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라오는 길은 술취한 등산객들과 멀미난 아이의 토악질과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간장독의 진한 냄새같은 퀴퀴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동에서 멀어질수록 서울은 가까워졌겠지만,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샛길로 빠져나가 발광하는 초록 능선들을 헤매었다. 드문드문 산이 떨어지는 곳에 집들이 몇 개 서 있었고 그때마다 몇 개의 생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잠깐, 기형도의 감회가 느껴졌달까. 죽은 자들, 죽어가는 자들은 정말 국토에 깊었다.

여덟시가 넘어도 밖은 훤했지만 어두워지기전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떤 예감같은게 서늘히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제서야 네가 당도한 곳이 이곳으로부터 이억만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모든게

잠깐 머물다 떨어진다.

518

작년이었던가.. 그 날이 5월 18일인줄도 모르고 하루가 지나서야 깨닫고는 나조차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올 해엔 그나마 일주일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좀 낫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년엔 광주라도 내려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가게 된다면.. 생에 두번째 찾는 광주가 될 것이다.
첫번째 방문은, 좀 이상한 일을 겪기도 했던 환경현장활동에서 이뤄졌다. 영광으로 갔었는데, 가는 길에 잠깐 금남로를 들렀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2002년 일이니까 뭐.
광주, 하면 난 이상하게도 기형도가 떠오르는데, 기형도 전집에 보면 짧은 여행의 기록의 경유지, 광주 망월동 묘역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 사진에서 기형도는 무언가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다. 역광을 피하기 위해서 태양을 바라보고 사진을 (그러니까 소외 말하는 셀카) 찍어서 그런거겠지.
그는

“그곳은 십자가로 만든 땅인가, 넋들 위에 솟아난 도시인가. 나는 아무런 감정도 예감도 없이 무등(無等)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광주행에 앞서 밝힌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1년 전이지요. 7월 5일이에요. 3남매 중 큰아들이지요.” 한열이 어머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나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멋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과 너무 흡사했고, 그것은 감상도 계시도 아니었다. 망월동 공원 묘지 제 3묘원은 찌는 듯이 무더웠고 그것은 고의적인 형벌 같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묘원의 인상만 자신없이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교차로에 있는 이곳 충금 다방에서 광주와의 첫 만남을 적는다.

다모레스크의 검. 적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졌다. 너무나도 날카로워 만나는 상대마다 상처를 입히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귀신의 검.
그러나 우리는 항상 적보다 많다. 언제까지나 많을 것이다. 다모레스크의 검이 우리를 찔러 피가 흐르게 해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검이 지쳐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찌를때 까지도 많을 것이다.
적은 항상 이겨야 하지만, 우리는 한번만 이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