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러니까

무슨 말부터 해야하나? 시간상으로 따져보면 호프집에서의 일이 먼저니 그 일부터.

일때문에 선배와 이야기하다가, 저녁 먹다가 결국 2차로 호프집엘 갔다. 맥주는 시원했지만, 역시나 옅은 지린 맛이 낫다. 아무래도 살아서 다시는 삼년전 세종문화회관 앞 노천카페에서 마셨던 그 알싸하고 짜릿하게 씁쓸한 맥주는 다시 맛보지 못할 것 같다. 선배는 많이 취해있었고 나는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
계속 무슨 말인가를 서로 주고 받았다. 대부분은 했던 얘기를 또 한 것 같다. 의외로 이런 분위기를 잘 견뎌 낸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세월이 쌓이는 것이 싫다. 그리고 아 씨발, 이 The One은 도저히 못피겠다. 형 담배 사올께. 하고 편의점에서 형꺼 The One하나하고 내꺼 디스를 사서 돌아왔을 무렵이다.

형의 뒷편, 그러니까 내게선 정면으로 대각선 자리에 새 일행이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며 메뉴판을 보고 이것저것을 시키고 있었다. 형은 잠시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까 내게서 정말로 정면 대각선 자리에 앉은 여자는, 분홍색 꽃무늬 원피스, 그것도 하늘거리는 그것을 입고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다 정말) 나는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나이는 좀 있어 보였어. 한 서른 다섯? 혹은 넷? 대담하게도, 아니 자신있게 그녀는 치마를 정돈하지도 않고 앉아 있었지. 사실 그래서 계속 힐끔거렸던거다. 다행스럽게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서 혼자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지만 허벅지 깊숙한 곳까지 어떤 장애물도 없이 one-shot으로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예뻤냐? 그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얼굴이었다. 평범하지만 웃을때 눈매가 가늘어지는 모습은 자신있게 보였다. 그렇다고 다리가, 소위 뭣한 말로 쭉쭉 뻣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냥 평균적인 서른 다섯살 정도의 다리였다. 햇빛을 받지 못해서 하얗게 남아 있는 그런 다리. 그런데 뭐랄까, 분홍색 원피스와 퍼머한 단발머리와 서글한 눈매와 또 그 하얀 허벅지가 교차하자, 부끄럽게도 맹렬한, 그야말로 핵폭발같은 성욕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내 성욕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여자라면 모두 성욕을 일으키는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생각해도 어이없을만큼 강력한 성욕이었다. 그야말로 순수한 성욕. 그 여자랑 사귀고 싶다거나,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거나 하는 것은 티끌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은 성욕 뿐이었다. 까놓고 얘기해서 당장 그 테이블에 다가가서 저, 죄송한데요, 시간 있으시면 저하고 섹스하지 않을래요? 라고 말하고 싶은걸 두 손으로 무릎을 내리 누르며 참을 정도로. 물론 지금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아마도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가 지루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형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고 또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외계어를 서로 주어담을때에도, 내 머리 속에는 그냥 그 여자랑 내일 약속이고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서로 서먹해지는 일이며 나갈때 아침(혹은 점심)은 먹고 헤어져야 할지, 연락처를 받아야 하는건지 아닌지 그런거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 도중 형 몰래 계속 그녀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내내 그녀는 허락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마도 – 나보단 나이가 많은게 분명했으니 – 능숙하게 거절했으리라. 글쎄요. 오늘은 그다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하면서 말이다.)

두번째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시간이 꽤 지나서 우리는 호프집에서 나와 부랴부랴 지하철을 탔다. 형은 다른 방향이어서 곧 지하철에서 내렸고 나는 PDA를 꺼내 읽다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내 옆, 문 가의 작은 공간에 어느 커플이 극도로 밀착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는 별볼일 없었는데, 여자는 나름대로 귀여웠다. 여자는 조금 취한 것 같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기분이 좋은 정도 같았다.
연신 여자는 남자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며 기분좋게 웃는다. 의도적인 것인지 일부러 그런건지 스치듯이 남자의 목에 키스를 하기도 하고, 기회를 노려 날렵하게 입을 맞추기도 한다. 뭐 좋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
그런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건, 여자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녀의 웃음을 묘사하려다가 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댑따 행복해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화가나기도 했다. 저 여자는 왜 내게는 그런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걸까. 왜 나는 그 남자가 될 수 없나, 바로 그 때에.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나는 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걸까. 다.

