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

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다른 사람들 몰래 살짝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과장님이 지나가며 어깨를 툭 치고 가는 통에 화들짝 깼는데, 얼마나 침을 흘리며 잤는지 입가에 흰 자국이 가득하더라. 옆자리 윤경씨는 내가 그 상태가 될때까지 혼자 킥킥대며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과장님이 지나간 다음엔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다가 결국은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말더라구. 아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한참을 거울을 쳐다보며 빙긋빙긋 웃었다. 왜냐하면, 그 짧은 낮잠 시간에 꿈을 꾸었거든. 어느 무료한 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는데, 글쎄 그게 네 전화지 뭐니. ‘형, 뭐헙니까. 내 지금 화곡동인데 배고파 죽것소. 얼렁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사주소.’ 하면, 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아, 네, 네. 지금 당장 달려갑죠.’ 하고 과장님 한테는 거래처에서 급하게 날 찾는다고 뻥치고선 화곡동으로 달려가는거지. 아, 냄새가 어찌 나던지 순대국 하나 얼른 사주고 근처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기는데, 등을 미는 동안 구역질이 나서 아주 혼났다. 완전 구렁이 수준이야. 너는 엄살피우면서 ‘형, 나 등 아파. 살살 밀어.’ 하면, 또 나는 손자국 나게 등을 한 대 때리면서 ‘다 큰 놈 자식이 이게 뭐가 아프다고 엄살이야.’ 하는거지.

꿈이고 뭐고 잘 안믿는 성격이지만서도, 간만에 네 소식 전해 들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네 생각에 일은 손에 안잡히고 해서 몰래 휴게실 구석에서 네게 편지를 쓴다. 우리 애 한참 못봤지?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간단다. 현경이는 벌써부터 무슨 조기 교육인가 뭔가 시킨다고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내 얇은 월급봉투 보고 한숨 내쉬는 처지지만, 언제는 우리가 부유해서 행복했더냐. 함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던거지.
동훈이는 미국에 거 뭐시냐 무슨 좋은 대학교 닥터 한다고 준비하더니 그게 잘 안된 모양이고. 동훈이 처만 맨날 내게 전화해서 자기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내가 언제 한 번 동훈이 불러다가 이야기를 해야겠어. 까짓꺼 닥터야 나중에 해도 하는거고 먼저 가정을 챙겨야하는거 아니겠니. 지네 아부지가 물려준 재산이 꽤 된다지만 그것도 까먹다 보면 금방이잖아. 요즘엔 동훈이 처가 이것저것 많이 살림을 줄이는 것 같더라. 불쌍하고 고맙기도 하지. 나는 사실 동훈이 이놈보다는 동훈이 처가 더 살갑고 좋다.
참, 너 철민이형 기억나지?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우리 학생회실에서 거지처럼 살고 있으면 찾아와서 국밥에 소주 사주던 형. 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형 보안법으로 끌려가서 계속 재판을 받았거든. 이래저래 십년도 한참 넘으면서 질질 끌었는데, 그 재판 드디어 무혐의가 되어서 이번에 나오게 되었단다. 법대 민규가 철민이형 재판중에 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되어서, 사실은 민규가 정말 고생했지, 가망없는 그 싸움 묵묵히 혼자서 다 끌고 결국엔 이겨버렸으니까. 시퍼렇게 젊은 놈이 재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벌써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이 되었단다. 며칠전에 민규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어깨 두드려 주는게 결국 그놈 울컥하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그러더라. ‘형, 내가 왜 이 좃같은 대한민국에서 변호사질 하려고 그렇게 이 악물었는지 알아요? 철민이형이 너무 불쌍해서, 철민이형 내 손으로 변호해주고 싶어서 변호사 됐어요. 나 방세도 밥값도 없이 친구 하숙방 전전할때 철민이형이 어느 날은 오만원, 어느 날은 이만원 그렇게 쥐어주는거야. 자기도 거지같이 다니는 주제에 뭔 돈인가 싶었는데, 그게 글쎄 가끔 투쟁 없는 날에 공사판에 가서 벌어 온 돈 나한테 다 줬던거에요…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아.’

