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저기 그거… 그러니까… 제가 맨날 피우던게 뭐죠?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께 담배를 피우겠다는 선언을 하고 흡연을 시작했다. 중고등학생때 잘나가는 아이들이 말보로 피우던 모습을 가끔 목격하기도 했지만, 초심자의 마음으로 내가 처음 선택했던 담배는 88이었다. 그러다 곧 88 골드로 기종(?)을 바꿨고, 가끔 도라지 필터를 끊고 피우는 등의 빠른 진도를 보이기도 했다.

내 군시절은 소위 군팔이 군디스로 바뀌는 시기였고 덕분에 군팔과 군디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군디스를 보급받던 시절에 휴가를 나가면 선배들이 부럽다는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선배들은 모두 양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속으로 막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제대 후에는 줄곧 디스를 피웠다. 88을 구할 수 없던 것도 아니지만, 군대에서 1년간 디스를 피우고 나니까 다시 88로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말보로나 던힐, 마일드 세븐을 피우던 여자 동기들은 여전히 말보로나 던힐, 마일드 세븐을 피우고 있었다. 애국자도 아니었으면서 양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이유는 일단 가격 차이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1학년때의 어떤 일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학생회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학내의 어떤 행사에… 아니다 그 얘긴 안하는게 좋겠다. 어쨌든 트라우마가 좀 있어서 양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던거다.

친구들이 모두 제대를 하고 난 다음부터, 세련된 국산 담배들이 출시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기억나는건 시나브로 (친구들은 시나브로를 디스를 똥구멍에 넣었다 뺀 담배라고 불렀다.), 레종, 타임, 더 원… 아이들은 점점 디스를 버리고 레종으로 타임으로 옮겨갔다. 나는 여전히 디스를 피웠다. 줄곧 디스를 버린 녀석들에게 나는 반쯤 농담으로 부르주아 새끼들이라고 불렀는데, 하루는 친구 하나가 디스랑 자기가 피우는 레종인가랑 백원 차이밖에 안나는데 어째서 부르주아냐고 항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디스 플러스가 나오고 난 자연스럽게 디스 플러스로 이적. 아마 가장 오랜 시간동안 피웠던 담배가 디스 플러스였을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다니던 회사 회식때 담배가 떨어져서 어쩔까 하는 와중, 경리 아가씨가 피우던 담배가 있길래 하나만 달라고 해서 피웠던게 팔리아멘트였다. 그런데 이게 꽤 괜찮았다. 아… 양담배를 이래서 피우는구나 싶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당장 팔리아멘트로 담배를 바꿨다. 그렇게 또 그걸 한 1년 피웠다.

최근에 피우는 담배는 던힐 밸런스다. 내가 이걸 피우게 된건 두어달 되지 않는데, 자주 가는 술집에서 담배가 떨어져 아는 사람 담배를 하나 빌려 피운다는게 던힐 밸런스였던 것이다. 맛은 뭐 그냥 무난했다. 팔리아멘트나 던힐 밸런스나. 그런데 내가 담배를 또 바꾸게 된 이유는 던힐 밸런스는 종이 덮개 안에 비닐 덮개가 하나 더 있어서 담배가루가 새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던힐 밸런스를 피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냐면, 내가 던힐 밸런스에 대해서 뭔가 심리적으로 밀어내려는 경향이 있는지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어가면 갑자기 던힐 밸런스 이름이 생각 안나는거다. 던힐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밸런슨가 뭔가가 생각이 잘 안난다. 몇 번은 무의식적으로 팔리아멘트를 달라고 했다가 바꾸기도 했다.

오늘도 퇴근 후에 집 근처 가게에 들어갔다가 한 십초를 ‘어… 음… 아줌마 담배… 음… 뭐였지? 아줌마 저 뭐 피우죠?’ 했던거다. 허허.

뭐 그렇게 삽니다.

ain’t no sunshine

10년 전에 그녀는 이혼했다.
6년 전에는 다시 한 번 더 술을 마시면 다음에는 자기가 아니라 장의사를 만나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핀잔을 들었으며,
2년 전에는 목소리가 갑자기 나오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9개월 전부터는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 때문에 하이힐은 커녕 십 분 이상 서 있기도 힘들었다.
19일 전에는 삼개월이나 밀린 방세 때문에 드디어 집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클럽 주인인 조니의  배려로 가게가 문을 닫고 나면 간신히 분장실 한 쪽 간이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다.
그래도 웃으며 무대에 선다. 웃으며, 나는 웃음을 판다.


