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며, 어머니는 내게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처연한 표정으로 만류했지만, 이미 내 마음의 절반은 우주에 가 있었다.

발사대로 향하기 전에 카메라 샾에 들러 카드로 300mm짜리 망원 렌즈를 구입했다.

예상 외로 발사대 근처는 한산했다. 군인들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발사 책임자가 나와 내 동료에게 다가와서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자, 결정을 내리세요. 오해가 있었는데, 당신들은 우주에 일주일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삼년을 머물게 됩니다. 원치 않으면 지금 그만 두셔도 괜찮습니다.”

내 동료는 그 말에 기겁하며 자기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상관없었다. 가겠다고 했다.

니콘 본사에서 내게 프로토 타입의 초망원 렌즈를 선물했다. 이거면 우주에서도 지표면을 상세히 볼 수 있다고 했다. 괜히 300mm짜리 렌즈를 샀나보다 하고 후회했다.

로켓이 진동하며 중력을 뿌리치고 대기권을 벗어나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지구의 동쪽, 그러나 우주에서 방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에서 갑자기 태양이 떠올랐다. 평생 그렇게 밝은 태양은 처음이었다.

우주 정거장에 로켓이 도킹하고, 무중력 상태에서 정거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거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도 없고, 진동도 없는 우주. 나는 초속 몇 킬로미터 인가로 지구 정지 궤도를 돌고 있었지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외로울 때마다 카메라로 지구를 관찰했다.

정거장은 지구의 밤 쪽에 떠 있었으므로,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야경 뿐이었다.

차들이 길게 늘어 서 있고, 아파트는 이빨 빠진 옥수수처럼 곳곳에 불이 꺼져 있었다.

꿈 얘기

엊그제였나, 간만에 악몽을 꾸었다. 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중간에 한 번 깼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또 다른 한 편의 꿈을 꾸게 된다.

#1

내가 FBI 요원인가 뭔가가 되어서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이다. 범인의 흔적을 찾아 야지의 버려진 도축장에 도달했는데, 도축장이라기 보다 마치 버려진 극장 같기도 했다. 스테이지 위에는 뼈만 남은 소들이 여럿 줄에 매달려 있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천정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데, 환하게 빛나는 기둥같았다. 그 사이로 먼지가 흩날린다.
범인의 흔적을 놓친 것인가 좌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우두인(牛頭人)이었다. 범인은 바로 그였다. 나는 총을 들어 그에게 겨누며 멈추라고 말했는데, 그는 말 없이 계속 내게로 다가왔다. 한 걸음 앞에 당도한 그에게 총을 발사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총은 발사되지 않고, 나는 그 뿔에 가슴을 꿰뚫렸다.

#2

자전거를 타고 좁은 벼랑 사이를 위태위태 달리다가 곧 허물어 질 것 같은 아파트 옥상에 닿게 되었다. 밑을 내려다 보니 까마득하게 높은 아파트였다. 나는 자전거를 분해해 일단 밑으로 던져 놓고 내려가는 계단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파트가 휘청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해졌다. 내려가는 계단은 굳은 철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힘들게 철문을 열고 나니 온갖 잡동사니로 계단은 꽉 막혀 있었다. 하늘은 뿌옇게 흐렸고, 그제서야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는걸 기억해냈다.

잠든 꿈

가끔 의식적으로 감각을 끊고 – 마치 플러그 뽑듯이 – 자욱한, 검고 어두운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 앉는 시늉을 한다. 가끔의 대부분은 외풍이 드는 내 작은 방이 너무 춥게 느껴질 때고,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이 어느 날 다 팔려서 그날 밤 소녀는 켤 성냥을 구하지 못해 얼어 죽었다는 블랙코메디를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아니, 그런데 어차피 소녀는 성냥이 있어도 얼어 죽었던 것 아니었나? 이래저래 가망이 없다.