이놈아,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면 그 다음날 발목이 시큰거려서 자주는 못나가지만서도, 이제 신문보다 인터넷 만화 보면서 낄낄대는게 하루 낙이지만서도… 그래도 언젠가 돌아올 너 기다리면서 우리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네가 언젠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지? 네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 ‘생활투쟁’해야한다고.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이어야 한다고.

에고 과장님이 휴게실 밖에서 나한테 손가락질 하고 있어. 얼른 마저 쓰고 퇴근준비 해야겠다. 오늘은 무척 춥더라. 이 편지는 일단 내 우체통 서랍에 넣어 둘께. 돌아 오면 몽창 다 모아서 한아름 안겨줘야지.

이만 총총.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이 raw-data의 형태로 서로에게 전해지는 세상을 떠올려보자. 물리적인 발화는 목적를 잃고 세계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오히려 진화하여 서로는 서로에게 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고 해서, 그러나, 다툼과 증오, 질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타협해야 할 부분들이 남아있다. 완전한 의미의 전달이 곧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심지어 우리는 불완전하기까지 하다.

몇번이고 말이 가지는 무서움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참혹한 곳인지, 문만 열면 날선 말들이 도산검림을 이루는 사회에 대해서 적으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적다 보면 내 말도 똑같이 비수같이 날카롭다는 느낌이 들어서 지우고, 또 쓰다가 지우고 그랬다. 완전한 소통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 두렵다.

애정과 사랑,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개인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평가하고 평가된다. 그 매개체는 말이다. 이건 가장 단순한 설명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내 사랑의 증거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해도, 네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매 순간 나는 평가된다. 평가되는 순간 말은 가지치기를 당하고 무한한 가능성들이 하나의 사실로 수렴된다. 평가되어 고정된 말은 발화되기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투고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토론하고 선전하고 외치고 웅변하고 호소해도,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말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의 계층 위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봤다. 그것은 권력이다. 너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 우위자는 항상 너일 수 밖에 없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너는 열리지 않는 신비고, 나는 그 숲을 탐색하는 여행자이다. 너는 조용히 세계 속에 흐르며 그 대지 위에 나를 가둔다. 나의 상상은 항상 네 대지 위에서만 가능하다.

검찰은 용산 참화의 원인이 시위 주동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말의 가공할 힘이다. 그것은 비가역적이다. 우리의 상상은 이제부터 계속 그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인풋보다 더 뛰어난 아웃풋은 불가능하다. 평가되는 순간 결과는 고정된다. 바뀔 수 없다. 어디에선가 ‘희망이 모조리 사라진 순간이 바로 절망이다.’라고 적었다. 인간은 절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전복하는 힘은 가능하지 않은 꿈꾸기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모순어다. 그것은 신을 넘어선다. 신은 결코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없지만, 인간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어. 나는 불가능한 것을 꿈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네가 날 사랑하는 것을 꿈꾸는거야.
거꾸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말이다, 모든 것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해야해.
말을 멈추는 순간 존재는 의미를 잃어버려.
사랑해, 라고 말하고
아니야, 라고 말하고
모두 부숴버리자, 라고 말하고
승리, 라고 말하고
네 냄새가 그리워, 라고 말하고
안녕, 하고 말하고

Please Call Home – Allman Brothers Band

* imeem이고 뭐고 간에 다들 저작권 때문에 링크가 죽어버려서 youtube에서 겨우 구한 공연실황을 첨부함.

