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겨울이 됐으면 좋겠다.
월별 글 목록: 4월 2006
아주 긴 식사
저녁에 J를 만났다. 이 바닥의 교류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 사람은 어떤 생김일 것이다, 하는 추측은 완전히 빗나간다. (이자벨 아자니급의 사기성 외모) 분명 나보다 연상인데, 맥주 마시면서 나는 언젠가 이런 일이 한번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꾼 꿈 같기도 했다. 언젠가 누구에게서 당신은 참 편한 사람입니다, 라는 이야길 들은 이후로 사람을 만나면 강박처럼 편하게 대해줘야 한다는게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너무 편하게 있었다. (기쁘고 즐거운 종로의 저녁!)
그리고 우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리의 비둘기처럼, 시간에 화들짝 놀라 서로의 집으로 흩어졌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게 계속 기대오는 어떤 젊은 처자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나도 살폿 잠이 들었다.
사실은 이 기쁘고 즐겁다가도 열두시가 되면 유리구두 하나 던져놓고 도망쳐야 하는 신데렐라의 운명, 그와 유사한 나른한 피로감을 그대로 이어 침대로 다이빙까지 가려고 했으나, 버스 안에서 잠깐 든 잠때문에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나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오늘 밤은 어째야 하나,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하늘이 두쪽나도 가야 하는 곳이 있기 때문에 일찍 자긴 자야할텐데, 고민하다가 마침 출출해진 배 때문에 마침 길 가 24시간 기사식당에 닭곰탕이 삼천원이라고 해서 나도 모르게 문을 드르륵 열고 테이블에 앉았다.
절대 소주를 함께 시키려던건 아니었는데, 손님도 하나 없는 해장국집이 24시간 연중무휴로 오픈한다는 말이 너무 서글퍼서 어쩔 수가 없었다. 파리도 날아가다 잠들만큼 지루한 식당 안에서 아저씨는 반쯤 누은 자세로 웃찾사를 본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브라운관에 어느 지점을 응시하다가 벌컥 소주 한 잔 마시고, 해장국을 뜨고.
꾸역꾸역 곡식을 채우고 나는 소주에 내 이름을 쓴다. 방년 스물 여덟, 만으로는 그보다 하나 아래. 무직에 백수에… 터져 나오는 배와 찌를듯이 솟구치는 과민증. 영화를 보면 항상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계속 조제와 헤어진 쓰네오처럼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조제가 잘 지내고 있을까? 요즘도 혼자 그렇게 생선을 구워서 먹고 있을까? 혹시 또 옆집 변태아저씨의 이상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지내지는 않을까? 정말 쓰네오와는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까? 가 떠올라 한참을 (속으로) 울펐다.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도 무사했다. 그리고 즐거웠다. 나는 눈물도 기쁘고 슬픔도 즐겁다.
교향악축제 & 선명비디오 아줌마
막내외숙모가 수원시향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고 있어서 언젠가 초대권이 생기면 좀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꽤나 오래전 일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갑자기 외숙모에게 연락이 왔다. 교향악축제에 초대권이 두장 있으니 친구랑 같이 오면 좋겠다고 말이다. 마침 축제의 피날레가 수원시향이었고 (사실 프로그램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지만) 간만에 외숙모도 뵐겸 해서 그러겠다고 말하곤 누구랑 같이가나 한참 고민했다. 처음엔 후배 몇 놈을 떠올렸는데 생각해보니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해서 말도 못꺼냈고 다음엔 널널한 친구들 몇에게 연락을 넣어봤으나 다들 이래저래 사정이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혼자 갔다. (<- 중요)
첫째, 안내하는 아가씨들이 댑따 예뻤다. (<- 제일 중요) 아 다음부터 이런 기회 있으면 자주 와야지 싶었고.
둘째,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이를테면, 나는 클래식 연주회는 일종의 고급예술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런 곳에 가는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교육 수준으로나 어느 수준 이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징징 짜는 애들을 데리고 온 아주머니나, 나처럼 청바지에 대충 아무거나 걸치 온 (백수로 보이는) 젊은이들이나, 심지어는 휴가중인 것으로 보이는 군복차림의 군바리 한 무리도 보였다. (연주 내내 과연 저들은 어떤 연유로 온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정장 차림의 그럴싸한 커플도 있었다.
