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말더듬이의 날

성형외과에는 환자 아닌 환자들이 몰려든다. 말더듬이들은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인 셈이다. 말더듬을 학계에서는 ‘유창성장애’라 부른다. 유창한 언어생활을 향유하는데 장애를 겪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일 성싶다. 말더듬을 단순한 습관이나 잘못 길러진 버릇으로 치부하지 말고 일종의 장애로 규정해 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기울이자는 촉구다.

‘말더듬은 날’은 ‘International Stuttering Awarness Day’를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세계인구를 60억이라 가정할 때 약 1퍼센트 정도가 말을 더듬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인구보다 훨씬 많은 숫자인 6,000만 명 가량의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에 상관없이 유창성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헌장은 절규한다. “말을 더듬는 이들에게 일상적 의사소통은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말을 더듬는 이들은 매일매일 투쟁을 한다. 조국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제축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재타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중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탈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장면 곱빼기”와 “여보세요”나, 혹은 “아저씨 신촌로터리 가주세요” 따위의 지극히 평범한 단어들을 나열하고자 전신을 뒤틀고 심신을 쥐어짜며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내세의 지옥과 현세의 감옥의 중간지점에 아마 말더듬이의 세상은 존재할 게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

나는 말을 더듬는데, 요즘도 더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시점을 계기로 말을 더듬고 그것을 교정하며 대화할 때 내가 말을 더듬는지 더듬지 않는지 신경쓰거나 막히는 단어들을 피하기 위해서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외우는 등의 일들을 하기가 귀찮아졌다. 그냥 좀 더듬기로 했고 몇몇 친구들은 내게 말을 천천히 하라거나 머리 속에서 할 말을 정리한 다음에 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별 말 없이 나와 대화해주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 것들에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말을 현재도 더듬는지 잘 모르게 되었다. 아마 좀 더듬을 것이다. 여전히 막히는 단어가 좀 있고 긴장하면 주춤하게 된다.

세계 말더듬이의 날, 이란 것이 있는 걸 보곤 좀 마음이 푸근해졌달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이외의 말더듬이를 본 적이 거의 없는데, 통계적으로 봤을때 내가 말더듬이와 마주치지 못한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말더듬이들은 심각한 대인장애를 동반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정말 그랬다. 나는 주로 ㅈ, ㄷ 자음이 들어간 단어를 발음하기 힘들었다. 대학에 와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 “디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매번 “팔팔”을 샀다. “짜장면”이나 “짬뽕”을 말하지 못해서 중국집에 무언가를 시켜본 적도 없다. (요즘엔 잘 한다.)

지금은 물론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없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 이상 괴로운 일이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장애인이고 (물론 법적 장애인은 아니지만) 일반인에 비해서 소수자로써 장애인이 갖는 괴로움을 좀 더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말을 더듬는게 축복까진 아니어도, 내 자신이 원하는 세상에 다가가는데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저 굵은 글씨체로 되어 있는 인용문이 이해가 되세요? 나는 저거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일기

별로 술을 마실 일은 아니었는데, 언제나 후회는 때늦게 시작되듯이 그냥 먹기 시작한 술이 과했는지 새벽 내내 나는 위 속의 모든 것을 게워냈다. 지저분한 것들이 먼저 튀어 나왔고 끝내는 씁쓸한 체액까지 꼭꼭 씹어 뱉어냈다. 그리고 십분뒤엔 똑같은 지옥이 반복되었다.