집에 전화해 – 올맨 형제 밴드

떠나기 전에 얼굴 한번만 더 보자
자꾸 얼굴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혹시라도 내가 필요해지면, 알지?
그러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집에 전화해
난 괜찮으니까
날마다 이런 날이 올꺼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내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단다
떠나기 전에 이 말은 꼭 하고 싶어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집에 전화해
난 괜찮으니까
기억나, 너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걸 좋아했지
그러다가 길을 잃었고, 오 정말 그때는 웃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제 전화는 할 수 있으니까, 그럼 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께
그러면 안심이 되겠지
그러니 이제 가렴, 더 이상 말하지 않을께
마음이 쓰라린 만큼 문을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렴
마음이 바뀌면 꼭 집에 전화해
마음이 바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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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면서 계속 들은 노래.
가끔은 어떤게 마음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Allman Brothers Band는 말 그대로 Duane Allman과 Gregg Allman 두 형제가 의기투합해서 만든 밴드다. 1971년에 리더격인 Duane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고 나서 밴드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자세를 추스리고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롤링 스톤즈지의 조지 캠벨은 이 밴드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지난 5년 동안’ ‘최고로 졸라 멋진 락 앤 롤 밴드’라고 추켜세웠다.
라이벌격인 Lynyrd Skynyrd가 비운의 사고로 멤버 3명을 잃은 것에 비해 Allman Brothers Band는 Duane만을 잃었으니, 뭐 그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모르겠다. 왜 이리들 험하게 사는건지.
오토바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Duane에게 바치는 Lynyrd Skynyrd의 곡이 Freebird였다니 이건 몰랐다.

Allman Brothers Band는 여전히 활동중이며 Gregg도 여전히 러닝 멤버로 활약중이다.

* 우연히 검색하다가 보니 Lynyrd Skynyrd의 원년 멤버이자 키보드를 담당했던 빌리 파웰(Billy Powell)이 엊그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Rest in peace, Billy.

노르웨이의 숲

예전에 내가 자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어, 바꿔 말하자면 나와 자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던거지.
그녀는 내게 방을 보여주면서 근사하지 않냐고 물었어,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는 머물고 가라고 말하고선 아무데나 앉으라고 했지.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앉을 만 한 의자가 없더라구.
어쩔 수 없어 양탄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기다렸지.
그렇게 두시까지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거야.
“자러 갈 시간이에요.”
그녀는 아침이나 되어야 할 기분이 나겠다고 하면서 웃기 시작했어.
나는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하고 욕조 안으로 자러 들어갔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난 혼자였어.
새는 날아가버린거야.
그래서 모닥불을 피웠지.
근사하지 않아?
그녀는 이미 모든걸 알고 있었어.

* Norwegian Wood는 원곡에서는 Knowing she would였으나 너무 직설적이라는 제작사의 지적에 따라 존 레논이 Norwegian Wood로 바꾸었음.

어떤 그림

시작은 ‘러브크래프트 코드 3’권의 커버 일러스트였다. 나는 분명 어딘가에서 이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도무지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명치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온 곳을 알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들이 석화된 인간을 들고 관찰하는 그림이었다.

“빌어먹을… 영희야, 너 이 그림 기억 나? 분명 너하고 같이 봤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나.”

영희는 뭔가 징그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감은 상태에서 고개를 휘저었다.

“야, 제발 그 더러운 것좀 치워줘. 기분 좋게 술마시러 와서 갑자기 왠 귀신 그림이야.”
“나 지금 이걸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맞아, 그때도 너 그렇게 못볼 걸 본 것처럼 굴었는데, 기억 안나?”
“몰라. 알아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는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삼킨 뒤에 일어났다.

“미안해,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나 빨리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
“야, 너 뭐야! 그딴식으로…”

뒷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

분명 내가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사이트를 보고서는 너무 기분이 묘해서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다 이 작가를 소개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커뮤니티는 1년 전에 문을 닫았다. 그 다음은? 나는 그를 어디서 처음 알게 된거지? 아마도 러브크래프트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검색엔진에 ‘러브크래프트’라는 키워드를 넣고 이미지를 검색해봐도 도무지 나오지가 않았다.

***

아니야, 뭔가 시작부터 잘못된게 틀림없어. 러브크래프트와 관련이 있었다면 나는 벌써 그를 찾아 냈어야만 했다. 벌써 4시간째 검색엔진을 뒤지고 있다.

***

잠깐, 저 선은…

***

우연히 어떤 그림을 발견했는데, 그 그림은 기괴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내가 기억하는 그 작가의 화풍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발견한 그림은 디스커버리채널의 ‘Alien Planet’이라는 유사-다큐멘터리의 컨셉 아트였다.