셋째, 이 바닥에도 확실히 유명세라는게 있구나 하는걸 느꼈다. 첫번째 연주곡이었던 세자르 프랭크의 교향적 변주곡에 피아노 주자로 강충모씨가 참여했었는데, 이 사람이 꽤 유명한 모양이다. 여기저기 그에 관한 인터넷 기사를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가 나오자 일부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질러대는데 너무 웃겼다.
그렇게 첫 곡은 세자르 프랭크였고 나는 이 사람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너무 좋아하는데 (아마 몇년 동안 질리게 들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 교향곡은 왠지 모르게 지루했다. 그 다음은 부르크너 8번이었고 역시나 부르크너를 별로 안좋아해서 좀 지루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는 음악에 대해서 일관된 견해 같은걸 갖고 있는 것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곡은 재밌어야한다.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카타르시스… 뭐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다종다양하지만, 나는 어쨌든 재밌는 선율을 가지고 있는 곡이 좋다. 뒷통수를 치는 그런 선율 말이다. 부르크너때도 한참 지루해서 눈을 감고 감상하는 척 하면서 잠깐 잘까 하다가, 3악장이었나 갑자기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순간만큼은 재미있었다.
끝나서 외숙모 잠깐 뵙고 용돈 받고 (한참 이제 돈 안주셔도 된다고 하다가 요즘엔 용돈 준다 하시면 그냥 받는다. 사양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서…) 공연보러 온 사돈어르신 차를 얻어타고 집에 왔다.
아 여기서도 참 신기하고 멋진 일이 있었는데, 사돈어르신 친구분 두 분이 함께 오셨더랬다. 그분들은 지하철 타신다고 해서 어르신이 그 근처까지 차로 바래다 주고 있는데 차 안에서 그분들 나누는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참고로 다들 일흔은 넘기셨다.
“니 예전에 내가 가르쳐준 고전음악 사이트 자주 들어가나?”
“아.. 그 뭐꼬, 무.. 어쩌구 그기 말이가?”
“그래. 그기 좋은 음악 많다.”
“아 그나?”
“내 집에 받아 놓은 것도 다 그기서 받은거 아이가.”
“아 그나?”
“한 백곡 된다.”
“테이프에 아님 씨디에?”
“하드에 다운받았다.”
“그기 용량 꽤 될텐데.”
“아이다 얼마 안된다. 한 2기가바이트…”
“그럼 엠피쓰리에도 들어가겠네?”
“하모!”
일흔 넘으신 분들이다. 나도 없는 엠피쓰리를… 아무튼 그분들 대화 엿들으면서 참 재밌었다.
정말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언제든지 배우려고, 내 안에 무언가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면 영원히 청년이 된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 지하철에 관한 것이다.
“내는 지하철 타면 경로석 거기 안앉는다.”
“오.. 왜?”
“지하철도 꽁짜로 타는데 미안하게스리 우째 앉노? 그리고 요즘 젊은 아들이 우리보다 더 피곤하다 아이가.”
“맞다, 인나라 카기도 미안시럽더라.”
“이제 우리 나이 되모 자가용 타고 댕겨야제 지하철 타고 댕기면서 앉고 그럼 미안해서 몬쓴다.”
전혀 비꼬는 투가 아니었고 스스럼없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피곤하면 계속 앉아서 가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집에 다 와서 슈퍼에서 간식이나 좀 사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돌아봤더니, 중학교때부터 군 제대할때까지 대왕 단골이었던 동네 비디오가게 아줌마였다. 제대하고 난 다음에 장사가 잘 안되어서 가게 그만두었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정말 반갑더라. 잘 지내시냐고, 요즘 뭐하시냐고 묻다가 “야.. 나는 니네 무서워서 요즘엔 동네에서 술도 못먹는다.” 하는게 아닌가. “왜요?” 했더니 “코 찔찔 흘리면서 비디오 빌려가던 녀석들이 이제 길거리에서 만나면 애아빠라고 그러니.. 으으으”. 나는 그만 너무 웃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한살도 안먹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열서너살인가를 한꺼번에 먹고 말았다.
아 더 쓰기 구찬다. 오늘 일 보고 끝!
너무 좋은 시간
여섯시 십이분. 요즘엔 꽤 일찍 잠이 드는데 (보통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오늘은 뭐 한다고 아직까지 깨어 있다.