아침엔 목구멍이 화끈거려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식구들이 모두 일터로 나가버린 어둑한 방안에서 나는 그냥 멀건 미음을 끓여 입에 떠 넣는다. 언뜻 발치에서 두꺼운 안경태를 연신 손으로 밀어 올리며 개다리소반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가는 주금깨 소녀가 환상처럼 보인다. 내가 신음하자 그녀는 당황해서 내게 돌아보고, “어디 좀 괜찮아? 물 좀 갖다줄까? 죽 좀 먹을래?” 하며 걱정해준다. “아아, 그냥 좀 속이 쓰려서. 아까 먹던 미음 좀 갖다줄래?” 그녀는 아뭇소리 안하고 미음을 적당히 데워서 간장과 함께 내온다. “그러길래 빈속엔 술 먹지 말라고 했잖아.”, “엄밀히 말해서 안주하고 같이 먹었으니 빈속은 아니었어.”, “그러셔.” 하고 토라지는 그녀. “뭘 쓰고 있었어?”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냥 옛날 얘기. 잊어버릴까봐.”

뭐 그렇다는 얘기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는 얘기.

하하하, 웃으면 좀 나으려나.

근데,
나 사실 정말 외로웠던거 아냐?

스팸

밤을 새고 일을 하고 있으면, 새벽 네시쯤에서 다섯시 사이에 하나포스라던가 교보문고 같은데서 정기적으로 보내는 반정도는 스팸인 메일이 온다. 딩동-, 하고 시스템 트레이를 보면 역시나 같은 메일.

가을이 되어 새벽 공기가 매우 차다. 이런 기계같은 느낌이 그 메일로부터 전해져온다. 어떤 거대한 시스템으로부터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발송된다. 아마도 로그인해서 회원정보인가를 수정하면 메일이 오지 않게 할 수도 있을테지. 그러나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요즘 같아선 그러한 메일조차도 새벽에 오지 않으면, 주위가 지나치게 조용하다.

이상한 망상에 시달린다. 관자놀이로부터 매끈한 스테인레스봉이 머리를 꿰뚫는다. 그리고 흑백인 시대에 바람에 잠깐씩 흔들린다. 피가 조금씩 스며나오기도 하고 그야말로 무거운 것이 머리 속에 있다는 실물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아프지는 않다. 아무런 고통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낼 수 있는 아이. 나는 조종당한다.
예전에는 부드러운 고무재질의 검은 구체를 날카로운 면도칼로 자르는 망상에 시달렸다. 이건 어쩌면 스스로 벌을 주는 것 같다. 쇠가 머리를 뚫고 바람에 흔들림. 오죽했으면.

3000번째 방문자 이벤트

그동안 많이 귀엽게 봐주셔서 29XX번이나, 여러분들이 방문해주셨습니다. 나는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3000번째로 방문해 준 누군가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몇십번 안남았네요. 혹시라도 상품을 바라고 열심히 F5키를 누르시는 분이 계실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가 알기로 이 태터툴즈는 1시간 이내에 같은 컴퓨터에서 방문한 기록에 대해선 유효방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닙니까? 아님 말구…

선물은 정말 작은거, 예를 들면 최신형 노트북이라던가 벤츠 어쩔씨구리 (난 이런 모델넘버엔 약해서 뭐가 좋은지 잘 몰라요) 라던가 개나 소나 다 가는 타워 팰리스 최상층 무료 입주권이라던가 뭐 그런거니까 너무 기대는 안하셔도 좋습니다. 참가상은 없냐구요? 참가상, 물론 없습니다. 있으면 좋을뻔 했는데요, 그쵸?

이번 이벤트에 협찬해준 이건히, 빌게이츠 등등 세계 굴지 기업주한테 심심하게 괘씸하다는 말 전합니다. 니들이 앞뒤 안가리고 있는거 없는거 다 긁어가는 바람에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며,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족, 가난한 아이들이 오늘도 쫄쫄 굶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오늘 고기 먹었습니다.

3000번째, 딱 방문하는 분한테 딱 한번 이벤트 당첨 축하 창이 뜹니다. 팝업창이 아니니까, 구글 툴바나 xp sp2같은거 쓰셔도 무방합니다.