***

아, 그제서야 모든게 기억났다. 한때 Alien Planet을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외계 생명체를 어떻게 저리도 개연성 있게 그려냈을까 하면서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을 찾아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가 그린 ‘인페르노’ 시리즈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드디어 발견했다! 드디어 답답함이 사라졌다.

***

러브크래프트 코드 3의 커버 일러스트는 Wayne Barlowe라는 일러스트 작가의 인페르노 시리즈 가운데 하나입니다.

http://www.waynebarlowe.com/barlowe_image_pages/inferno_7_ballsgone.htm

흉칙한 것이나 기괴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분들은 가급적 클릭을 삼가해주세요. 뭐 그다지 무섭지는 않습니다만.

Julio Balmaceda & Corina de la Rosa (in Apertura)


탱고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아는 형의 말을 빌자면, 이 쥴리오라는 남자는 탱고에 대해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아주 드문 천재라고 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내한공연도 했다는…) 문외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뭐가 그리 천재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독 이 동영상만큼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잡아 끈다.
같이 춤추는 코리나 아줌마와는 부부사이. 아, 직업이 아니어도 부부가 함께 탱고를 춘다는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유튜브에 없어서 그냥 가지고 있는 동영상만 만지작 거리다가 보니, 다음에 올라와 있어서 옮겨봄!

2008 Kirrie Music Award

한달 동안 쓸까 말까 고민했다. 그래도 쓰기로 마음 먹고, 적어도 올 해를 넘기진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어느 순간부터 사는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로 급경사를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넘어질까 아찔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귓가를 가르는 바람이 나를 한없이 고양시키기도 한다. 나는 힘이 들면 항상 멀리 본다. 아, 저 아래 끝도 없이 너른 평야가 있구나. 저 평야에 닿으면 달뜬 흥분과 성취감과 휴식으로 정말 아늑하겠구나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효과가 있다. 내가 내일도 살아 있다면, 나는 아직도 앞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예전 어워드들

Kirrie Music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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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wn By The River – Roy Buchanan
아무리 가사를 뒤집어 보고 세탁기에 넣어 돌려도 보고 거울에 반대로 비춰 보기도 하고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보아도, 분명히 ‘자신을 저 무지개 너머로 데려다 줄’ 그녀를 ‘쏴 죽여야 한다’고 번역되는데 대체 그 심상이 이해되질 않는다. 이럴땐 여길 가봐야 한다. http://www.songmeanings.net/songs/view/80413/ 어차피 가사는 같으니 Neil Young의 원곡에 대한 양키들의 이바구를 디벼본다면, 가장 많은 추측이 ‘헤로인’에 관한 노래라는 것. River는 헤로인에 대한 은유로 쓰인다고도 하니, 이를테면 약을 한 뒤에 환각 속에서 자신의 ‘그녀’를 쏘았다는 개막장 스토리라는 말씀. 그런데 솔직히 이건 좀 아닌듯 하고, ‘말’이라던가 ‘차’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개인적으로 화자가 기르던 ‘말’을 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그린 노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려던 차에, Rfeynman이 이런 이야길 하는걸 보다.

I just finished reading “Shakey” his authorized biography and in that
he says it’s not about anyone getting shot it’s about the ending of a
relationship.

말하자면 ‘Shakey’라는 Neil Young의 자서전을 지금 막 읽었는데, 그 책에 이르기를 ‘누굴 쏘았다’가 진짜 쏜게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

뭐면 어떠랴. 사실 로이 형님의 진가는 가사가 아니라 그 어두운 기타 선율에 있으니.

2. Red Right Hand – Nick Cave & The Bad Seeds
우리 학교 근처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지금도 치나 모르겠지만 가끔 종을 쳤거든. 그걸 두고 선배가 그랬지. 너 지금 막 무슨 소리 듣지 않았니. 네, 종 치는 소린데요. 그게 바로 니 인생 종치는 소리야.