이제 행복해지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우습고, 언젠가 어느 선배가 했던 얘기처럼 행복이 생활을 통해 내게 사기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되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조적인건 더욱더 아니다.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나는 어어 그럼 하면서 요구한 무언가를 준다. 그런 모습을 또 다른 내가 팔짱끼고 바라보는거다. 그래, 이놈들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뭐랄까 이런 상황, 그러니까 내가 살아서, 아니 살아 있음으로 앞으로도 계속 살아 가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음… 뭔가 좀 다른 얘긴거 같은데 잘 설명을 못하겠다. 어쨌든 그랬다. 그 하얀 허벅지의 여자를 봤을때도 그랬고 (성욕은 얼마간 맹렬한 감정, 즉 분노나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눈치있는 귀여운 여자를 봤을때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상황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도 날 열어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울하다.

지금 내가 정말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줄 알아?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 이건 아니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지금까지의 내 생을 다 뒤 엎어서 나오는 모든 것을 더한 것보다 훨씬 더 거룩하고 숭고하게,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치명적으로 극단적이거나 모호하게 깊고 더 투명하게… 그렇게 하나가 되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그(그녀)도 내게 그렇다. 우리 둘은 말 그대로 서로에게 너무나 깊게 빠져 있어서 주위를 돌아보거나 심지어 생활에 가장 필요한 요소들까지 잊어버리고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미 영혼이 서로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어느 어두침침한, 그러나 하루 반나절 정도는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 골방에 두 손을 꼭 잡고 서로만 바라보고 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가능한 뜬 눈으로 밤을 보낸다. 눈물도 난다, 가끔. 왜냐하면 한참을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가면, 로돕신이 광폭하게 광분해되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 상대방을 만나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때때로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이제는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 긴 시간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발작적으로 몇 마디 내뱉는게 전부다.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다. 우리는 계속, (그때야 온전하게 우리란 말을 쓸 수 있게 되리라.)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비친 자기 모습의 눈동자에서 서로를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다. 그건 의미가 없다. 말 그대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아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게 대단히 바보같은 일이란건 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그것뿐이다. 정말 바보같은 일이지만.

minor blue – david darling

그는, 깨닫게 될 것이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의미불명의 세계에, 서, 어두운 아침을, 맞았었다는, 실, 을사.
이를테면 그, 세계는 이랬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오직, 있다면 그, 角言만이 매일을 고통, 고통은 따갑다 대개가, 스럽게 일깨웠, 다는 것. 무엇을? 내 뒤에 나를. 혹은 그 뒤에 나거나, 내가 아니었거나, 언젠간 내가 될지도 모르지만, 경이로운 가능성, 의 세계, 세계는 지극히 복잡한 dynamic system을 생성하는 하나의 지극히 단순한 원리, 에서 종종 나였던 것들을.
그 세계의 주산품은 옅은 광택이 흉흉한, 묵빛 물방울, 인데 사람은, 그것을 건, 드렸기만 할 것, 이어도 죽어, 가던 때가 ,있을 것이다. 둥? 퉁? 퍽? 무거운 희망의 소리. 였기 때문에 가끔씩 그랬다, 어두운 것으로 들렸다.
깊고, 깊다는 때때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없었을 것이다? 없었을 것이다, 무덥고, 습했지만 격렬, 한 오한이 드는 온도의 시작점, 은 마이너스 이백삼십칠쩜일오도. 아무것도 움직, 일 수 없는, 세계, 다. 온도는 곧 운동이다. 멈추는 것은 곧 어둠에 붙잡힌다.

어두운 불. 차가운 희망. 무거운 것들만 공중에 뜨는 세계.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야비군 훈련에서 오줌이 마려워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흉가같은 화장실에 갔다. 지린 냄새가 진동하는, 초 여름 푸르른 신록이 퍼런 방충망 사이로 비친다. 공기마저도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달콤한 피아노 소곡이 흘러 나온다. 지린 화장실에서.

그러니까 이 곡은 그런 곡이다.

굳 바이, 레닌.

얀 티어센(Yann Tiersen)의 굳 바이, 레닌 OST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 꺼풀, 투명한 울음같은 엷은 막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강이 보이고,
강변엔 드문드문 잎을 떨군 나무가 흉하게 서 있다. 하늘은 언제나 누런 황톳빛이다.
왠지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쓰러지고 난 뒤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녀는 레닌 동상이 커다란 헬기에 애처롭게 매달려 어디론가
실려가는 모습을 본다.
아빠는 커다란 수영장이 딸려 있는 집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우린 아빠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
Saw
Daddy
Today.