전에 말 했던 것 같은데, 자각몽 말야. 꿈 속에서 그것이 꿈인 것을 깨닫게 되는 꿈. 드디어 조금씩 나는 그 신비로운 땅으로 접어드는 것 같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지. 첫번째 자각몽은 부끄럽게도 통제불능의 난교파티가 되어버렸는데 – 그마저도 끝까지 다 꾸지 못해서 아쉬워 – , 그 꿈을 꾼 다음에 나는 단단히 다짐했어. 고작 포르노 주인공이나 되는데에 귀중한 체험을 소모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두번째 자각몽을 꾸었을 때에, 기억을 역류해서 묻힌 의식의 공간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

네가 사기꾼이라고 말하던 그 프로이트 말야. 그 사람이 그랬데. 꿈은 의식의 검열이 약해지는 시간이라고. 짐작도 못 할 무의식의 꿈틀거림이 투사되는 것이 꿈이라고. 그렇다면 약해진 검열 과정 안에서 명징한 의식을 갖은 사람은 무의식도 총천연색으로 직시할 수 있는게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문을 열었어.’

물론 ‘문을 연다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지. 좀 클리셰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엔 그것 밖에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더라구. 그 곳은 아마 사월이나 오월쯤이 된, 숲 속의 고풍스러운 저택의 서가였던 것 같아. 문득 나는 이것이 꿈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되자마자 초록 잎들에 반사된 녹색광이 넘실거리는 창문 맞은편 벽에 문이 생긴거지.

두려움 같은 건 없었어. 왜냐하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나의 내부와 외부의 적극적인 모순성 같은게 느껴지질 않았거든. 이건 꿈이니까, 탁자며 집이며 바람이나 햇빛, 이 세계 전체가 나의 산물인거야. 그리고 그걸 엄청나게 실감해.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그게 꼭 이런 기분일꺼야.

미리 짜여져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향해 걸어갔어. 그리고 힘주어 문고리를 돌렸지. 빛, 그리고 빛, 그런데 빛, 그러나 빛, 그래서 빛. 초신성이 폭발하는 순간에 바로 그 앞에 있다면 태양의 백만배나 되는 빛을 볼 수 있데. 그런데 눈부시지가 않아.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그 다음이 정말 중요한 대목인데 말이지.

그런 굉장한 경험들을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까 너와 무척 이야기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밖엘 나갔더니 이미 겨울이더라. 하늘이 파랬어. 공기는 시려워. 너와 교감하고 싶어. 보고 싶어.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주소는 불명. 안녕, 와일드 오키드. 코퍼스 크리스티 캐롤도 네게 안부를 전해달래.

그럼.
이만 총총.

방정식

요즘 꿈을 너무 심하게 꾼다.

어제는 꿈 속에서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방정식을 생각해냈다.

n(n-1)(n+1) = 3n

이라는 방정식인데, 당최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이 방정식을 생각해낸건지
이 방정식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낮에 이 방정식을 풀어 보았다. 나는 수학을 정말 못하기 때문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짚어주시길 바란다.

n(n-1)(n+1) = 3n
=> n(n^2-1) = 3n
=> n^3-n = 3n
=> n^3-4n = 0

이 방정식을 만족시키는 정수의 해는 ±2 밖에 없다.

꿈 속에서 이 방정식을 떠올리고는 ‘해냈다!!’ 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영 찜찜.