Joan Osborne – “Ain’t No Sunshine” – Live at The Roxy

(* 위 내용은 실제 Joan Osborne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삼각형 모양의 하루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어깨가 또 굳어왔다. 민방위 훈련장에서는 내내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핵폭발시 행동요령을 듣고 있자니 쓴 웃음이 났다. 굵은 팔뚝에 퍼렇게 문신을 한 사내와 세 번을 마주쳤다. 한 번은 담배 피우다가, 또 한 번은 화장실 앞에서, 마지막은 훈련이 끝나서 귀가하던 도중에. 버스를 한참 기다리다가 그 곳에서는 어느 노선을 타도 집에 갈 수 없다는걸 깨닫고는 다시 한 번 쓴 웃음이 났다.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운전 내내 딸과 아들 자랑이었다. 그의 딸은 노스랜드인가 뉴질랜드인가에서 2년간 영어를 배웠고 무슨 교육 자격증을 따서 귀국 후 유치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그게 돈이 꽤 된단다. 젊은 것이 독하게 하루에 몇 탕을, 그의 표현을 빌자면, 뛰는걸 보고 세 탕만 뛰고 나머지는 과외를 하라고 호통을 쳤다는, 그게 그의 딸에 대한 염려라면 염려였다. 전문대 밖에 못나온 아들은 기특하게도 삼성 하청 회사에서 일한다는데, 3년만에 대리를 달았고 연봉이 또 얼마라는 이야기를 했다. 최근엔 매월 20만원을 더 준다는 경쟁 회사에 스카웃 제의를 받고 고민했다는데, 또 호통을 치며 옮기지 말라고 했단다. 가만 있기가 뭐해서, 잘 하셨어요 회사 자주 옮기는건 좋지 않죠, 하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다른 한쪽으로 진저리를 쳤다. 다행스럽게 그 즈음에서 내릴 곳이 되었다.

돌아오며 동사무소에 들러서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제출할 등본을 떼고 언덕을 내려가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십분 전 기억이 꿈처럼 모호했다. 실시간으로 모호함이 갱신되었다. 한쪽으로는 자기파괴가 진행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수복이 진행되는, 터미네이터의 T-1000이 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자체로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있기만 하면’ 되었다. 항상 전쟁은 나의 최전방에서만 일어났고, 중심의 뒷편에 있는 나는 관찰하기만 하면 되었다. 알아서 하라지, 알아서 세 탕을 네 탕을 뛰라지, 알아서 이직을 하고 알아서 대리를 달라지, 나는 여기서 계속 관찰할테다, 움직이지 않을테다. 하지만 이 어지러움과 구역감의 원인은 세계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음을, 나는 여전히 알고 있고 부인할 수 없다.

오래 전에 나는 가능하면 내가 믿는 이야기 대신 믿지 않는 이야기만 하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더 좋아했다. 그래서 차마 당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네가 제공하는 것, 내게 필요한 것

민방위 훈련의 훈련 일정을 묻기 위해 동사무소에 전화를 건다. 처음에 전화를 받은 직원은 담당이 아닌듯,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담당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돌려주었다.

“이번 민방위 훈련 일정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제가 이번주에 훈련 참가를 못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죠?”

“이번에 못받으면 다음에 받으면 되요.”

나이 지긋한 목소리의 남성이 불친절하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전화드렸잖아요.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일정이… 5월 15일 16일에 있고… 17일이랑 18일에…”

“이번주에 사정이 있어서 훈련을 못받는다구요. 다음주는 어떻게 됩니까?”

“다음 일정은, 그러니까 31일, 27일… 에, 또…”

“아무튼 다음주에도 훈련이 있는거죠?”

“네.”

“다음주 무슨 요일…”

“(딸깍)”

“…”

나는 친절함을 원하진 않는다. 사랑도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답해주기를 바란다. 17일에 훈련 일정을 묻는 사람에게 15일날 훈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원하는게 다음주 훈련 일정이면 다음주에 훈련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슨 요일에 몇시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된다. 31일, 27일은 또 뭐야. 대체 저 fully-꼰대풀한 답변은 뭐냐고.