축하 창에는 모종의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 문구를 안내메세지에 따라 제게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무사히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열나게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일은 토요일이군요.
부모님은 아이들과 함께, 미혼의 청춘남녀는 자신들의 짝과 함께, 고3은 열나게 공부하시고 고2까지는, 까짓꺼 하루 재끼고 피씨방에나 가서 열나게 레벨업 하시고 초딩들은 제발 좀 말 좀 순화해서 리플달고 유치원 이하 꿈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느즈막히 일어나 시냇가 옆에서 돌고래에게 정어리나 던져줄까 합니다.

이만 총총.
—->
참, 약 한달전부터 이상한 방문자 기록이 뜨고 있습니다. http://clip.daum.net… 으로 시작하는거 보니까, 어떤분이 다음에서 서비스하는 즐겨찾기에 제 사이트를 등록해놓고 줄기차게 들어오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빨갛게 달아 오를 정도로 궁금합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1. 나는 남자다.
2. 나는 여자인데, 미성년자이거나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다.
3. 나는 여자인데, 주위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이 심한 반면에 마땅한 남자가 없어 고민중이다.
4. 나는 국회의원이거나 대기업 회장이거나 월평균 수입이 1000만원 이상이면서 일년에 내는 소득세는 10만원 미만이다. (이런 개X끼!!)
5. 나는 골프를 잘친다.
6. 나는 초능력자다.
7. 나는 이주 외계인이다. (12월 말 강제추방예정…)
8. 나는 10개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고 12개국어를 읽고 쓸 줄 안다.
9. 나는 성별을 밝힐 수 없는 인간인데,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 소근소근 대화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10. 나는 저작권협회 알바생이다.

여기서 일단 1번, 2번인 분은 방문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4번은 앞으로 오지 마라.
5번이면 열심히 노력해서 해외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선수가 되어 대한민국을 빛내, 주든지 말든지…
6번이면 반갑습니다. 나는 텔레파시와 염동력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줄 아나요? 언제 한 번 만나서 지구정복이나 한 번?
7번이면 잘 아는 MIB요원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을 통해 정식으로 수속을 밟으면 지구인으로 귀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연락주세요, 초공간통신단말번호 #$#@%-343-3@#$343-^&$# 입니다.
8번이면, 좋겠습니다.
10번이면 나는 안드로메다성인이므로 지구법에 저촉받지 않습니다. 만약 충돌적인 법률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부 은하연방 지방 법원 민원실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국부 은하연방 지방 법원 민원실은 지구로부터 은하 중심으로 약 3만광년 거리입니다. 공용운송수단이 없으므로 반드시 지구 로켓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주차비가 매우 비싼데, 민원때문에 왔다고 해도 도장 안찍어주니까 유념하여 주십시오.

자, 문제는 3번과 9번인 경우입니다.
일단 9번인 경우에, 나도 당신과 같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물론 내게도 그런 친구가 한두명쯤은 있지만 미묘한 알력같은게 있고 복잡한 치정문제도 얽혀있어서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즉 가을의 맑은 바람과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그런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드디어 3번.
축하합니다. 부디 코멘트라도 남겨주셔서(비밀글로) 서로 지속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우 바쁘지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성을 그냥 두고 지나칠만큼 바쁜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고민을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기 2

학교 보건실이란델 처음 가봤다. 증상을 설명하니 액티피드 두 알을 건내주었다. 내 과, 이름, 학번 등등을 묻길래 대답하다가 그만 학번이 생각 안나서 대충 대답해버렸다. 약을 받고 나오면서 다시 학번이 생각났으나, 다시 되돌아가서 학번 잘못 불러드렸다고 말하는 것도 좀 우스워서 그냥 나와버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다, 액티피드.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와 함께 알약 하나를 넘긴다.