러브레터

그림을 그리고 싶다. 휴대와 조작이 간편한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가 한대쯤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갖고 있다!!) 가끔 내키는대로 들로 나가 사진을 찍는다. 나는 삼십분을, 바람에 눕는 풀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고, 그 다음의 이초나 삼초 정도 사이에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또 다시 한두시간을 누워 하늘을 보거나… 해거름이 지려고 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 툭툭 털고 터벅터벅 흙길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다. 마을 어귀의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전에 맡겨 놓은 필름이 현상되었는지 물어본다. 천원이나 이천원을 쥐어주고 현상된 필름을 들고 집에 당도하면, 멍멍이가 달려와 무릎에 안긴다. 또 한 삼십분 멍멍이랑 놀아주고, 씻고, 옆 집 순영이 할머니가 그저께 가져다 준 텃밭에서 마구 뽑아 온 푸성귀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책이나 전축, 사진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현상해 온 필름을 라이트박스에 놓고 보며 희죽희죽 웃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다면 수채화 물감을 풀어 한 눈으로는 루뻬를 통해 사진을 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그 풍경을 그대로 스케치북에 옮긴다. 그날 완성할 필요는 없다. 중간에 시들해져서 그만둬도 좋다. 어쨌든 그렇게 쌓아 나간 스케치북이 열 두서너권 쯤 되면 나는 또 밤새 그걸 안주삼아 킥킥하면서 뒷집 영이 할머니가 담근 막걸리로 얼큰하게 취할 것이다. 그리곤 아! 하며 무릎을 친다. 내일은 뒷골 순심이 할머니 (왜 죄다 할머니 뿐이냐..) 영정사진 찍어드리는 날이구나 하는 것이다. 순심이 할머니는 매번 내가 놀러 갈때마다 젊은 것이 일은 안하고 히죽히죽 웃고 놀기만 한다고 타박한다. 그래도 순심이 할머니는 외할머니랑 많이 닮아서 좋다. 그리고 다음주 쯤에는 할머니들이랑 나물 캐러 가야지, 또 그런 생각에 히죽히죽 웃는 것이다.

또 이래도 좋을 것이다. 서울서 결혼한 원영이가 제수씨와 큰애, 작은애를 데리고 주말에 놀러 온다. 나는 그들이 머물 방을 치운다, 해 먹일 음식을 준비.. 는 못하고 영이 할머니한테 부탁하거나 지난번 비가 많이 내려 물에 떠내려간 마을 냇가 평상을 다시 만들어 놓는다거나 하면서 간만에 바지런을 떠는 것이다. 지나가던 영이가 ‘삼촌, 미친거 맞지 지금?’ 하면서 농을 걸면, 그래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래 요것아, 좋아서 미치겠다!’ 한다. ‘영이야, 너 내일 서울서 친구들 오는데 여기 서방골은 니가 잘 아니까 친구들한테 좋은 것 구경 많이 시켜줘야해’ 하면 영이는 ‘삼촌 사진기 열흘만 빌려주면 생각해볼께’ 하며 혀를 낼름 내밀고 후다닥 뛰어간다. 그리고 영이한테 카메라를 한 대 선물해야 겠구나 마음을 먹는 것이다.
다음날 원영이가 번쩍번쩍하는 코란도를 끌고 마을 어귀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면, 고까짓것 고무신을 꺼꾸로 신고 후다닥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우히히, 우히히 지나가다가 순심이 할머니네 누렁이가 꿈뻑꿈뻑 풀을 씹고 있으면 엉덩이 찰싹 한대 때리고 헐떡헐떡대면서 기다리고 있는 원영이네 가족을 만나러 간다. 잠깐 기다려! 내가 보일락 말락 할때 즈음부터 성질급한 원영놈은 차를 돌려 내쪽으로 오려 하는데, 나는 손짓발짓하면서 오지 말라고 막는다. 기념으로 한 장 찍어야지, 하고 마을 머릿돌 위에 사진기를 올려 놓고 지이이이익 하는 타이머를 감아 놓고 또 히죽히죽 웃으며 원영이와 애들과 제수씨와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길이 험해서 차는 어귀 공터에 놓아두고 나는 근처에서 밭일을 하던 명식이 아부지한테 ‘아부지 나 지게 좀 빌려가요!’ 하고 ‘어, 어, 어… 나 꼴 베야 허는디..’ 하는 명식이 아부지 뒤로 하고 한아름이나 하는 짐을 지게에 올려서 뒤뚱뒤뚱, 원영이는 ‘야, 좀 천천히 가 짜식아’ 하면 나는 또 뒤를 돌아보고 히죽히죽 웃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감자랑 옥수수를 삶아서 내놓으면 아이들은 벌써부터 동네 애들이랑 친해져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히히히 장난질 치고 ‘야들아, 너무 멀리가면 그냥 그집가서 자’ 한마디 하니까 명식이랑 영이랑 순심이랑 애들이 서울애들 손목을 끌고 ‘울집가서 자자’ 한다. 원영이는 서울서 가져온 좋은 음악을 꺼내 놓고 제수씨는 ‘이래저래 해도 주헌씨가 제일 팔자 좋네요’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면 나는 또 히죽히죽 웃는다. ‘서울 살기 퍽퍽하면 제수씨네도 내려와서 살아요. 여 빈집 많으니까 아무데나 들어가서 살면 되는데..’ 하면 이번엔 원영이가 히죽히죽. 아무튼 그렇게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사는 얘기 하다가 밤이 지나는 것이다.