그래. 닉 형님의 Red Right Hand가 불길한 종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지.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물의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중이거든. 아주 깊은 중력의 우물, 바닥을 치나보다 싶으면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구멍이 발견되는 그런 우물. 추락하는건 날개가 있다는 개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날개가 있으면 좀 더 멋지게 추락할 수 있을까. 멋지게 추락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추락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야. 끝없이 추락한다는 것…

3. If You Could See Me Now – Lenny Breau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뭐 다른 것도 많지만, 원곡은 빌 에반스가 지었다. (는 것 같다.) 레니 브루가 누군지는, 검색하기 귀찮아서,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원곡을 나름대로 분위기 있게 잘 커버한 것 같다. 빌 에반스의 원곡도 좋다. (말 나온김에 원곡 If You Could See Me Now from Bill Evans Trio 링크)

잘 자요, 내 사랑. 지금 막 잠들기 전에 우리 같이 서로를 보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이불 속이 그대를 부르니 그래도 잠은 자야겠지요. 잠들기 전에 열심히 바라는 것은 꿈에 나온데요. 어제 빨래를 해서 햇볕에 바싹 말린, 청결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고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도 없는 아늑한 방 안에서 같이 꿈을 꾸었으면 좋겠어요. 잘 자요, 내 사랑.

4. Arubaluba – Camel
오, 예. 좌- 좌- 좡- 띠리 띠릿 띠 띠 띠 띠 띠 띠 디- 띠리 띠릿 띠 띠 띠 띠 띠 디 디 디 디-
나 요즘 카멜에 미쳤삼. 카멜 만세!

5. Goodbye Cruel World – Pink Floyd

안녕, 잔인한 세상이여.
난 오늘 그대를 떠나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안녕…

별 하나에, 피지도 않은 봄 꽃
지네.

6. Storms – Perry Blake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이 노래를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나 하드디스크 속, ‘미정’ 폴더에 그냥 그렇게 처음부터 박혀 있었던 것 같아. 항상 이 노래는 이런 풍경을 떠올리게 해. 사건의 틈새, 폭풍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고 약속도 한참 남았고 전화도 없고 누가 부르는 사람도 길을 묻는 사람도 없어. 나는 그냥 정류장에 서 있어. 아무도 나를 열어보지 않아.

7. Throught the Roof And Underground – Gogol Bordello
영화 Wristcutter 삽입곡. 자살자만 가는 지옥에서 벌어지는 사랑이야긴데, 영화 참 좋다. 노래도 참 좋아.

이 마을 여기저기에 널 잡기 위한 덫이 놓여 있으면,
넌, 그래 뭐, 갈 곳은 땅 밑 뿐이라는걸 알게 되겠지.
이 방 여기저기에 널 잡기 위한 덫이 놓여 있으면,
넌, 그래 뭐, 갈 곳은 지붕 뿐이라는걸 알게 되겠지.
우우, 어쩌구 저쩌구… 가자, 가자! 아싸!

8. Here `Tis – The Yardbirds
래퍼들이 ‘세이 호오~’ 하면 관객들이 ‘호오’ 하면서 입김 불어주는거, 그거 원조가 아닐까 생각하는 정말 흥겨운 노래. 아, 광화문 한복판에서 미친척하고 누가 이 노래 딩가딩가 부르면 팔차선 전방위로 다 스크럼짜서 막고 나도 따라 부르겠고만.

9. Kashmir – Jeff Buckley from ‘Live At Olympia’
초 골까는 곡. 정규 앨범은 아닌듯 하고 아마도 라이브 공연의 곡을 누군가 녹음한 것이 나도는 것 같다. 역시 내가 (거의) 롹 역사상 최고의 보컬이라고 생각하는 제프 형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Kashmir 하면 레드 좌플린 형님들의 곡이죠. 이걸로 우리 제프 형아가 사정없이 웃겨버립니다.

‘(관객들이랑 이바구 막 깜)… 지금 레드 좌플린 연주하는 거에요…. 좌가좡- 좌가좡-… 이거, 레드 좌플린 연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33 RPM (빠르기) 이잖아요. 이걸 45로 연주해볼께요. 죽여줍니다….’