그나마 교양 수업 하나 있는게 오늘 세시간 연강이라 도저히 마지막 시간까지 버티질 못할 것 같아서 한시간 듣고는 (사정 설명하고) 나와버렸다. 낮에 먹은 감기약이 바야흐로 효과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노오란 구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육체적으로) 깊은 단절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 오면서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속이 허한대도 뭘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앙겔로풀로스가 보고 싶었다. “학의 멈춰진 걸음걸이.” 노오란 작업복(우비)의 이미지. 도처에 드러나는 구원의 실마리. 찐득하게 의자에 앉아서 그 영화가 보고 싶었다. (그렇죠, 형?) 그러니까 먼저 그 노오란 작업복이 생각났던거다. 감기약때문에, “영원과 하루”에서 자전거타고 잠깐 지나가는 노오란 우비까지. 완전히 자기 것이 된 이미지를 태연하게 구사할 수 있는 감독, 정말 대가다. 너무너무 보고싶으나, 아마 다시는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혹시라도 이 작품을 가지고 계신 분은 연락주세요..)

그러나 영화를 보는 대신에 집에 오자마자 밥먹고 약먹고 그냥 자버렸다. (지금 막 깨서 잠깐 일하고 글 씀)

감기

목이 많이 붓고 코가 막혀서 아프고 답답하며 짜증이 난다. 심하게 감기에 걸렸다. 어디 나갈 힘도 없고 다행스럽게도 오늘 하루 쌍십절 덕분에 학교엘 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침부터 멍하니 누워서 껌뻑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고를 반복했다. 와중에 스무통쯤 전화가 왔다. 절반은 일때문에 온 전화였고 절반은 핸드폰때문에 엄마가 건 전화였다. 아버지가 핸드폰을 바꿀때가 되어서 (실은 어머니도) 주말 내내 바꾸니 마니 오늘은 문을 연 대리점이 있니 없니 하면서 소란을 떨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젠가 한번 웃기지도 않은 에스케이텔레콤 우수 고객이라고 쓰던 아주 구형의 플립형 핸드폰을 중고 폴더형 핸드폰으로 바꾼적이 있다. 무료였는데, 그 속보이는 선심에도 부모님은 무슨 엄청난 혜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주 좋아했다. 그러던 것이 또 몇 해가 지나자 배터리가 금방 닳고 통화도 잘 안되고 등등의 이유로 핸드폰을 새로 개통해야 할까 말까 하는 중이었다. 에스케이텔레콤의 통화료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엘지냐 케이티에프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그만 지난 주말에 아버지가 핸드폰을 분실, 어머니는 잘 됐다고 이 기회에 바꿔버리자, 하게 된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왜 내 핸드폰은 화음벨이 안되냐, 왜 내 핸드폰은 칼라가 안되냐 하시면서 거의 매년 할부기간만 끝나면 최신형 핸드폰으로 바꾸는 동생의, 그야말로 2005년 최신형 위성 DMB폰을 만지작거리는게 끝내 마음에 걸려서 “제가 돈 낼테니까 바꾸세요.” 했는데, 드디어 오늘 은행앞에서 한달에 삼만 얼만가만 내면 된다는 그런 기종으로 어머니가 구입한 모양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신용 어쩔씨구리 상태이므로 내 명의로 개통하시느라,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도 대리점 직원이 “명의 확인차” 건 전화를 두 통인가 세 통쯤 받고 어머니의 전화도 받고… 아무튼 난리도 아니었다.
혼몽한 상태에서 내내 나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 하면서 짜증을 부렸다. 대리점 직원이 사정을 이야기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불러 달라길래 한번 불러줬는데, 한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 또 전화가 오더니 본인 확인을 해야한다고 또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까 그 사람이었다. 짜증을 내면서 아까 당신이 한번 확인하지 않았냐, 왜 또 확인하냐 했더니 이건 절차상의 문제라는데 개뿔 와.. 속에서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꾹 참았다. 분명 옆에 어머니가 계셨으므로 내가 욕을 막 하면 어머니 입장만 난처해지겠지, 하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내내 미칠것 같았다. 내 몫의 카드를 내어주고 백만원이건 이백만원이건 긁어버리세요, 하고 싶었다. 제발 나한테 말걸지 말고 맘대로 하세요. 게다가 오후쯤에 갑자기 수도가 안나오기 시작했고.. 그 뒤는 더이상 말하면 그때의 짜증이 상기되는 것 같아서 그만두련다.