방금 일을 다 마쳤고 틀어 놓은 윈앰프에서 랜덤으로 Kings of Convenience의 Love is no big truth(베를린 공연 실황)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참 고소하다.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드는 아득한 보컬. 시퍼렇고 고요한 새벽에 비스킷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몇달만에 참 충실하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다. 달깍거리는 키보드의 느낌도 좋다.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Kings of Convenience는 제작년인가 누구의 부탁으로 찾게 된 그룹인데, 그야말로 (누구의 표현을 빌자면) 올 해의 발견 (물론 제작년) 에 해당하는 멋진 그룹이다. 그러나저러나 그 사람하고 연락을 못한지가 꽤 되었구나. 잘 지내고 있지요?
작년의 발견은 톰 맥레이였다. 애초에는 The boy with the bubblegun 으로 알게 되었는데, 더 찾아보다가 다른 곡들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음악 이야기를 하는건 정말 즐겁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할 자신이 있다.
정말 올 해의 발견은 아직 없는데, The Czars 같은 경우는 중간에 낀 어정쩡한 것이 되어서 분명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정이 가질 않는다.
정말 좋아하는 그룹이나 노래가 있다면 코멘트로 좀 소개해주지 않겠어요? 트랙백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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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KOC 얘네들 콘서트 정말 못함. 듣다가 한참을 웃겨 죽는 줄 알았음.
연둣빛
일이 있어서 선릉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책을 살 필요가 있어, 강남에서 내려 좀 걸었습니다. (강남 교보문고) 가다가 사거리에 서 있는 나무가 참 연둣빛이어서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이날은 바람이 쏟아지듯이 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죠. 삼십만년 전에는 보통 부는 바람이 이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유행은, 바다 건너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 온 사람들을 자기 집에 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만, 그때만해도 외국인은 곧 외계인이었거든요. 그러고보니 한 번은 제 집에 게오르그 미쉘이라는 유럽인이 묵은 적이 있는데… 에, 네. 뭐 그만 하죠.
오늘 면접보다가 stored procedure를 할 줄 아냐고 해서 잘 모른다고 했더니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레퍼런스를 보고 있습니다. 모르면 배워야죠. 배우는 것은 내게 결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 이상 없데
한참을 떠들다가 이게 아니다 싶었는데 크게 문제될게 없다고 해서 그럼 그렇지 했지.
그런데 의사가 파란색 알약을 주더라. 자기 전에 두알씩 먹고 자라고.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한테 줬던 약 가운데 네오는 무슨 색 약을 먹었지?
한가지 말 안한게 있어.
싫은 것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는 의사가 너무 싫었어.
아픈 계절
한때 내게도, 네게도 날개가 있었지
강철같이 따스한 파도
여명이 내린 남국의 해변
광분하는 풀씨앗
이제 봄이야, 하고 말하던 그 손.
–>
아주 긴 긴 시간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눅신한 근육이 남은 자에게 훈장처럼 수여되면
그래도 봄은 춥다는 말일게다.
–>
드문드문 퍼 올려지듯이 기절 상태에서 벗어나면 환하게 빛나는 커튼이 보였습니다. 꿈 속에서는 잊기로 했던 일들이 리와인드 되고 있었고 내가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커튼을 보고 있으면 온 몸에 열꽃이 피어났겠지요. 아직은 춥더군요, 아직은 봄인지 겨울인지 입이 바싹 마르고.
돌아오면서 나는 몇가지 이야기를 생각해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신발이 발에 혹은 발이 신발에 맞지 않게 된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깁니다. 다른건 멀쩡한 가로등을 고장나도록 수리하는 엉뚱한 가로등 수리공에 관한 이야기고…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보니 어쩐지 다 내 얘기라서, 아 나는 도무지 나를 벗어날 수 없구나 했습니다.
저녁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밥을 먹고 약을 좀 먹고 다시 누울때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감기에 걸렸나봅니다. 몸의 경계가 희미해요. 내가 나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서투르게 변했습니다. 또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허리도 아프고.
지금은 계속 아프리카 누나의 그 해먹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제 멋대로 변형한 내용이긴 하지만, 바닷물을 연료 삼아 뻘겋게 불타오르는 수평선까지 우리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겠지요. 누구도 놓치지 않게 단단히 두 손을 엮어 쥐고서는.