온라인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들려드리지 못함이 심히 아쉽삼. 요 옆에 제 이메일로 요청하시면 따로 보내드립니다.

10. Whipping Post – Allman Brothers Band
어디선가 찾은 리뷰에서는 당시에 레너드 스키너드와 쌍벽을 이루던 밴드였다는… 이상하게 라이브로 연주된 것만 먼저 Feel이 오는 건지, 이것도 역시 라이브 버전의 것이 정말 숨막힐 정도로 죽인다. (위키피디아에서도 라이브 버전에서야 이 곡의 풀 파워를 보여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건 한밤중에 주위사람 신경 안쓰고 볼륨 최대로 해놓고 담배 뻑뻑 피우고 벌벌 떨면서 들어야 제맛.

원래 라이브 버전의 죽이는 버전은 20분을 훌쩍 넘기는터라 자비로우신 유투브의 날개 아래서는 라이브 버전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검색 도중에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은 Whipping Post를 발견했기에 삽입합니다. 이 귀여운 아가씨의 폭발적인 기타 연주와 사랑스러운 보컬은, 당연히 원곡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야 이런게 정말 롹이 대중문화로 뿌리 내린 양키의 저력이구나 하는 감회에 빠지게 하네요.

어쨌든 이것도 이메일로 요청하시면, 라이브 버전의 곡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술의 전쟁

주조(酒造) 선사 (조주 선사 아님) 가 하루는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의 방문을 받았다.

제자 : 선사님, 최근 친구와 만나 술집에 갔나이다. 이 친구는 한때 저와 진로그룹의 철의 동맹군을 자처하며 소주 한 잔에 별 하나를 세며 인생을 논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마른 안주에 맥주를 주문하며 오징어 다리 하나에 상한가를 김 한 장에 개발 호재를 이야기하니, 제자는 그 변화를 견디기 힘들었나이다. 결국 술병을 깨고 절교를 선언했으니, 제자는 좋은 술친구 하나를 잃게 되었나이다. 제자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 주시옵소서.

주조 선사 : 제자야, 너는 내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잊었구나.

제자 : 제자가 미욱하여 스승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주조 선사 : 교과서 꺼내 오너라.

제자 : 네.

(교과서를 가져 온 제자.)

주조 선사 : 백팔십이페이지 두번째 단락 세번째 줄에 뭐라 쓰여있는고?

제자 : ‘알콜 도수 20도 이하는 음료수라 칭하며, 안주가 없을때에는 안주 대용으로 쓸 수 있다.’ 라고 쓰여 있나이다.

주조 선사 : 맥주는 몇 도인고?

제자 : 종류마다 다르긴 하나 보통 5도에서 15도 사이 이옵니다.

주조 선사 : 그럼 맥주는 무엇인고?

제자 : 가르침대로라면 음료수이옵니다.

주조 선사 :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젊었을 때 두주불사하던 자도 와인과 맥주로 전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람이 즐기는 모든 것에는 기호가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지나치면 종교적 숭배로 발전하게 되고 타인의 기호는 천박한 것으로 치부하게 되느니라. 제자야, 현명한 술꾼은 물 한 잔에도 호기롭게 취하는 법이며, 아둔한 술꾼은 즐비한 빈 병으로 자신의 주량을 자랑한다. 친구의 맥주 음료 애호를 그대로 사랑하도록 하여라. 너의 소주 애호를 굳건히 지켜나가라. 둘이 함께 술을 마시매, 친구는 친구대로 음료를 즐기니 좋고, 너는 너대로 안주가 없을 때 친구의 음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실 수 있으니 그 어찌 좋은 관계가 아니겠느냐?

옛 성현의 말씀에, ‘마시고 취하지 않으면 그 많은 술을 무엇하리오?’라고 하였다. 성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 술을 분석하지도 말고, 겨루지도 말며, 거창한 의미를 두지도 말라는 것이다. 술은 술이되, 술에 경중을 따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문제는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우월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조 선사의 말씀이 끝나자 제자의 마음에 홀연이 한 줄기 주향이 스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