그냥 그런 얘기

아르바이트 몇 개를 했거나 하고 있는데, 내가 처음부터 작업을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변형하거나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코드도 육개월이 지나면 보기 싫어지고 뭔가 자꾸 리팩토링 하고 싶어지거나, 싹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싶어지는게 이 바닥의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남이 여러해 전에 날림으로 만든 것이야 오죽할까. 끔찍한 비유지만, 마치 태어나자마자 개천에 버려진 기형의 아기가 끈질긴 목숨으로 살아나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장담하건데, 이 코드를 만든 사람도 자기가 뭘 만들고 있는지 모르는게 분명했다. 의미없이 이 파일이 저 파일을 인클루드하고, 그런게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물론, 그래 물론, 나도 이런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마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딱히 뭔가 짚고 싶은건 없다. 말 나와 봐야 똑같다. 그 얘기가 그 얘기. 뭐 좀 더 잘하자, 정도? 책임을 지자? 우습다. 누가 책임을 져. 그거 만든 개발자만의 책임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납기일만 되뇌이며 쪼는 PM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것만 가지고 이런거 가능하죠? 쉽죠? 운운하는 클라이언트 문제도, 이쯤 되면 나오는 대한민국은 원래, 하는 것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코드들은 수도 없이 많고,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다. 그래, 그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럭저럭 돌아간다는 것. 소스코드는 원래 겉으로 드러나는 생산물이 아니다. 사용자(user)는 인터페이스만 본다. 심지어 게시글을 GD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이미지로 구워서 보여줘도, 이쁘게만 보이면 그만이다. 그냥 보이면 된다.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해도 오케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우리 세계는 조금씩 불안과 우연을 얼기설기 이은 지푸라기 위에서, 더 위로, 더 위태로운 그 위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이번에 농협 시스템 장애도 걸고 넘어가보자. 전산시스템을 아웃소싱 했다고 하는데, 그게 그쪽 생리인지는 몰라도 금융권 시스템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이 금융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건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그건 그냥 커뮤니티 사이트가 아니라 하루에도 수백억씩 오고가는 시스템이다. 이 바닥에선 이런 시스템을 미션 크리티컬(mission critical)한 서비스라고 부른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한두사람 잘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미. 아웃소싱해도 처음엔 시스템이 잘 도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사람들 인터넷 뱅킹 하는데 문제 없고 이것저것 서비스 하는데 문제가 없으면 오케이. 그냥 그러고 넘어간 것이다. 아무도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왜 이렇게 돌아가고 뭐가 어디에 붙어 있으며 그건 무슨 기능을 담당하고 어쩔씨구리 저쩔씨구리 그런건 신경 안쓴거다. 그리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된거 아닌가?’ 했겠지. 차는 굴러가면 되고 집은 비바람을 피하면 되고 밥은 먹어서 배부르면 되고… 이런 양적 만족감에만 하악하악하고 있었다는건, 누구의 말대로 이 시스템들이 얼마나 우연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3차 테이프 백업본 있어서 그걸로 복구하면 된다고 하는데 나 진지하게 묻고 싶다. 혹시 백업 플랜을 짜면서 그냥 데이터만 디립따 아카이빙하고 있었는건 아닌지. 가끔가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백업 제대로 되고 있는지 테스트 서버에다 리스토어해서 한 번 돌려볼까?’ 하고 말해 본 적은 있는지, 그냥 궁금하다. 그냥 아카이빙만 풀어 놓으면 예전처럼 시스템 제대로 돌아갈꺼라고 믿는 그런 순진한 사람들인가, 싶다. 뭐? 열시간이면 된다고? 야 이놈들아, 내가 쪼끄만 사이트 데이터 이전하고 셋팅하고 문제되는 부분 잡고 하는 시간만 해도 그정도다. 이놈들아.

뭐 됐고. 혹시나 내 대출정보도 함께 날아가는 아쌀한 이벤트가 있을까 싶어 들어가봤더니, 그건 여전하데. 허허. 뭐 됐어. 잘 돌아가면 된거지. 안그래?