출근하는 너의 뒷모습
나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어. 내 옆에서는 네가 곤히 잠들어 있었고, 계속 희부윰한 음영 아래서 그 모습을 지켜봤지. 얼굴을 만지고 싶었는데 네가 깰 것 같아서 말야, 너는 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잖아. 나같은 백수하고는 상황이 다르니까. 아마도 너를 만지고 싶다는 것과 네게 해줄 수 있는 것 사이에서 가장 훌륭한 절충안은 그냥 그렇게 지켜보는 것 뿐이었을꺼야. 꿈을 꾸고 있을까… 근사하지 않아? 적어도 네가 잠든 시간에 나는 깨어 있고 너를 바라보고 있어. 숨이 콱 막힐 만큼 아름다운 시간이야. 그런데 너 코를 좀 골더라구. 하지만 그것도 너무 귀여웠어.
갑자기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해줘서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지? 너의 작고 아담한 원룸, 약간의 알콜과 음악. 따뜻한 포옹과… 닭찜을 시킨건 사실 좀 무리였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모든 것들이 정말 멋진 시간을 만들어냈잖아. 나는 네 화장품 냄새가 참 좋아. 씻은 뒤에 그 옅은 살깣의 냄새도 좋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 네가 처음인 것 같아.”
“생각해보면 우리 지금까지 참 너무 외롭게 살았던 것 같아. 아무리 옛 일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아.”
“인생을 너무 낭비한게 아닐까?”
네가 참 좋아.
“나도 네가 좋아. 내가 널 치료해줄꺼야.”
나도 널 치료해줄꺼야.
“주말에 어딘가로 여행이나 갈까?”
좋지.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나도 가고 싶어.
“너는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니?”
강릉.
“바다?”
응. 있지, 가서 아주 찐득하게 사랑하는거야. 찐득하게 이야기하고, 아주 긴 이야기…
아침에 일어나서, 사실 나는 그때 조금 깨어 있었는데, 그냥 일부러 자는 척 했어. 내가 없을때 너는 어떻게 출근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까 엿보고 싶었거든. 작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네가 샤워를 하고 어제 널어 놓은 빨래감을 만져보다가 다 마른 것들만 따로 곱게 개어 놓고 나를 위해 밥을 준비하고 옷을 입고 (네가 옷을 입는 모습은 최고였어!) 방안을 둘러보다가 결심했다는 듯이 신발을 신은 다음 문을 열고 나가는 것까지 다 엿봤어. 눈물이 났지. 튼튼하게 자기 삶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내게는 그야말로 신비야. 어쩜 그렇게도 당당할 수가 있을까. 어쩜 그렇게도 강할 수가 있을까.
지금 나는 느즈막히 일어나 네 컴퓨터를 켜고 이 글을 쓰고 있어. 내 옆에는 내가 다시 다 마른 빨래감은 따로 개어 놓고 아직도 마르지 않은 것들은 그대로 널어 놓은 것들이 있어. 그 중엔 네 속옷도 있는데, 의외로 대담한 것이어서 깜작 놀랐지만 다음 번에는 이걸 입은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
이제 갈께. 미안하지만 설겆이는 도저히 못해놓고 가겠다.
너의 출근하는 뒷모습은 정말 최고였어.
김원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황사 폭풍
아홉시 뉴스를 보다가 중국으로부터 시작 (정확하게는 몽고) 된 황사가 심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면서 중국 베이징, 인가 어딘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황사가 도가 지나쳐 대낮에 깊은 밤을 가져왔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같은 모래 폭풍이 도시를 휘감았다. 대낮인데도 가로등 불빛이 겨우 발치를 비춘다.
황사는 이렇게 매년 더 심해질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점점 더 사막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심하게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사막히 세계를 뒤덮지 않기를 바랬다. 밥을 먹다가 모래가 씹히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 무슨 심리검사를 했다. 어머니가 자주 다니는 신경정신관가 뭔가에서 받아 온 거라고 했다. 비싼거니 공들여 하라고 하시는데, 이 검사 입대 전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하면서 받아 본 기억이 있다. 아마 이 결과에 따라서 무언가 치료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디까지나 아직은 정상이길 바라고 있다. 약이 그 어떤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꺼라고 어머니는 굳게 믿고 있다. 내 삶이 질병이라면, 도저히 그렇게라도 치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거나. 그러나 저러나 나는 이미 병무청에서 받았던 그 검사의 결과로, 군의관이 나를 따로 불러 심각하게 보충역 판정을 줄 수도 있다는 언질을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결과가 조금 이상하게 나왔어. 4급 줄 수 있는데, (아마 4급이면 공익이거나 상근으로 가게 되었다.) 어떻게 할래? 넷! 그냥 입대하겠습니다. 그리고서, 나는 2년 2개월 동안 무사히 잘 지냈다.