또 나는 동네 아이들 대장이 되고 싶다. 서방골 방위대 대장. 우리의 적은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다. 특공일대장 명식이는 지보다 어린 꼬맹이 두서넛을 거느리고 항상 최전선에서 쓰레기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종군기자 영이는 지저분한 쓰레기들, 특히 명식이 아부지가 가끔 아무데나 버리는 농약병 같은걸 내가 빌려준 사진기로 찍어서 마을 회의때 발표한다. 명식이 아부지는 얼굴이 뻘게져서 ‘그거 내가 버린거 아닌디.. ‘ 하면 다들 와와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 나는 머슴이 되고 싶다. 수십년간 내가 버린 것들, 내가 모른척 했던 것들, 내가 이유없이 미워했거나, 뒤에서 욕을 했거나, 마음 속으로 다치게 했던 것들. 그 모두는 다른 어떤 이들에게 치유불가능한 상처일 것이다. 나는 너를, 그 깊은 내부를 본 적이 없으므로 그 동안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왔다. 마음 독히 먹고 잔뜩 쟁여서 튀어 나가라고, 뒤에서 소리치는 고참의 말에도 마음 한 구석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면 곳곳에 내 죄악의 흔적들 뿐이다. 몇년 전에 나는 나를 위안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정말 위안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다. 나는 나이므로 내 고통을 견딜 수 있지만, 너는 내가 아니므로 내가 준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머슴이 되고 싶다. 혼자서 견디는 삶보다, 떠받드는 삶, 보다 낮은 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네가 지금 하고 싶은게 정말 그거란 말야?

응.

멜렁멜렁

집에 오자마자 나는 멜렁멜렁해진다. 멜렁멜렁은 말랑말랑과는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은 뜻은 아니다. 오히려 벌렁벌렁이 더 가깝다면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니까 벌렁벌렁한 말랑말랑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시,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나는 벌렁벌렁 말랑말랑해진다. 엄마랑 장난을 조금 치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감식초 한 잔을 만들어 컴퓨터를 켠다. 엄마는 회사에서 그렇게 컴퓨터를 만져놓고 집에 와서 또 컴퓨터를 켜고 싶냐며 핀잔하지만, … … …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그다지 켜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멜렁멜렁하기 때문에 그런가부다 하고 생각한다. 윈앰프에서 티카티카하고 산울림이 노래를 부른다. 발바닥은 슬근슬근 간지럽다. 동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복작복작하고 검은 비닐봉지에 쌓인 옷을 찾는다.

오늘은 하루종일 쌜쭉쌜쭉. (그러니까 집에 오기 전까지) 바깥 날씨는 아직까지도 여름에 맞춰진 내 대뇌신경계가 깜짝 놀랄만큼 쌀쌀했지만, 내부는 아직도 뜨어거운 여름이어어어었다. 저녁에는 감자탕에 동동주를 마셨고, 직원들과 남 흉을 봤다. 그런데 그 ‘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아무와도 인연이 없는 아주 먼 과거의 어떤 사람이었다.