그냥

그냥 술을 조금 마신다.
그냥 담배를 조금 피우다가
그냥 땅콩을 조금 까먹고
그냥 모니터 멍하니 바라보다
그냥 자겠지.

어느 누구만 죽는다는 것은 불공평하지만,
모두가 다 죽는 다는 것은 의외로 공평하다. 그냥
지구를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미사일의 발사버튼을 누르는
악당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어떤 날은 기분이 좋고 그냥
어떤 날은 까닭없이 눈물 나는거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철저히 속아주는거
까짓꺼 희망, 삶, 사랑, 우정
뭐 이런거
속지 뭐.
속아주지.

뭐.

외계지적생명체

2007. 12. 29.

넷앤시스 모뎀은 제조사를 알 수 없는 와이드밴드 케이블 모뎀으로 바뀌었다. (딕시스 2.0b 지원)
MAX400PLUS는 그 이후로도 쭉 고생했으나, 최근 광랜으로 바꾼 뒤로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해 IpTIME q104 공유기에 바톤을 이어줬으며, 공씨디에 추가해 공DVD 미디어도 많이 생겼고, 영원과 하루 팜플릿은 테오 앙겔로풀로스 DVD셋트로 바뀌었다. 마우스와 모니터 키보드도 바뀌었다.

나만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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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큐브. 스피커. 넷앤시스 MNG-2005케이블모뎀, MAX400PLUS 인터넷 공유기. 메모박스. 밀레니엄맘보(아직도 다 못본). 2003년 세계댄스선수권대회 디브이디. 마이크로소프트 씨디 몇 장. 공씨디 대략 칠십장. 케이크통, 케이크통. 지갑. 담배. 유에스비메모리. 믹스너트 빈 캔. 재털이. 영원과 하루 팜플릿. 마우스. 키보드. 모니터.

휴. 재미없다.

새벽

왼쪽 어금니가 계속 아프다. 월요일에는 그냥 이상한 느낌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확실히 자각할 정도로 욱신거린다. (가끔) 그런데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하니까 거짓말처럼 괜찮아지는걸까. 한번 이를 갈고 금속의치를 박아 넣은 뒤로 치과와 관련된 치료는 빨리 받아야 겠다는 결심을 한 터였다. 그런데도 이 아픔은 뭔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사실은 이가 아픈게 아니라 잇몸이 아픈 것에 더 가깝고, 잇몸이라기보다는 턱과 식도 근처 어림이 아픈게 더 정확하다. 이런저런 것 때문에 요즘 가끔 양치질을 하다 말고 거울을 통해 입 안을 들여다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온통 누렇다. 군대 다녀온 뒤로는 양치질도 하루에 두번씩 하는데(세번은 도저히 버거워서), 오히려 그 전보다 커피라던가 흡연량이 늘어서 그런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구취가 심하지는 않다. 구취는 오히려 양치질보다는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겼을때 심해진다고 한다. 한동안 알콜섭취가 뜸해졌고 (정말 하는 말인데, 군대가기 전보다 술이 많이 약해졌다. 자주 마시기도 싫고..)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엔 정말 괴상한 생활을 하고 덕분에 내 몸 어딘가가 틀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증세는 이렇다. 하루에 밥을 한끼 이상 먹으면 몸이 견디질 못한다. (속이 좋지 않다.) 고기를 먹으면 영락없이 다음 날은 설사를 한다. 특히 삼겹살은 쥐약이다. 그래서 계속 식욕이 없다. 힘을 빼고 있으면 오른손이 간간히 떨린다. 이건 마우스를 하도 클릭해서 그렇다. (그래서 마우스도 새로 사고, 마우스 패드도 손목 받침이 되어 있는걸로 바꿨더니 좀 부담이 덜한 느낌) 가끔 눈물이 나는데 (심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눈이 너무 따갑다.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왼쪽 어금니 부근도 아프고. 어휴.

