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캐롤보다 더 아픈 캐롤.
corpus christi carol
이 복잡한 심사를 이 이상 어찌 표현 할 수 있으랴.
모두에게 포근한 메리 크리스마스를.
오늘 나한테 팔천원 꿔 간 그녀에게도.
삼성은 고맙습니다?
광고는 기본적으로 광고에 나오는 인물이나 환경, 사건 등을 시청자에게 동일시 하도록 함으로써 본연의 목적을 달성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롯데캐슬의 혐오스런 카피도 (광고 링크)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너는 지금 당장 롯데캐슬에 살지는 않지만, 산다고 가정했을 때 금난새처럼 품격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으므로 돈이 된다면 (돈이 안되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롯데캐슬에 입주하는게 좋다.’ 가 되는 것이다. 이는 광고를 접하는 시청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광고 내부는 완전한 세계로, 자기 자신은 불완전한 세계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거의 모든 광고의 본질은 이렇다.
삼성의 광고. 매번 보아오던 삼성의 기업 이미지 광고이지만, 오늘만은 다르게 읽힌다. 먼저 밝힌 광고의 본질대로 하자면, 광고의 화자가 계속적으로 주입하는 ‘고맙습니다.’ 는 사실 그들이 정말 시청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청자가 반대로 ‘고맙습니다.’ 라고 삼성에게 고백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여러분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는 ‘삼성 덕택에 (한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가 되는 것이다. 요즘의 삼성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광고가 이렇게 읽힌다는 것은 참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당연히 이런 분석은 비약이 심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독히 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만큼 지독히 삼성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반응은 거의 동물적인 수준이다. 흐흐흐.
아 놔, 레몬펜 이거 뭐냐!!
몇 년 전에 나 혼자서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무릎을 쳤던 인터넷 서점 관련 서비스가 있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자주 이용하던 인터넷 서점에 그 서비스를 건의했었고, 답장으로 온 것도 흥미있는 아이템이라며 고려해 보겠다는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교보문고에 갔다가 완전 똑같은 내용의 서비스를 발견하고는, 어떻게 이렇게 같은 아이디어가 비슷한 시기에 여러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지 믿기 힘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며칠 전에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일반적인 댓글 기반의 의사 전달 시스템이 가지는 한계는, 추가로 달리는 댓글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원본 글과의 물리적 거리가 길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댓글을 한참 읽다가, ‘그런데 이게 무슨 내용에 관한 댓글이지?’ 하고 다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업 해야만 했다. 그래서 댓글이 원본 글의 밑에 달리는 방식 이외의 것을 생각하다가, 댓글을 원본 글의 글자 사이사이에 넣는게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를테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라는 문장까지 읽고 ‘당신의 아이디어는 우습지도 않아!’ 라는 댓글을 달고 싶다고 하자. 그럼 댓글이 바라보는 키워드 문장 (내지는 단어) 에 일종의 표식을 해두고 다음에 누군가 그 글을 볼때 같은 지점에서 내가 쓴 댓글이 달린 내용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게 재귀적으로 작용해 댓글과 원본 내용에 관한 시각적인 의미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걸 생각하고 얼마나 떨렸던지… 그래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고 오늘 시험삼아 코딩 해볼까 하면서 참조해볼만한 기술적인 효과들을 찾던 중에… 발견해버리고 만 것이다. 완전 똑같은 아이템으로 이미 베타 테스팅 중인 서비스를.
레몬펜 (http://www.lemonpen.com/)
적용된 모습 마루짱(?)님 블로그의 ‘화려한 디자인 변신, ‘디지털 지갑” (http://www.designlog.org/2511227)
글을 보다 보면 글의 하단 부분에 형광색으로 몇 단어가 마킹 되어 있고 옆에 말풍선으로 숫자가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말풍선을 누르면 댓글이 나타난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같다. (레몬펜은 댓글형식으로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이걸 확대 적용하면 마치 위키처럼 지식을 기술하는 새로운 기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탈감이랄까.. 어째서 비슷한 시기에 또 이런 아이디어를 만났을까, 나는.
덕분에 손마디를 꺽어서 이제 한 번 시작해 볼까 하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졌다.
ㅜ.ㅜ
기예르모 델 토로의 ‘광기의 산맥에서’ 추가 정보
.. 랄 것도 없지만서도, 우연히 몇가지 정보를 더 찾아서 추가합니다.
At The Mountains Of Madness
Status: In Development
GDT’s Role: Writer & DirectorSummary
Project in development. Based on the H.P. Lovecraft short novel.Notes
- Latest news, posted 18 Jun 2006 by GDT: “Budgeting from
scratch with WB physical production dept. I love working in this place!
Hope they’ll make it-“- Ron Perlman may play the role of “Larson”
- William Stout did some preliminary art design for AtMOM.
What GDT Had To Say
Posted 30-Nov-2007 on Hellboy 2 Message board:
“ATMOM is a delicate project to push through a studio: no love interest, no female characters, no happy ending…BUt i believe its time to resurrect the BIG TENTPOLE horror movie.
