거나 스스로가 처연하도록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챠이 밍 량의 저 말이 매우 맘에 든다. 그래서 언젠가 누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일 수 밖에 없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외롭다고 말 할 것이다. 오장육부에 샅샅히 남은 것들까지 모두 말하면 이것은 아직까지는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래서 한 발 더 내딛게 되겠지. 그러나 언젠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테니, 부디 그때에 우리는 정말로 외로워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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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atii
네이트 와이드 스크린의 아핏차퐁은 “정오의 신비로운 물체”네요. 왠지 이건 봤을듯.
그리고 확실히 이강생, 애정만세때는 젊었네요. 젊다못해 비린내가 날 정도로. 약간 장국영 생김의 느낌도 나고…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영화 스윙걸즈에서 그녀를 봤을때 여러 사람이 오버랩되었고 매끈하고 화려하게 생긴 생김도 아니면서 은은히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그 매력때문에, 아 이런 배우도 있구나! 좋다! 했었다.

우연히 그녀가 나오는 신작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서 나도모르게 무릎을 치고 껄껄껄 웃고 있었으며 생전 처음으로 배우때문에 영화까지 보고싶어졌다.

아직 인터넷에 돌아다니지도 않은걸 보니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미개봉인 모양.

이봐, 진짜 거북이가 빨리 헤엄쳐? 키득키득~

eye of beholder & sweet child o’ mine

eye of beholder. 주시자의 눈. 1999년 작. EBS인가 KBS인가에서 오래전에 틀어줬던 것을 지나가며 보다가, 그만 끝까지 다 보고 말았던 영화. 갑자기 생각났다. 이완 맥그리거가 나오긴 하는데, 별로 좋아하는 배우도 아니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흐리다. 오히려 에쉴리 쥬드가 나와서 너무 좋았다. 나는 이런 피곤하며 짜증나지만 너그럽고 약간의 유머를 갖고 있는 여자가 좋다. 에쉴리 쥬드를 보면 누가 가끔 생각났다. 그런데 잊어버렸다.
줄거리는 잘 기억이 안난다. 아마 무슨 일인가로 이완이 에쉴리를 계속 쫓는다. 그리고 이완의 어린 딸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 딸은 유령이거나 이완의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딸이다.
그야말로 줄기차게 쫓고 쫓다가, 마지막, 알라스카인가의 도로변, 곳곳에 쌓인 눈이 아직 녹지도 않은 벌판에서 에쉴리는 (아마도 이완의) 총에 맞아 죽는다. 마지막 에쉴리가 이완의 품에 안겨서 죽어가는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 베스트 5에 한 4위 정도는 할 정도로 Impressive했다. 애닯다거나 숭고하다거나, 혹은 아예 처참하지도 않은 그냥 비홀더로써의 죽음. 근데 왜 갑자기 이게 생각났지?

sweet child o’ mine은 내가 막 제대하고 나서 굉장히 많이 들었던 곡이다. 당시에 이 곡을 불렀던 그룹은 mr. big이나 모틀리 크루나 그랬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지금은 건즈앤로지즈의 것 밖에 찾을 수 없다. 나는 건즈앤로지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보컬의 째지는 목소리가 신경을 거스른다.
초반 기타 솔로가 crystal한 곡. 나름대로 명곡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텍사스전기톱살인마

http://news.joins.com/society/200506/16/200506161518453171300038003810.html

이틀째 한겨례가 왕창 젖어서 배달되고 있다. 집이 반지하라 며칠전부터 어딘가에서 자꾸 복도 바닥에 물이 스며나오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서 당분간 신문을 계단에 던져주던지, 메일함에 넣어달랬는데 여전히 바닥에 그냥 던져 놓는다. 내일, 아니 그러니까 오늘도 그런 식이면 정말 화낼꺼다. 어쨌든.
그래, 어쨌든 그래서 중앙일보를 본다. 중앙일보는 주말마다 Weekly였나 하는, 뭐랄까 레져/라이프스타일류의 섹션판이 추가로 배달되는데, 화장실에서 힘주며 그걸 본다.