어제는 티븨에서 대관령 근처의 양목장을 구경시켜줬다. 보는 순간 “내가 양띤데”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양들이 무척 귀여웠다. 발정기가 되어서 숫놈끼리 싸우는걸 두고 리포터가 호들갑스럽게 “온순할 줄 알았던 양이 저렇게 사나워.. 어쩌구..” 하는 말을 하던데,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모든게 유쾌하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한번에 두가지 상반된 감정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유쾌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비교적 적절한 묘사인 것 같다. 제발 날 때리지 말아주세요, 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지금 막.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수학시간때 배웠던 함수, 꼭 그런 기분이 든다. 인풋값이 있으면 특정한 아웃풋이 항상 있다. 그러나 왜 인풋값이 그렇게 아웃풋 되야 하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캡슐화. 나 자신을 캡슐화하자.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내게서 인식의 문제는, 항상 내 자신이 인식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조작된, 그러니까 두개의 나를 느낀다. 인식하는 나, 그 인식하는 나를 인식하는 나, 그리고 대상. 요즘 가끔 드는 생각인데, 인식의 대상이 주체성을 지닌다는 가장 간명한 사실이 대체 어떠한 심적 상태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이 말은 다음의 쉬운 비유로 치환된다. “남성으로서의 내가 포르노를 볼 때, 거기에 출연하는 여배우의 자기주체성”이다. 어떤(Some) 여성은 모든 상황에서 자기주체성을 긍정하는 존재여야만 한다. 물론 남성도 그렇다. 그러나 포르노에서 여성은 두번 자기주체성을 부정당한다. 한번은 상대배역의 남성(혹은 남성들), 두번째는 나에 의해서, 욕망의 대상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선 간단한 논리다. 그리고 이 논리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자본 아래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으로써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데,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귀여움받는 대상이 아니라 귀여운 주체여야하고, 장애인은 보살핌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주 쉽고, 간단하고, 단단한 논리. 그러나 난 왜 그 말이 잘 와닿지가 않는걸까, 앵무새처럼 외우긴 잘하면서. 왜 내게는 그 모든게 다 대상일까,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다. 주체가 존재하기는 하는걸까? 나에 의해서 단 한번도 인식된 적이 없는 나는, 과연 한번이라도 존재하기는 했던걸까? 여기서부터 혼돈이 시작된다. 인식의 문제. 모든걸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해버리는 서양 인식론의 사고기반. 포스트모더니즘조차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본다. 대상의 주체성. 웃기는 말이죠. 말대로 하자면 대상은 대상이고 주체는 주첸데, 대상의 주체성이란 논리적 모순이 될 수 밖에 없다. 아예 이런 틀 자체를 부정해야한다. 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니까 여기서 이 얘긴 그만.

쓰기 시작했을때는 새벽이었는데, 이미 훤한 아침이 되었다. 원래는 새벽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새벽, 이라는 부들부들거리는 힘찬 상상력이, 이제는 어떻게 내 내부에서 죽어가는지. 왜 새벽이 오는게 두려워졌는지. 나는 변할 수 있는지. 나는 변할 수 있는지. 정말 나는 변할 수 있는지. 갑자기 이 얘기 하니까 막 변하고 싶다. 오오, 이 말 한마디에 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다 변해있을 것 같다. 갑자기 울컥 목이 메인다. 나는 변할 수 있다. 나는 변할 수 있다, 고 주문을 외운다. 이제 누구도 날 열어 볼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렇게,

이, 도망자들의 나라에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신, 왜 멈춰있지요? 그러다간 잡혀요. 어서 뛰세요, 어서!

소모

 밤중에 일을 하다가 컵에 물을 담아오기 위해서 방문을 여는 순간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랬다. 어떤 산발을 한 여자가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삼년만에 그렇게 놀래보기는 처음이다. 가만히 보니까 엄마였다. 엄마랑 나랑 새벽 네시에 한참을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왜 내 방문 앞에 서 있냐고 물으니까 아침에 약국에 가서 아버지 약 좀 사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디 아프시냐고 했더니, 밤새 온몸이 쑤셔서 잠을 잘 못이루신다며 저 증세는 엄마가 잘 아니까 그냥 약국에 가서 약만 사오면 된다는 말만 반복한다. 안방에 갔더니 아버지는 연신 몸을 뒤척이면서 끙끙댄다. 난 갑자기 부산해져서 119를 부르니 어쩌니 하는데, 엄마는 지금 가봐야 응급처치만 하니까 소용 없단다. 하긴…

 새벽까지 일을 하고 좀 느즈막히 일어났더니 집안이 조용했다. 엄마는 교회 간 것 같고 동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식탁에 못보던 약봉지가 있는걸 보니 동생이 투덜대며 약국에 다녀온 것 같다. 안방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신다.