나는 요즘 사람의 꿈들을 한데 모아서 동전으로 바꿔주는 일을 한다. 나는 이 일이 썩 맘에 든다.

불면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지만 절대로 잠을 이룰 수 없는, 그런 꿈을 꾼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꿈인지 제대로 분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며칠째, 사실상 불면의 상태에 있다.

낮에는 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강변을 달리는 꿈을 꿨다. 강에서 수영을 하거나, 둔치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하는 사람들은 온통 쭉쭉빵빵의 아가씨들이었고 (욕구불만인걸까) 몇몇은 차가 다니는 차도에까지 나와서 한가롭게 누워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동생은 아가씨들에 시선을 뺏겨 앞에 여자들이 누워 있는지도 모르고 달렸다. 나는 그만 사람을 칠 것 같아서 동생에게 멈추라고 소리질렀지만, 덜컹, 덜컹 하면서 동생은 몇 명의 여자를 깔고 지나갔다. 여자들은 아팠을까. 하지만 그건 꿈이었다. 누구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 오직 내게만 거대한 죄책감같은게 남았다.

나를 백퍼센트 이해해주는 편안한 여자를 만나기는, 내가 어떤 여자를 백퍼센트 이해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정말 내 옆에서 아침에 함께 일어나는 다른 이를 생각할 수가 없다. 조용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뿌연 얼음물 같은 마을…

오늘은 자도 자도 졸렵다. 벌써부터 졸려워서 이제 조금 있다가 누워 잠을 잘 것이다. 내일은 또 거짓과 유치한 자기긍정 같은 걸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조금만 나를 칭찬해도 우쭐해지는건, 저녁에 퇴근하면서 생각해보면 죽고싶을만큼 부끄럽다.

이런 나에게도 기적같은 날이 올까..

이상한 꿈

첫번째 꿈은 월드컵 토고전이 있던 날이었나, 그날 뭔가로 인해 심히 의기소침해 있던 과장님을 꼬드겨 비교적 일찍 퇴근을 하고 저녁 겸 반주 해서 각자 소주 한 병씩 마시고 또 맥주를 몇 병인가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월드컵 경기를 미쳐 다 보지 못하고 잤던, 기분 참 싱숭생숭했던 날 밤에 꿨던 꿈이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부는 강풍에 떨어진 간판을 맞는 기분으로 우울하게 그 분의 부고를 들었고 꿈 속이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으며 아침이 되어 핸드폰 알람에 맞춰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고, 두번째 꿈은 그 뒤로 며칠이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 잔업에 한참을 또 시달리다 억지로 청한 잠 속에서 옛 애인이 나타나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표정이 어색해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었다가, 뒤늦게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찾아 온 후배가 슬쩍 나를 불러 한다는 얘기가 형 누나 이미 결혼했어요 하는데 그만 또 나는 마음이 미어지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눈에서 나는 눈물은 거짓이라. 사실 눈물은 부어 오르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이고 덜컹 내려 앉는 심장에서 나는 것이며, 때로는 이야기 하는 입에서 또 때로는 글을 쓰는 손 끝에서 나는 것이라. 삐걱삐걱 흔들리는, 하루에 단 두번만 운행한다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버스에 두고 내린 손가방, 그리고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잊고 싶은 것들을 적은 쪽지가 변덕스럽게 후회가 되어 한참을 뛰어가며 소리지르고 제발 좀 세워달라고 그 안에 두고 내린 것이 있다고 해도 버스는 나를 위해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런데 우리가 또, 아니 내가 또 언제는 현재의 것을 소중히 여겼던 적이 있는가. 현재는 인식하는 순간 과거, 였었고 그래서 내 아끼는 마음은 언제나 후회형의 것들.

아주 먼 훗날에, 혹은 아주 먼 과거에 우리는 때때로 블랙홀과 마주쳤다. 그 중심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불길한 중력들에 발생한 기조력이 우리를 길게 잡아 찢을 것이다.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깝게 말이다. 슬프냐고, 아프지 않냐고 묻지는 마시길.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까운 상태로 말이다.

