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과장님이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치고 가는 통에 화들짝 깼는데, 얼마나 침을 흘리며 잤는지 입가에 흰 자국이 가득하더라. 옆자리 윤경씨는 내가 그 상태가 될때까지 혼자 킥킥대며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과장님이 지나간 다음엔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다가 결국은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말더라구. 아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낮잠 시간에 꿈을 꾸었거든. 어느 무료한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글쎄 그게 네 전화지 뭐니. ‘형, 뭐헙니까. 내 지금 화곡동인데 배고파 죽것소. 얼렁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사주소.’ 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아, 네, 네. 지금 당장 달려갑죠.’ 하고 과장님 한테는 거래처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고 뻥치고선 화곡동으로 달려가는거지. 아, 냄새가 어찌 나던지 순대국 하나 얼른 사주고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는데, 등을 미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아주 혼났다. 완전 구렁이 수준이야. 너는 엄살피우면서 ‘형, 나 등 아파. 살살 밀어.’ 하면, 또 나는 손자국 나게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다 큰 놈 자식이 이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하는거지.
꿈이고 뭐고 잘 안믿는 성격이지만서도, 간만에 네 소식 전해 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생각에 일은 손에 안잡히고 해서 몰래 휴게실 구석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우리 애 한참 못봤지?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간단다. 현경이는 벌써부터 무슨 조기 교육인가 뭔가 시킨다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내 얇은 월급봉투 보고 한숨 내쉬는 처지지만, 언제는 우리가 부유해서 행복했더냐. 함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던거지.
동훈이는 미국에 거 뭐시냐 무슨 좋은 대학교 닥터 한다고 준비하더니 그게 잘 안된 모양이고. 동훈이 처만 맨날 내게 전화해서 자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내가 언제 한 번 동훈이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야겠어. 까짓꺼 닥터야 나중에 해도 하는거고 먼저 가정을 챙겨야하는거 아니겠니. 지네 아부지가 물려준 재산이 꽤 된다지만 그것도 까먹다 보면 금방이잖아. 요즘엔 동훈이 처가 이것저것 많이 살림을 줄이는 것 같더라. 불쌍하고 고맙기도 하지. 나는 사실 동훈이 이놈보다는 동훈이 처가 더 살갑고 좋다.
참, 너 철민이형 기억나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우리 학생회실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으면 찾아와서 국밥에 소주 사주던 형. 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형 보안법으로 끌려가서 계속 재판을 받았거든. 이래저래 십년도 한참 넘으면서 질질 끌었는데, 그 재판 드디어 무혐의가 되어서 이번에 나오게 되었단다. 법대 민규가 철민이형 재판중에 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되어서, 사실은 민규가 정말 고생했지, 가망없는 그 싸움 묵묵히 혼자서 다 끌고 결국엔 이겨버렸으니까. 시퍼렇게 젊은 놈이 재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벌써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었단다. 며칠전에 민규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는게 결국 그놈 울컥하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그러더라. ‘형, 내가 왜 이 좃같은 대한민국에서 변호사질 하려고 그렇게 이 악물었는지 알아요? 철민이형이 너무 불쌍해서, 철민이형 내 손으로 변호해주고 싶어서 변호사 됐어요. 나 방세도 밥값도 없이 친구 하숙방 전전할때 철민이형이 어느 날은 오만원, 어느 날은 이만원 그렇게 쥐어주는거야. 자기도 거지같이 다니는 주제에 뭔 돈인가 싶었는데, 그게 글쎄 가끔 투쟁 없는 날에 공사판에 가서 벌어 온 돈 나한테 다 줬던거에요…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
이놈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면 그 다음날 발목이 시큰거려서 자주는 못나가지만서도, 이제 신문보다 인터넷 만화 보면서 낄낄대는게 하루 낙이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돌아올 너 기다리면서 우리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네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지?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 ‘생활투쟁’해야한다고.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이어야 한다고.
에고 과장님이 휴게실 밖에서 나한테 손가락질 하고 있어. 얼른 마저 쓰고 퇴근준비 해야겠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이 편지는 일단 내 우체통 서랍에 넣어 둘께. 돌아 오면 몽창 다 모아서 한아름 안겨줘야지.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