 아버지는, 말하기 민망하지만 치질 기운이 좀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벌써 근 10년 가까이 트럭 운전을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시간 만큼, 아버지는 한번 운전대를 잡으면 놓을 수 없다. 그리고 피부병도 좀 있고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런저런 몸 상태가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강철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아픈건 개념 밖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그것은 항상 거짓인 명제다. 어쩌면 내가 세심하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것이 옳다. 내가 세심하지 못해서 아버지가 아픈걸 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아버진 아픈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교회도 가지 못하고 (우리 아버지의 유일한 낙), 처연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모양이라니.

 가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때를 떠올린다. 예전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애증의 관계로 평생 이렇게 살겠지, 싶었는데, 엄마고 아버지고 점점 늙어가는 것 같다. 인간이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게, 뭐랄까 자기성(自己性) 같은 것을 조금씩 소모해 가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은 참 시답다.

 뭘 어째야 할까, 생각중이다. 깨워서 죽이라도 끓여 들여야 하나…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 앞 뜰에서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노천카페의 형식으로 맥주를 판다. 맥주값은 놀랄만큼 싸고 (이 말은 상상했던 것만큼 비싸지 않다는 얘기다. 500 한 잔에 2000원) 맛도 놀랄만큼 진하다. 물론, 안주는 시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까짓 일로 종업원이 얼굴을 찌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나에겐 일종의 거만과 허위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세종문화회관. 단 한번도 그 곳에서 실연되는 공연을 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때가 되면 이 맥주맛을 잊지 못해서 때론 혼자서 때론 몇 명의 친구들과 지나가다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삼년째구나 벌서.

 어젠 인사동에서 일때문에 미팅이 있어서 갔다가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왔다. 걸어가기엔 좀 빠듯한 거리, 라고 느꼈다. 역시 연애할때하곤 다른 모양이다. 날씨도 더웠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여서 정류장 앞에 도착했을땐 거의 녹아웃 상태였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간이 테이블이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콜라를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나서 무작정 나도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시킨다.
 별다른 집회일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짭새들은 불온하게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건너편 미 대사관 앞에선 한양대 학생들이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깃발을 들고 서 있다. 그마저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여전히 고가의 대형카메라를 든 멋진 남성과 귀엽고 아담하면서도 역시 상당히 고가인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를 든 멋진 여성들은 연신 세종문화회관을 찍어댄다. 재잘재잘. 여전히 버스들은 줄을 이어 정류장에 도착했다가 출발하고를 반복. 공복에 마신 맥주탓인지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딱히 전화해서 불러낼 사람도 없었고 기다리는 것도 지쳐서 혼자서 홀짝홀짝 맥주를 마신다. 세종문화회관의 거용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서 지친 청춘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갑자기 심한 복통이 몰려왔으나 이내 취기로 인해 통증이 가셨다.
 그런데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동기도 없고 대상도 없는 막연한 분노. 서울의 중심, 이 지리적 중심 혹은 이데올로기적 중심, 그것도 아니면 소문의 중심이거나 서민들이 가지는 막연한 자부심으로써의 중심. 그 중심에다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 싶었거나, 혹은 내 머리위로 핵폭탄을 떨어트리고 싶었다. 무기력과 교만과 낙담의 중심에다가 말이다.
 잠시 머리를 텅 비웠다. 젠장. 욕이 나온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왜 여기서 대낮에 맥주나 마시고 자빠졌나. 다시 사물이 분주히 가속한다. 나는 점진적으로 고도를 높였다.
 버스가 도착해서 시원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이어폰에선 피아졸라의 센트럴파크 공연실황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이 흔히 아코디언이라고 알고 있는 이 악기는 사실 반도니언이라는 악기입니다. 이건 1854년에 교회음악을 위해 발명된 악기이지만 고작 2년 뒤에 사람들은 이걸 부에노 사이레스의 창녀촌으로 가져왔고 지금은 제가 센트럴 파크에 가져왔습니다. 이 악기는 참 여러 곳을 여행한 셈이군요. (웃음)
 하지만 전 지금 농담하려는게 아닙니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 악기는 비현실적인(surrealistic) 역정을 겪었지만 이것은 마치 탱고가 어떻게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 같은 곳에서부터 태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뉴올리언즈 재즈같이. 이런 것들은 그 시작이 분명하진 않지요. 하지만 오늘은 분명할껍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자유, 음악 그리고 사랑같은게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매우 감사합니다. 제 음악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