만날까요, 인터넷 실명제 컨퍼런스에서?

수령님께서 다급하게 댓글알바까지 하시는터라…
일단 저는 금, 토 일정으로 워크샾을 떠나는지라 토요일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장도 떠난 이 블로그 여전히 (혹시라도!)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실까 싶어 홍보 웹툰 및 일정 올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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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웹툰은
무한 펌질 환영입니다.

이번 달 15일(토) 오후 2시 연세대에서
‘인터넷 주인찾기’라는 모임으로 오랜 인연을 맺어 온 블로거들과 ‘인터넷 실명제 컨퍼런스’ 를 열게 되었습니다.
실명제는 매우 크리티컬한 이슈입니다.
 
해외 언론에서 미네르바 사태에 대해 대단히
우려스러운 시각
으로 바라보기도 했죠.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몇몇 블로거들이 뭉쳤습니다. 일체의 후원 없는 비상업적 컨퍼런스이지만, 내용은 그 어느 컨퍼런스보다도 알차다는
도 약속드립니다.
아싸리 기념으로 정모 한 판 때리고자 합니다.
나름 구독자도 2500 가까이 되는데, 그간 온라인에서만 툴툴댄 것도 아쉽고 보고 싶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말 나온
김에 술 한 잔 하시죠. 참여 조건 전혀 없고 그냥 이승환이라는 놈이 어떤 인간 말종인지 구경하고 싶은 분들은 누구나 참석
가능합니다. 무한 댓글 및 연락처 부탁
립니다. 안 줘도 제가 사회 보니까
관찰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참가신청은 트윗밋에서 할 수 있으며 신청
안 하고 그냥 오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왕이
면 참가 신청하는 쪽
을 권합니다.
ps. ‘인터넷 주인찾기’ 공식 홈페이지는 http://ournet.kr 입니다. 웹은 권력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간이라는 뜻을 담은 도메인
입니다. 비단 실명제뿐 아니라 사이버 모욕죄,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등 많은
문제가 웹에 존재합니다. 이제 점점 자유로운 우리의 공간에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웹을 지켜나가기 위해 ‘인터넷 주인찾기’는 1회성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인터넷과 관련된 문제제기를 꾸준히 할 생각
입니다.
결론 : 경품도 놀라울만큼 빠방하니 무조건 오십시오!!!

어느 룸펜의 서울나기

~나기, 에는 일정 기간을 보낸다는 의미가 있다. 좀 더 사부작거려 보자면, 이것은 영원히 정착한다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거나, 현재 거하는 곳에 정착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내가 처음 어느 룸펜의 서울나기가 썩 괜찮은 타이틀이라고 여겼을 때, 나는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사는 것을 길에 비유한다. 다들 먼 길을 떠났다가 언젠간 다시 안온한 가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제 소유의 어떤 것으로 되돌아 올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길의 의미는, 단지 우리가 거기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안정된 거처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 길에 한 번 나선 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길의 역설을 수용한다. 어딘가에 닿기 위한 과정으로써의 길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우리는 계속 떠나고, 계속 돌아 올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다시, 어느 룸펜의 서울나기. 내 서울나기가 끝나는 날, 나는 또 다른 나기를 고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또, 그리고 그 끝에서 또.

근황

최근에는 트위터를 주로 합니다. 마음이 굶주리지 않으면 생활이 절실하지 않은 법인가봐요. 백사십자만 써도 되는 트위터는, 그래서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마시듯이 너무 쉽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블로그에 접속해서 ‘안방’을 누르고 이메일과 비밀번호를 입력한 다음 글쓰기를 클릭하지요. 그 다음부터 머리 속은 화이트아웃이 되요. 쓸 것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치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스트레인지 어트랙터. 유한한 삶 속에서 완전히 같은 사건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나 멀리서 보면 각각의 사건이 겹쳐서 하나의 트랙 안으로 포함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트랙 위와 트랙 밖. 하나님은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꺼에요. 적어도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란 인간은 인정하지 않을껍니다. 다시 가난해지고 싶어요. 바싹 마르고 싶어요. 절실해지고 싶어요. 어떤 사람에겐 절망이 내게는 희망이라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