그냥

이 밑에 글, 도 아니고 음악과 가사만 놓아 둔 무책임한 그 책장에 누군가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하면서 집에 왔다.
아주 간료한 안부라도 좋고,
아주 뜬금없는 불평이라도 좋고,
아주 사랑스러운 찬사라도 좋으니
뭔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많이 취했는데,
기어이 집에 왔다.
기어이 침대에 눕고,
기어이 또 꿈을 꾼다.

나도 그게 너무 너저분한 넋두리란거 알아.
젠장, 씨발.

나도 안다고.

314

또 이것저것을 하다가 밤이 지났고 아침이 되어 근검하게 배달되는 신문을 훑다가 (이건 사실 거짓말) 책을 보다가 밥을 조금 먹고 병원에 갈까 잠깐 또 생각하다가 그냥 침대에 누워 별을 세고 있었다. 타이밍, 이 중요하다 나는 어느 한 시점을 제대로 잡으면, 항상 제대로 일이 풀릴 것이라고 여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때때로 과연 내가 누구 편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꿈 속의 망상으로) 이산화탄소병, 에 걸렸었다. 이 병의 증상은 들숨은 가능하지만 날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물론 조금은 당황했었다. 숨이 내쉬어지지가 않아서 가슴이 계속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당황은 했었다. 틀에 맞지 않는다. 부정교합, 이다. 또 어제는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중고로 내놓는다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두 권을, 가능하면 구하고 싶다고. 그러나 답장으로 온 메일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냥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두 권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 권은 내가 보고 다른 한 권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메일 주소도 맞게 보냈는데… 톰 맥레이가 (차라리 바라는 바 대로) 가죽바지에 길게 머리를 기르고 코카인이나 빨아대는 롹커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노래 부르기나 악기에 전혀 조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족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아, 그런데 지금 내가 왜 깨어 있냐 하면은 어제 마치고 보낸 일감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이다. 큰 문제는 아니다. 컴퓨터를 켜는 것은 내게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듯한 일종의 제의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얄밉게 할 일만 마치고 전원을 내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찬찬히 다시금 사이트를 둘러보고 윈앰프를 켜서 음악을 듣고 (한 두어 곡) 여기에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때로는 열 서너줄도 더 쓰고 그냥 지워버린 다음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다가, 또 때로는 나중에 써야지 하면서 다음에 지워버리거나 한다. 횟배를 앓는,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다. 또 뭐였더라? 딕셔너리 넘어가듯. 날개에서 아마도 주인공의 처는 주인공을 매우 사랑했을 것 같다. 사랑이 무한한 잠재력이라면, 그의 처는 드디어 그에게 없던 날개를 사주었던 것이다. 내가 항상 하는 말처럼, 아주 먼 과거에 들었던 아주 먼 미래의, 혹은 아주 먼 미래에 들었던 아주 먼 과거의 꿈 같은 것. 미안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표현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이게 내 잠재력이라면 잠재력이고, 내 한계라면 한계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이 어떤 것의 미래라면, 그것은 곧 어떤 것의 과거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가 왜 그렇게 과거에 집착하는지, 과거에서 곧 미래인 현재에 때때로 과거가 투영되면서 이 영화가 이야기를 뭉그러뜨려 어떻게 판타지를 만들어 나가는지 잘 알 수가 있다. 아마 나만 아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내게, 여자는 항상 먼 미래에 보았던 과거의 잔영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분들은 이게 무슨말인지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애써도 된다는 얘기) 나는 나만이 아는 언어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미래의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약간이라도 제대로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은 “The Longest Journey”라는 게임을 끈기를 갖고 마지막까지 플레이해보기 바란다.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보름동안이나 플레이 해야만 했던 정말 아름다운 게임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방에 갖힌 인간들이여. *용기를 갖고 / 패배하라.

*”피를 마시는 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