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에릭 크립튼의 하이드 파크 공연 실황 가운데 “그래 내가 보안관을 쐈다.”를 들으면 피가 끓는다. 목구멍으로부터 간질간질하니 까끌한 욕설같은게 튀어나오려고 발악을 한다. 왠지는 잘 모르겠다. 가사 가운데 “내가 쏜건 보안관이지 보안관 대리 따위가 아냐” 라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이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쏘려면 보안관 정도는 쏴야 하는거 아닌가. 같은 교수형이라면 차라리 보안관 살해죄로 죽는게 낫지, 안그래? 아님 말고.

아무튼 요즘 상황이 좀 그렇다. 크게 한 건 하고 잠적할까 하고 생각중이다. 그리고 이 잠적은 아마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가 잠적하면 슬퍼할 많은 팬들이 있기에. 여러분 정말 사랑해요. 내 입에서 이런 고백이 쑥스럼 없이 튀어 나올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네. 아님 말고.

내가 없어도 다들 잘 살고.. 내가 없어도 너는 어제와 같고. (아마) 나에게도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다. 검은 현무암이거나, 겠지. 그정도가 딱 좋다. 검은 현무암. 서사모아 제도 같은데서 지구 생성부터 지구가 폭발할때까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는 그런 현무암 말이다. 파도에 녹기도 하고 바람에 쓸리기도 하면서 차츰 키가 줄어드는 나는야 검은 현무암(이 되고 싶다). 아님 말고.

오늘 하루

잘 지냈니. 마침 비가 오는구나. 슬슬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고 웹브라우져를 닫기 전에 막 발견한 바람의 목소리 어쩌구 하는 음악을 듣는다. 비가 내리고 바람의 목소리. 강철로 된 방충망에 슬피 달린 빗방울들도 있다. 없는게 있다면 담배, 아까 퇴근하면서 담배를 사려고 했는데 그만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사질 못해서, 가 없고 또 네가 없지. 컵에 받아 놓은, 그젠가 혹은 그 이상 전날인가에 마시려고 떠 놓은 물을 마신다. 그래도 괜찮다. 육신이 피곤하면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아지는 법이다.

아니지.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니고, 효진누님이 며칠 전에 잠깐 깨어나서 네가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 하시고 다시 눈을 감더라. 나는 그냥 ‘네 누님. 준영이 잠깐 뭐 사러 나갔어요. 곧 돌아올꺼에요.’ 하고 말았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누님은 다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준영이가 참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하셨고.

노래가 바뀌었다. 슬픈 바람의 노래, 혹은 바람의 슬픈 노래. 거 왜 있잖아. 군대에서 야간행군 정신없이 하다가 불빛 하나 없는 숲길을 앞사람 다리만 보면서 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환청이 들리는거. 그게 가끔은 북한에서 들려주는 자장가이기도 했고 여우인가 뭔가가 우는 소리이기도 했고 더러는 고참의 욕설이거나 누군가 몰래 듣고 있는 라디오방송이기도 했던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뭐였을까?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이 혹시나 네게 그런 식으로, 슬픈 바람이거나 노래를 타고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너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고 말겠지만.

아무튼 뭘 하고 돌아다니든 잘 지내고 있음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부디 누님 돌아가시기 전에라도 꼭 한 번 서울 들렸으면 좋겠다. 나나, 명철이 윤형이한테 얼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냥 누님 손이라도 한 번 몰래 잡고 다시 사라져도 좋으니.

밤이 깊고, 이젠 정말 자야겠다. 비가 오는데 혹여나 네 놈 잘 곳을 정하지 못해 멀뚱히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빗줄기나 쳐다보고 있지 않은지…

이만 줄인다.

다시 여름

무사히 또 여름을 잘 버텨내고 있는지. 서울에서 몇 자 적는다.

말도 없이 네가 사라진 때부터 벌써 몇 해가 지났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반쯤은 그럴듯한 변명이라고 자위하면서 안부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명식이하고 소주 한 잔 하면서 갑자기 네 이야기가 튀어나와 조금 어색했다. 명식이 녀석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것 같더라. 네 이름 넉자가 튀어나오니까 안절부절 못하더니 급기야는 서럽게 울기도 했고. 나는 우리 셋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참을 옆에서 담배를 피워댔지. 그래도 명식이 착한거 알잖아. 끝내 네 원망 한마디 않고, 마지막에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씩씩하게 소주 두 병을 싹싹 비워냈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 명식이가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한달에 한 번 통원치료를 받아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옆에서 순애가 고생 많이 했지. 그래도 가장 큰 건 명식이 자식이 갖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덕택이 아니었나 싶다. 너도 알지? 그 녀석 고래 심줄같이 굵은 정신을 갖고 있는거. 대신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방비상태이긴 하지만. 물론 우리가 셋이었을 때 네가 명식이에게 들려줬던 많은 이야기도 녀석에게 도움이 되었을꺼라고 믿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사귀던 아가씨는 다시 고이 접어 원래 있던 장소에 잘 되돌려 주었다. 올 해 늦가을 쯤 명식이하고 순애는 드디어 결혼하게 될 것 같고, 경준이형은 여전히 재판중이고… 다들 죽어도 이 악물고 다시 살아내고 있다.