날이 더워지긴 더워지는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땀을 많이 흘려서 온 몸이 끈적해지고, 밥을 먹으면 속에서 열이 올라온다. 그래서 자꾸 의미없이 샤워만 한다 샤워만… 하늘에 별이 없다. 별, 하니까 며칠 전에 다시 꺼내 본 영화 Contact가 떠오른다. 만약 이 우주에 우리 밖에 없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낭비 아냐? 차라리 그건 너무 외로운 것 아니냐고 하지… 그러니까 어떤 種적인 외로움 말이다. 대화 가능한 지성체가 전 우주에 인간밖에 없다는 것. 생각하면 너무 슬프다.
안녕, 안녕..
지능 상승
rpg 게임을 하다 보면 자신의 아바타가 레벨-업을 할 경우에 보너스 포인트가 주어지는데, 일반적으로 매우 개략화된 인간의 특성 (힘, 민첩성, 체력, 지능, 정신력 등등) 을 보너스 포인트가 허락하는 한 원하는 대로 올릴 수가 있다. 이로 인해서 아바타는 전에는 착용하지 못했던 장비들을 착용 한다거나 행동이 이전보다 기민해졌다거나 하기도 하는데, 현실에서의 인간도 레벨-업 할 경우에 이런 식으로 특성값들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요즘 내가 예의 레벨-업을 해서 (과연 뭘 해서?) 지능의 특성값이 대폭 상승한 것인지, 이전에는 머리를 싸매고 매진해야 했던 작업들을 한큐에 완료할 수가 있다. 말 그대로 보인다. 마치 언덕 위에 오른 느낌. 그런데 레벨-업 운운한건 그냥 농담이고 아마 의도하지 않은 여유가 넘처 흘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 황당하게 끝나버린 일들이 많아서 조금 허전하기도 하다. 원래 이런건 끙끙대며 해결해야 제맛인데.
첫 문단의 마지막 줄에 이어서, 음, 만약 정말 그런게 존재한다면 나는 매 레벨-업마다 지능만 올리고 싶다. 물리적인 특성들이야 관심도 없고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그런 특성은 전혀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군대에서 좋은 인상을 주려고 최대한 열심히 뛰었던 첫 축구게임 뒤에 고참들이 ‘너 다음부터 축구한다고 하면 죽는다.’ 라고 해서 오히려 감사했던 적이 있을 정도니…) 지능이 높다면 참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기야 요즘엔 똑똑한게 최고니까, 이를테면 무한경쟁시대에 매우 유리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정보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지식정보가 집중된 인간이 유리하다. 자본사회에서는 자본이 그렇고, 수렵과 채집의 사회에서는 수렵 채집을 잘하는 인간이 그렇듯이. 그러나 이제 누구나 인터넷에 접근 가능해진 때에는 더 이상 지식정보를 “소유”한 인간이 아닌 매우 그럴듯하게 “가공, 정리”하는 인간이 보다 유리할 것이다. 의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아직 공유되지 않은 정보는 공유한 개인들에게만 가치가 있을 뿐이지, 집단적으로 보면 쓰레기일 뿐이다. 이런 모토, “공유되지 않은 정보는 가치가 없다. / 링크되지 않은 페이지는 무의미하다. / 그래서, 너는 어디에 링크될껀데?” 등등이 힘을 가진다. 매사에 좀 더 뭉뚱그려 보아야 한다. 개체가 아닌 집단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디테일한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보다 차라리 어떤 경향적인 것들, 전체가 흔들리는 움직임들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북마크는 사라질 것이고 검색엔진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된다. (예언) 나는 습관적으로 웹주소들을 외우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다음”이나 “네이버”등을 검색엔진으로 검색해서 방문하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건 우리 엄마) 그런데 그게 맞다. 주소를 외우는 것은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대량생산된 정보-페이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검색엔진이 더 이상 잡아내지 못하므로 중요한 것들은 스크랩해둬야 한다는 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말하자면, 정말 어쩌면 노동조차도 우리에겐 너무 디테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다. 나는 우리가 좀 더 다른 것들을 보았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우리 모두가 확 바뀌어서 대립과 반목이 있던 자리에 여유와 평화가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맨날 행복해지도록 노력만 했지 한번이라도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한 불쌍한 우리는 되지 말자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선배처럼 과감하게 행복은 사기다, 라고 선언하는 것도 좋고.
뭐 말도 안되는 얘기만 계속했다.
나는 다시 일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