네가 얼마냐 뛰어나냐, 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이천만등 정도는 한다, 고 농담삼아 답변할지도 모르겠다. 내 수준은 그정도다. 그런 내 수준으로도 중앙일보 문화/사회면의 기사들은 정말로 수준 이하의 행태를 보인다. 중앙일보는 문화/사회면 기자 채용시에 논술고사를 보는지 안보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4대 일간지의 문화/사회면에 실리는 기사를 편집장이 읽어보지도 않는건지 정말 한심할 정도다.

예전에, 기억에 뭐였더라.. 인크리디블보이를 두고 평등주의를 재치있게 꼬집은 수작이라고 평한 기사가 있었다. (http://service.joins.com/asp/article.asp?aid=2504244) 읽어 보면 알겠지만,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거다.

“인크리디블보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거기엔 예전엔 끝발 날렸던 그러나 현재는 보험회사 직원인 슈퍼맨 가족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법이라는 수단으로 사교육을 금지시키거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이유로 몇몇 신문을 규제하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도 한다.”

일관성도 없고 왜 사람들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인크리디블보이라는 애니메이션과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이 기사는, 말하자면 소위 자유-실용주의적 중앙일보 노선이라는 관념이 내뱉는 불평이다. 쉽게 말하면 “아 씨발, 잘난걸 어쩌란 말야.” 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기사의 속셈이나 내용이 아니라, 기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수준인 것이다. 만약 기자가 저러한 내용을 재치있고 논리적으로 풀어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그냥 중앙일보적 신문기사가 될 뿐이다. 고민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 심지어 재미도 없는 저런 기사를 전면에 내보내는 중앙일보. 이건 명백한 사기다.

자, 제목이 텍사스전기톱살인마 니까 그 영화에 대한 얘길 해야겠다. 난 원작과 리메이크작 전부다 안봤다. 그냥 안봤다. 언젠간 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현재는 안봤다. 역시나 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다.
기사 원문을 읽어보시라. 기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번에 새로 리메이크된 텍사스전기톱살인마란 영화는 졸라 무섭다.”

아, 젠장. 그 영화가 졸라 무섭단거는 포스터만 봐도 사람들 다 안단 말이다. 그러니까 응? 그게 어떻게 무서운건데? 응 말해봐.

“같은 호러영화라도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은 유별나다. 공포를 위한 공포에 주력한다. 어둡고 음산한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이 신경세포를 자극하고, 연속되는 핏빛 살인극이 모세혈관을 긴장시킨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감정에만 매달리는 신경질환인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

그러니까… 음산한 밤하늘과 연속되는 핏빛 살인극이 나오니까 무섭다는거야? 엉, 그런거야?

“전기톱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듯 화면은 섬뜩함 그 자체다. 부릉~ 부릉 굉음을 내는 전기톱 소리만 들어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때론 속이 뒤집힐 것 같다. 웬만한 강심장도 오금이 저려온다.”

뭐? 전기톱 소리도 이 영화를 무섭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구? 젠장… 그런건 엠파스나 네이버 들어가서 영화 프리뷰만 봐도 다 아는 얘기잖아. 좀 다른 얘기를 해봐! 내가 왜 돈내고 니네 신문을 보는건데? (사실 중앙일보는 엄마가 돈을 내지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2003년) 은 전설적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텍사스 살인광(1974년, 토브 후퍼 감독)을 리메이크했다. 단돈 15만 달러를 들여 무려 1억 달러를 벌어들였던 원작의 무게를 의식한 듯, 아니 더 끔찍한 장면을 빚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한 듯, 신작은 더 깊고, 더 높은 공포를 향해 줄달음을 친다. 1973년 미국 텍사스주 트래비스 카운티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33명 연쇄살인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전대미문의 이 엽기적 살육극은 지금도 미제(未濟)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컨대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랄까. 하지만 색채는 180도 다르다. 살인사건을 파고드는 수사관의 애환에 초점을 맞춘 살인의 추억과 달리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관심은 오직 하나, 관객을 무한공포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잠시 쉬어가는 유머도, 그리고 숨을 돌리는 웃음도 필요없다. 남는 건 딱딱하게 굳은 신경세포뿐이다.”