아무튼 명식이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널 다시 만나게 되는 상상을 몇 번 했는데 잘 되질 않아서 그냥 그러고 있는 중. 네놈은 여전히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겠지. 그렇게 바라던 생명같은 연애는 성공했는지, 술밤에 달 한 잔 하는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싱숭생숭해지는 늦은 밤.

자, 나는 내일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할 몸.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편지 적고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넣고, 제발 이 편지가 수취인불명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이후 (After)

곧게, 가끔은 얼룩진 것처럼 구불텅한 짙은 숲 사잇길을 쉬엄쉬엄 걸어 나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연못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 연못을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대체 짙은 숲은 어디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정말 거기 있는 것들이니까. 나이만큼 수그려진 고개와 어깨로 두어번 긴 숨을 내쉬다가, 작정하고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것들은 거기 있다. 그리고 대체로 일년에 두어번 연못의 수면이 모든 빛을 머금고 반사를 포기할 때가 있는데 만약 당신이 그 연못을 방문했을때가 그때라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수면에 반사하는 하늘의 구름이며, 숲의 음영들로 인해 연못 아래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마법같은 우연으로 수면반사가 멈춘 날에는 오히려 공기보다 더 투명하게 그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물은 다이아몬드처럼 시리게, 썩어가는 나뭇잎은 깊은 시간의 색으로 바래지고 당신 가슴의 출렁임에 맞춰 수면이 작게 흔들리면, 거기 당신, 무엇이 보이지? 나는 시체들이 보여. 하얗게 눈을 뜨고 미동도 없이 정지한 사람들. 언젠가 한번씩은 대면했던 이들. 과거는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미래는 아직도 당도하지 않은 희부윰한 새벽에 조금씩 가벼워지는 세계.

이 망상을 떨칠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이후에.

이상한 꿈

첫번째 꿈은 월드컵 토고전이 있던 날이었나, 그날 뭔가로 인해 심히 의기소침해 있던 과장님을 꼬드겨 비교적 일찍 퇴근을 하고 저녁 겸 반주 해서 각자 소주 한 병씩 마시고 또 맥주를 몇 병인가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월드컵 경기를 미쳐 다 보지 못하고 잤던, 기분 참 싱숭생숭했던 날 밤에 꿨던 꿈이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부는 강풍에 떨어진 간판을 맞는 기분으로 우울하게 그 분의 부고를 들었고 꿈 속이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으며 아침이 되어 핸드폰 알람에 맞춰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고, 두번째 꿈은 그 뒤로 며칠이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 잔업에 한참을 또 시달리다 억지로 청한 잠 속에서 옛 애인이 나타나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표정이 어색해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었다가, 뒤늦게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찾아 온 후배가 슬쩍 나를 불러 한다는 얘기가 형 누나 이미 결혼했어요 하는데 그만 또 나는 마음이 미어지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눈에서 나는 눈물은 거짓이라. 사실 눈물은 부어 오르는 목구멍에서 나는 것이고 덜컹 내려 앉는 심장에서 나는 것이며, 때로는 이야기 하는 입에서 또 때로는 글을 쓰는 손 끝에서 나는 것이라. 삐걱삐걱 흔들리는, 하루에 단 두번만 운행한다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버스에 두고 내린 손가방, 그리고 그 안에 넣어 두었던 잊고 싶은 것들을 적은 쪽지가 변덕스럽게 후회가 되어 한참을 뛰어가며 소리지르고 제발 좀 세워달라고 그 안에 두고 내린 것이 있다고 해도 버스는 나를 위해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런데 우리가 또, 아니 내가 또 언제는 현재의 것을 소중히 여겼던 적이 있는가. 현재는 인식하는 순간 과거, 였었고 그래서 내 아끼는 마음은 언제나 후회형의 것들.

아주 먼 훗날에, 혹은 아주 먼 과거에 우리는 때때로 블랙홀과 마주쳤다. 그 중심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불길한 중력들에 발생한 기조력이 우리를 길게 잡아 찢을 것이다.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깝게 말이다. 슬프냐고, 아프지 않냐고 묻지는 마시길.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먼 곳은 아주 멀게, 가까운 곳은 아주 가까운 상태로 말이다.