저녁엔 조금 정신이 들어서 앞집 윗집으로 물이 안나오는 이유를 물으려 다녔다. 다들 모른다고 했다. 우편함에 보니 울산MBC에서 온 우편이 있었다. 지난주에 고래사랑 사이트 관리하시는 이재훈님이 귀신고래 다큐 DVD를 보내주신다고 하더니, 그거였다. DVD-ROM에 넣고 몇 분쯤 보다가 머리가 아파와서 그만 정지시켰다.

아아… 나는 언제쯤 숲 속 옹달샘, 토끼도 찾지 않는 깊은 물이 되어서 흔들리지 않고 잔잔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다. 배가 고프면 더 춥고 추우면 열을 내기 위해 몸을 떨게 되므로 더 배가 고파진다. 이 두 고통이 이중나선구조로 상승한다.

오늘 하루 나는 매우 심란했다. 계속되는 복통과 피로, 무력감 같은 것들이 나를 잡고 뒤흔드는데 제발 놔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듣질 않았다. 거의 모든 일반적인 것들이 구토가 날만큼 혐오스럽다. 오직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은 담배와 잠, 뿐이다. 어떤 녀석이 있는데, 난 그 녀석이 매우 싫어졌다, 지난 몇 일 동안 나는 기차의 덜컹임처럼 그 녀석을 떠올렸다. 떠올릴때마다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매우 싫어지게 되었다. 술집에서 들었던 말들, 그냥 상상, 생각.. 아마도 이런 것들이 싫어지게 된 요인 같다. 그런데 그 뿐이다.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비교적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맹렬하게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스러워 할 뿐이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살아간다. 나는 천칠백명 정도를 싫어하고 오십세명 정도를 극도로 미워하며 열세명 정도를 죽이고 싶다. 이미 머리 속에서는 수없이 살인이 이뤄졌다.

요즘 정말, 계속 현무암이 되고 싶다. 현무암.. 깊은 음영.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들.

가을 밤

귀뚜라미가 울지 않는 밤, 그냥 잠에서 깨어났다 할 일이 없어 컴퓨터를 켠다.
며칠 전부터 스피커가 좀 이상했는데 콘센트를 좀 만져주고 설정 패널에서 이퀄라이져를 조절했더니 마치 내 방이 작은 콘서트홀이 된 것 같다. 김원영이네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이름을 모르는 어느 여가수가 부르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듣는다.

그냥 그런 가을밤.


사당동야밤DJ의 선곡을 감상해보세요.

저장장치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해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주변장치들을 이용한다. 대개는 멍청이같이 시간이 되면 알람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멍청이라기 보다는 멍충이같이. 멍멍충이. 어쨌든 그 알람에 맞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은, 오오 상상해보세요, 엄청 근사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멋지다. 그러면 나는 상뇌와 하뇌를 구분해서 하뇌에게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시키고 상뇌로는 내가 하고 싶은 망상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 그러니까 “잘 모르는 올드팝을 듣고 있다.”라고 쓰려고 했는데 막 (인터넷 방송의) 다음곡으로 넘어가면서 얼 그린이 나왔기 때문에 “아 쫌 아는 가수의 올드팝을 듣고 있다.”라고 써야겠다. 뭐면 어떠랴.

세상에. 휴대폰으로도 인터넷 방송을 들을 수 있데. 라디오 프리 콜로라도의 디제이 게리 버크씨는 징하게 삼십분을 멘트만 하다가 두 서너곡 음악을 틀어주고 또 삼십분씩 멘트를 한다. 대부분 자기네 스테이션 자랑인데, 320kbps로 스트리밍하는 곳은 우리밖에 없네 어쩌네 하는 얘기였다.

