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고 싶다. 휴대와 조작이 간편한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가 한대쯤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갖고 있다!!) 가끔 내키는대로 들로 나가 사진을 찍는다. 나는 삼십분을, 바람에 눕는 풀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고, 그 다음의 이초나 삼초 정도 사이에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또 다시 한두시간을 누워 하늘을 보거나… 해거름이 지려고 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 툭툭 털고 터벅터벅 흙길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다. 마을 어귀의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전에 맡겨 놓은 필름이 현상되었는지 물어본다. 천원이나 이천원을 쥐어주고 현상된 필름을 들고 집에 당도하면, 멍멍이가 달려와 무릎에 안긴다. 또 한 삼십분 멍멍이랑 놀아주고, 씻고, 옆 집 순영이 할머니가 그저께 가져다 준 텃밭에서 마구 뽑아 온 푸성귀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책이나 전축, 사진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현상해 온 필름을 라이트박스에 놓고 보며 희죽희죽 웃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다면 수채화 물감을 풀어 한 눈으로는 루뻬를 통해 사진을 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그 풍경을 그대로 스케치북에 옮긴다. 그날 완성할 필요는 없다. 중간에 시들해져서 그만둬도 좋다. 어쨌든 그렇게 쌓아 나간 스케치북이 열 두서너권 쯤 되면 나는 또 밤새 그걸 안주삼아 킥킥하면서 뒷집 영이 할머니가 담근 막걸리로 얼큰하게 취할 것이다. 그리곤 아! 하며 무릎을 친다. 내일은 뒷골 순심이 할머니 (왜 죄다 할머니 뿐이냐..) 영정사진 찍어드리는 날이구나 하는 것이다. 순심이 할머니는 매번 내가 놀러 갈때마다 젊은 것이 일은 안하고 히죽히죽 웃고 놀기만 한다고 타박한다. 그래도 순심이 할머니는 외할머니랑 많이 닮아서 좋다. 그리고 다음주 쯤에는 할머니들이랑 나물 캐러 가야지, 또 그런 생각에 히죽히죽 웃는 것이다.
또 이래도 좋을 것이다. 서울서 결혼한 원영이가 제수씨와 큰애, 작은애를 데리고 주말에 놀러 온다. 나는 그들이 머물 방을 치운다, 해 먹일 음식을 준비.. 는 못하고 영이 할머니한테 부탁하거나 지난번 비가 많이 내려 물에 떠내려간 마을 냇가 평상을 다시 만들어 놓는다거나 하면서 간만에 바지런을 떠는 것이다. 지나가던 영이가 ‘삼촌, 미친거 맞지 지금?’ 하면서 농을 걸면, 그래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래 요것아, 좋아서 미치겠다!’ 한다. ‘영이야, 너 내일 서울서 친구들 오는데 여기 서방골은 니가 잘 아니까 친구들한테 좋은 것 구경 많이 시켜줘야해’ 하면 영이는 ‘삼촌 사진기 열흘만 빌려주면 생각해볼께’ 하며 혀를 낼름 내밀고 후다닥 뛰어간다. 그리고 영이한테 카메라를 한 대 선물해야 겠구나 마음을 먹는 것이다.
다음날 원영이가 번쩍번쩍하는 코란도를 끌고 마을 어귀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면, 고까짓것 고무신을 꺼꾸로 신고 후다닥 부리나케 달려나간다. 우히히, 우히히 지나가다가 순심이 할머니네 누렁이가 꿈뻑꿈뻑 풀을 씹고 있으면 엉덩이 찰싹 한대 때리고 헐떡헐떡대면서 기다리고 있는 원영이네 가족을 만나러 간다. 잠깐 기다려! 내가 보일락 말락 할때 즈음부터 성질급한 원영놈은 차를 돌려 내쪽으로 오려 하는데, 나는 손짓발짓하면서 오지 말라고 막는다. 기념으로 한 장 찍어야지, 하고 마을 머릿돌 위에 사진기를 올려 놓고 지이이이익 하는 타이머를 감아 놓고 또 히죽히죽 웃으며 원영이와 애들과 제수씨와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길이 험해서 차는 어귀 공터에 놓아두고 나는 근처에서 밭일을 하던 명식이 아부지한테 ‘아부지 나 지게 좀 빌려가요!’ 하고 ‘어, 어, 어… 나 꼴 베야 허는디..’ 하는 명식이 아부지 뒤로 하고 한아름이나 하는 짐을 지게에 올려서 뒤뚱뒤뚱, 원영이는 ‘야, 좀 천천히 가 짜식아’ 하면 나는 또 뒤를 돌아보고 히죽히죽 웃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감자랑 옥수수를 삶아서 내놓으면 아이들은 벌써부터 동네 애들이랑 친해져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히히히 장난질 치고 ‘야들아, 너무 멀리가면 그냥 그집가서 자’ 한마디 하니까 명식이랑 영이랑 순심이랑 애들이 서울애들 손목을 끌고 ‘울집가서 자자’ 한다. 원영이는 서울서 가져온 좋은 음악을 꺼내 놓고 제수씨는 ‘이래저래 해도 주헌씨가 제일 팔자 좋네요’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면 나는 또 히죽히죽 웃는다. ‘서울 살기 퍽퍽하면 제수씨네도 내려와서 살아요. 여 빈집 많으니까 아무데나 들어가서 살면 되는데..’ 하면 이번엔 원영이가 히죽히죽. 아무튼 그렇게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사는 얘기 하다가 밤이 지나는 것이다.
또 나는 동네 아이들 대장이 되고 싶다. 서방골 방위대 대장. 우리의 적은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다. 특공일대장 명식이는 지보다 어린 꼬맹이 두서넛을 거느리고 항상 최전선에서 쓰레기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종군기자 영이는 지저분한 쓰레기들, 특히 명식이 아부지가 가끔 아무데나 버리는 농약병 같은걸 내가 빌려준 사진기로 찍어서 마을 회의때 발표한다. 명식이 아부지는 얼굴이 뻘게져서 ‘그거 내가 버린거 아닌디.. ‘ 하면 다들 와와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 나는 머슴이 되고 싶다. 수십년간 내가 버린 것들, 내가 모른척 했던 것들, 내가 이유없이 미워했거나, 뒤에서 욕을 했거나, 마음 속으로 다치게 했던 것들. 그 모두는 다른 어떤 이들에게 치유불가능한 상처일 것이다. 나는 너를, 그 깊은 내부를 본 적이 없으므로 그 동안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왔다. 마음 독히 먹고 잔뜩 쟁여서 튀어 나가라고, 뒤에서 소리치는 고참의 말에도 마음 한 구석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서 내려다 보면 곳곳에 내 죄악의 흔적들 뿐이다. 몇년 전에 나는 나를 위안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정말 위안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다. 나는 나이므로 내 고통을 견딜 수 있지만, 너는 내가 아니므로 내가 준 고통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머슴이 되고 싶다. 혼자서 견디는 삶보다, 떠받드는 삶, 보다 낮은 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네가 지금 하고 싶은게 정말 그거란 말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