하늘 맑음

비온 뒤 갬. 적정 노출에서 한 두스탑 정도 낮추고 찍어야 나올 것 같은 짙은 파랑. 하얗고, 또는 회색인 구름들. 정오가 되어도 어쩐지 태양빛이 인공의 것 같다. 열기가 없이 눈꺼플에만 맴돌다 떨어진다. 바람이 분다.

압정에다 정신을 박고 천정에 고정시키지. 가끔 눈가에 누군가 어른거리는 환상이 보여. 정말 난 아무래도 괜찮아. 라고 했던 말 때문에 벌을 받는거야.

태엽감는 사람

다시 대구. 발바닥 쯤인가, 오년 전엔 그게 겨드랑이에 있었지, 하는 태엽을 누군가 되감아 놓고 나는 삐꺽삐꺽 움직인다. 마음은 가라앉는데 마감일정은 그 반대로 분주히 가속한다. 사람이 사는 곳, 그 어디에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펄펄 끓는 질척한 아스팔트 위 아지랭이는, 하지만 아주 가벼웁게 흔들리며 꼭 무언가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고 속삭여 준다. 하얀 뇌가 뚝뚝 녹아 흐른다. 심장은 에어컨 바람에 꽝꽝 얼어가는데도. 그럼 안녕,

하고 또 내일을 기다리고.

서울

올라오는 길은 술취한 등산객들과 멀미난 아이의 토악질과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간장독의 진한 냄새같은 퀴퀴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동에서 멀어질수록 서울은 가까워졌겠지만,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샛길로 빠져나가 발광하는 초록 능선들을 헤매었다. 드문드문 산이 떨어지는 곳에 집들이 몇 개 서 있었고 그때마다 몇 개의 생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잠깐, 기형도의 감회가 느껴졌달까. 죽은 자들, 죽어가는 자들은 정말 국토에 깊었다.

여덟시가 넘어도 밖은 훤했지만 어두워지기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떤 예감같은게 서늘히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제서야 네가 당도한 곳이 이곳으로부터 이억만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모든게

잠깐 머물다 떨어진다.

출장중

안동에 내려와 있다. 지급받은, 생에 첫 노트북으로 글을 써본다. 키보드가 무르다. 점심 뒤 밀려오는 2B연필같은 피로감이 발목에 찰랑인다. 여기는 안동이다. 도산서원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러 계단으로 나갔다. 높은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안동. 서울의 가장 한적한 동네 조차도 이곳보다는 매우 소란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까무라칠 정도로 깊숙한 열기가 시내 위를 무겁게 내리 누른다. 움직임이 없는 도시. 간혹 살랑이는 바람 없이는, 나는 도저히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늙은 개 같은 도시. 저쪽에 하나, 또 저쪽에 하나. 도처에 웅크리고 있는 불온함들. 사람들은 매우 적대적이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이 도시의 숨죽인 적의에 비하면.

주의. 안동에 내려 올때, 특히 여름이 시작되려는 때에는 항상 여분의 심장을 준비하시오.

맹렬한 허기

발을 씻어도 씻어도 무좀인가 습진은 계속 퍼진다. (네 알아요 알아. 왜 이러는지. 그러니까 그럴땐 어떻게.. 하는 조언은 노땡큐)

얼마전부터 카메라에 광각렌즈 대신 망원렌즈를 물려 놓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좁은 시야만큼 깊숙하게 찌른다. 내가 카메라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뷰파인더나 LCD, 혹은 그 이상의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모든 상이 육안과는 다르게 왜곡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마치 한번 발 담근 강물에 다시 발 담글 수 없다는 격언같았다. 너희는 결코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처음으로 이런 저주를 인간에게 내렸다. 나는 그게 아주 멋진 저주라고 생각한다. (이놈의 빌어먹을 영어식 말투, I think…) 혹은 그건 아주 멋진 저주였다. 모든게 미묘하게 다르다. 나는 평생동안 영어를 공부해도 영어를 모를 것이며, 태국어도 그렇다. 심지어 내가 보는 것조차도 다르다. 아무튼 카메라를 다루며 그런 생각을 했다. 광각은, 누군가 그랬듯이 인간의 판단 가능함을 뛰어 넘은 세계라고. 육안의 시야율은 의외로 굉장히 좁다. 어안(Fish-Eye)쪽으로 가면 더욱 점입가경이다. 그리고 내게 냉정히 묻는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고.

망원은 이와는 반대로 인간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작은 것들이 더 작은 것들로 균열한다. 그것이 몇차례 반복되다 보면 한동안 이런 미시세계와 내가 살고 있다고 믿는 이 세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기나 한걸까 하면서 심란해진다. 그리고 내게 냉정히 말한다. 웃기지 말라고.

그래 웃기지 말아야지. 웃기게 살지 말아야지. 한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한참 모자라고, 내게 핀잔을 주는 것들은 모두 나의 좋은 스승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