콜로라도. 미국에서 콜로라도와 오레곤, 하면 나는 불곰하고 울울창한 침엽수림하고 만년설이 듬성듬성 쌓인 삐죽한 청년기의 산맥밖에 생각 안난다. 거기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체크무늬 셔츠에 멜빵 청바지를 입고 어깨엔 아이 머리통만한 도끼를 들면서 씨익 웃어주는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왕년에 내가 이 도끼로 세콰이어를 찍어 넘기는데 말야…”

아, 그러고 보니까 정말 저런 아저씨를 알고 있다. 내가 막 제대하고 복학까지 잠깐 비어있는 6개월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도보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미국 끝에서 끝이다. 육개월. 정말 긴 시간이었어.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걷는 도보 여행은 꽤 유명한데, 왜냐하면 MWOS(MiddleWay of the States)가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직통으로 샌프란시스코와 필라델피아까지 연결해준다. 상상이 안가지? 거의 2000km에 가까운 거리다. 5년마다 이 길을 도보로 횡단하는 대회가 있을 정도로 미국 내에서는 유명한 길이기도 하다.
아무튼 애초에 도보여행을 의도한건 아닌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연히 만난 도보 여행가 아더 요셉 맥타가트(Arthur J. Mctaggart)씨가 자꾸만 같이 가자고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이 사람 나중에 알고보니 남미와 동남아시아를 순전히 도보로 여행한 것으로 이 쪽에선 많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야 막 제대한 예비역 군바리의 깡으로, 까짓꺼 힘들면 40km 행군만큼이나 힘들겠어, 하고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군대행군하곤 많이 달라서 꽤나 고생했다.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에서 네바다주를 거쳐 유타, 와이오밍, 네브라스카즈음을 지날때였다. 네브라스카는 지겨운 로키산맥으로부터 안녕을 고하고 끝나고 슬슬 평지가 시작되려는 곳이기 때문에 비교적 걷기가 수월했다.
네브라스카의 미주리강의 수계가 시작되는 곳인가 그랬다. 그만 맥타가트씨가 발목을 심하게 접질르고 (전문용어가 뭐더라..) 말았다. 아직 완전히 산맥을 벗어난 것도 아니어서 다른 도보 여행자들이나 차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나는 무척 난감했다. 아무튼 엉터리 영어로 “내가 좀 더 걸어가서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더니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10km쯤 걸었을까, 벌목창고쯤으로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줄기 근처에 있었는데, 아마도 이곳으로부터 강을 통해 원목을 배로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겁지겁 그 건물로 달려가 아무나 붙들고 사정을 어렵게 설명했다. 대충 “my friend’s leg was broken. 솰라솰라..” 하면서 손짓 발짓을 섞었더니 내 또래로 되어 보이는 무식한 것들이 계속 “what? what? speak english, sucha idiot.” 하면서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이걸 확 뒤 엎어버려? 하고 있던 차에 창고에서 예의 그 수염 덥수룩하게 난 할아버지가 무슨일인가 하고 나오는게 보였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다시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먼저 옆에서 웃고만 있던 녀석들에게 뭐라고 막 욕을 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엄청 낡은 웨건을 몰고 왔다. 뭐 그렇게 해서 맥타가트씨는 스티번씨티(steaburn city : MWOS와 76번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네브라스카의 도시 이름)의 작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응급실에서 그 할아버지와 드문드문 얘기를 나눴었다.
지금은 그 할아버지 이름도 잘 기억 안나는데, 그때 나눴던 이야기는 이상하게 또렸하다.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요.”
“오, 한국. 태권도, 휙휙(손짓 발짓). 태권도 할 줄 아니?”
“그럼요. 한국사람은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태권도를 배워요. (라고 뻥침)”
“부르스 리가 그래서 태권도를 그렇게 잘하는 거구나. (잉? -_-;;)”
“할아버지는 벌목꾼(lumberman)이세요?”
“예전엔 그랬지. 지금은 그냥 늙은이야. 작업소엔 소일거리삼아 나가는거지.”
“젊었을땐 나무 꽤나 찍어 넘겼을 것 같으신데요.”
“그땐 도끼질 한방에 나무가 하나씩 넘어갔지.(a chop, a wood)”
“하하.. (원 이 할아버지 농담도..)”
“너는 한국에서 뭘 하고 있니?”
“이제 막 제대해서(discharge from military service) 잠시 쉬고 있어요.”
“군인이었어?”
“한국 남자는 스무살만 넘으면 누구나 군인이 돼야해요.”
“희안한 나라네.”
“맞아요. ㅎㅎㅎ”