그렇구나. 너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썼구나..

솔직히 난 이 영화(원작과 리메이크작 모두)를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리뷰는 본 적이 있다. 74년 원작이 히트를 쳤던건, 그리고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컬트호러 매니아들 사이에서, 혹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높은 관심을 이끌어내는건 이 영화에 당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리뷰에서 봤다.)이다. 정말 아무런 연유도 없이 사람을 전기톱으로 무차별하게 살해하는 살인광의 모습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무차별하게 베트남 인민을 학살하는 미국 정부와 미군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도, 또 그러니까 리메이크작은 별볼일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좀 더 의식있고 책임감 있는 기자라면 “이 영화는 졸라 무섭습니다.” 류의 내용 대신에 좀 다른 얘기를 해야한다.

인민은 어떻게 사회를 보는가. 인민 스스로가 주체적 신념을 투영해 사회를 분석해 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멋진 사회가 또 어디있겠냐만은, 현실은 소수의 여론선동가에 의해 움직인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여론선동가, 음 어감이 좋지 않네 아무튼, 들은 좀 더 치밀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바른 소리를 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개인적인 톤으로 읽히는게 아니라, 그 선동가를 신뢰하는 다수의 독자들에 의해 공적인 톤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한때 만두소에 들어가는 쓰레기 무 파동이 있었다. 그때 언론은 너도나도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다. 물론 먹는걸로 장난치는 놈들은 꿀밤 백대도 모자라지만, 우리 식품 유통에 문제 많다. 특히 만두가!라는 책임감없는 언론의 발언에 의해 정작 그러한 문제와는 상관없는 건실한 기업들이 수도 없이 도산했거나 도산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어떻게 맺어야 하나.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sideway

술을 조금만 먹었더니 잠이 잘 안와서, 만다린을 또 뜯고 땅콩 안주에 머그컵에다 담뿍 붓고 sideway를 본다.
마일즈에게 여러명이 투사되었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마지막은 내 얘기인 것 같았다. 이야기가 많았던, 61년산 셰빌 블랑크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함께 몰래 마시는 장면은 임팩트가 너무 적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마야에게 온 음성 메시지가 내겐 더 간절했다.

“정말 이 모든 일을 겪은거에요? 진짜 힘들었겠네요…”

물론 진짜 힘들었지. 어쩐지 그 말이 내겐 위로가 된다.
조금만 더 살자.

안돼 졸리야!!

기사 원문

 안젤리나 졸리를 알게 된건 꽤 오래 되었다. 95년도 hackers란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이 영화에 열광했었냐면, 당시 그 영화 홈페이지에서 이벤트를 했는데 거기에 다 응모 했었을 정도였다. (인터넷 사용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총 당첨 인원이 30명인가 그랬는데, 응모인원은 고작해야 100명 정도였다.) 물론 당첨되어서 hackers OST 씨디도 받고 열쇠고리도 받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찾아보니 그 OST가 아직도 있다.)

 hackers OST를 듣고 있다. 요게 아마도 트렌스.. 인가 어쩌구 하는 장르인데, 반복적인 전자음이 주된 멜로디다. 이런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만에 들어보니까 꽤나 흥미롭다. 옛날 생각도 나고.
 그때, 아마도 기억에 이 안젤리나 졸리가 크게 될꺼라는 느낌이 왔었다. 그래서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그녀에 관한 자료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의 아버지 또한 유명한 영화배우, 존 보이트다.
 뭐 솔직히 졸리가 누구랑 결혼하던 나하곤 상관없다. 그런다고 졸리를 좋아하는 내 연정은 식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스크린에서 그녀를 볼 수 없다는건 좀 실망스럽다. 물론 이게 하나의 커다란 (조작된) 해프닝 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지 이런 소식을 듣는다는건 날 낙담하게 한다. 툼 레이더고 어쩌고에서 많이 망가져도 좋다. 나는 배우가 영화에 크게 영향을 주는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만은 예외로 두고 싶다. 졸리는 모든 영화를 졸리化 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마력은 그다지 보기 싫어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아무튼.. 아.. 졸리야..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