뭐 그러면서 노가리를 풀고 있으려니 응급실에서 맥타가트씨가 발을 쩔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이야기를 들으니 부러진건 아니고 조금 부었을 뿐이니까 일주일 정도는 요양을 해야한단다. 맥타가트씨는 내게 미안하다며, 원한다면 먼저 떠나도 좋다고 했는데 내가 혼자 가봐야 타국에서 얼마나 가겠냐며 당신곁에 머물겠노라고 (으웩) 했더니 그는 심하게 감동한 표정이었다. ㅎㅎㅎ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그 할아버지댁에 머물게 되었다.
할아버지 통나무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마루 벽난로 위엔 엄청 큰 사슴 머리가 박제되어 있어서 오래 살다보니 이런것도 실물로 다 보네,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뭐 이런 얘기다.

가을 일기

가을 (이라고 해두자) 이 되니까 부쩍 모기가 많아졌다. 어째 여름보다 더 극성인 것 같다. 환한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의 절반은 손뼉치며 모기를 잡는 것으로 보낸다. 이 일에도 꽤 능숙해져서 아마 시간당 열마리 정도는 잡는듯하다.
어머니는 가을이 되자 추운 외부에서 좀 더 따뜻한 내부로 모기가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집 모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1. 각방마다 모기들의 성향이랄까 하는 것이 다 다르다. 내가 엄히 모기를 다스려서 그런지 내 방 모기가 가장 빠릿빠릿하고 화장실모기가 제일 둔하다. 아마 화장실에서 누가 열심히 모기를 잡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모기가 빠릿빠릿한지 알아보는 테스트. 손뼉쳐서 잡기 시도 횟수가 10회 이상이면 빠릿빠릿, 5회 부근이면 보통, 3회 이하면 어리버리)

2. 꼭 머리 근처에서 날아다닌다. 아무래도 다리나 등, 팔 근처라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모기들은 아마도 더 오래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놈들은 머리, 특히 귓가에서 날아다니길 좋아한다. 마치 긴장하라고 미리 신호를 주는 것처럼. (그런데 이건 꼭 우리집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럴 것 같다.)

3. 두마리 이상 함께 날아다니지 않는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요즘 모기가 사실은 굉장히 높은 지능을 갖고 있는 생명체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컴퓨터앞에 앉아 있는데, 모기가 나타난다. 한 열번쯤 헛손질 하다가 모기를 잡는다. 이제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면 금새 또 다른 한마리가 나타난다. 또 잡는다. 방심. 또 나타남. 이게 밤새도록 계속된다.

그냥 생각해보면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날아다니고 싶으면 날아다녀야 하는게 맞다. 그런데 마치 번지점프대에서 낙하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이놈들은 꼭 한놈씩만 나타난다. 뭐 지들끼리 정한 약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차라리 한꺼번에 나타나면 확 잡아버리고 좀 쉴 수 있을텐데.

모기 얘긴 이쯤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지난 여름 내 핸드폰 인사말은 “비오는 여름” 이었는데, 뒤에 “여름”만 “가을”로 바꿔도 될 것 같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게 싫다.

그러고보니 영어로 ‘모기’를 뜻하는 모스키토(mosquito)도 ‘모’로 시작하고 ‘모기’도 ‘모’로 시작한다. 나는 바벨탑 때문에 오만한 인간을 심판했다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나는 올 겨울을 잘 지낼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