The EVENT HORROR movie. Like THE EXORCIST was or THE SHINING or ALIEN
or JAWS in their time…”
광기의 산맥에서
진행상황 : 구상중
기예르모 델 토로 역할 : 각본 / 감독요약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으로부터 구상중.노트
- 2006년 6월 18일 기예르모 델 토로의 코멘트 : “워너 브라더스 사와 예산문제를 기초부터 협의중입니다. 여기서 일하는건 정말 즐거워요.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찍자고 했으면 좋겠군요.”
- 론 펄만 (헬보이 아저씨) 가 “라슨” 역으로 나올지도 모름
- 윌리엄 스타우트가 영화 광기의 산맥의 기초적인 아트 디자인을 맡아 작업해줬음.
기예르모 델 토로가 한 말들
2007년 11월 30일
“광기의 산맥은 영화사들을 통해 만들기에는 좀 빈약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얘기도 없고, 여자도 안나오고, 해피 엔딩도 아니기 때문이죠..하지만 이제 진짜 호러 영화들이 (참조 tentpole)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엑소시스트나 샤이닝이나 에일리언이나 죠스같은 진짜 호러 영화 말이죠.”
뒤에 이은 글들이 좀 있는데, 아직 뭐 하나 확실한건 없군요. 단지,
1. 기예르모 델 토로 (GDT) 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인 광기의 산맥을 영화화 하고 싶어 한다.
2. 그 주변인들도 이에 대해 긍정적이다.
3. 하지만 이 ‘러브스토리도 없고 여자도 안나오고 게다가 해피 엔딩도 아닌‘ 영화에 투자할 영화사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정도가 답일 것 같습니다. 심지어 IMDB에 GDT의 ‘광기의 산맥에서’를 찾아보면 2010년에 출시될 예정이라고 나와 있기까지 하네요.
참고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원제목은 ‘광기의 산맥에서’가 맞지만 국내 번역서의 제목이 ‘광기의 산맥’으로 나왔던 관계로 제목으로 그 둘을 혼용했습니다.
톰 맥레이 첫 내한공연 후감, Tom Mcrae first gig in Seoul
나는 왜 이 69년 영국산 청년이 대한민국 팬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않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자, 이건 팬으로서의 오피셜한 발언이고.
아직까지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그다지 크지도 않은 공연장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객석에 앉아서 시작시간 전까지 무의미하게 흘러 나오는 무딘 경음악들을 애써 참아내며 나는 확실히 뭔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분명 파퓰러한 뮤지션이 아니라, 그냥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동시대를 살아내고 가끔 전화해 꾀어 내면 시덥지 않은 고기 몇 점에 소주 한 잔을 걸치더라도, 그래서 이 무궁한 삶들이 누추하게 느껴질 지라도 끝끝내 네가 있어 산다, 나는 끝끝내 변혁할 것임을 믿는다 고백하며 내일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상상이었다. 가끔씩 집중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꼬부랑 글씨들 턱에) 그의 글들을 읽어 보면 10년의 나이 차이가, 대한민국과 영국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짱구 굴리는 모양새는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트와 바이트로, 또 동축케이블이나 광케이블로 연결된 활자화 된 관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어느 순간 그가 나타나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미몽같던 상상들은 천장으로부터 추락해 내게 실물의 톰 맥레이를 던져주었다. 그건… 그다지 멋진 일이 아니었다. 스폿 라이트로부터 그의 각진 미간이 만들어 내는 어두운 눈덩이라던가, 왼발 오른발로 탁탁 바닥을 때리며 리듬을 맞추는 스타일은 지금까지는 내 상상 속에서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무진장 위험한 스토커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젠 그게 아니라는걸 알아버린 것이다. 그는 그 나름대로 살아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주체였다. 이건 아마도 스타와 팬 사이의 풀 수 없는 오래된 오해 같은 것일까.
아무튼 정제된 스튜디오에서의 완벽한 곡만 듣다가, 가끔 박자를 놓치거나 줄을 실수로 뮤트시키는 등의 생동감 넘치는 라이브를 듣는다는 것은 그것대로 멋진 경험이었다. 아직 신보인 King of Cards를 구하지 못해서 종종 처음 듣는 곡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가 부르며 유명해진 곡들 ‘Still Lost’, ‘Walking 2 Hawaii’, ‘For The Restless’, ‘End Of The World’, ‘You Cut Her Hair’ 등등을 남몰래 따라 부르며, 몇십년 전에 내한했던 클리프 리차드에게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무시무시한 우리 엄마 세대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실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프로그램에 없었다면 미친듯이 뛰어나가 그의 멱살을 잡고 신청했을 나만의 톰 맥레이 18번 ‘The Boy With The Bubblegun’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되었을 때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고 좌석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생각하는 톰의 강점은 그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진지하다는 것이다. 다시. 물론 어느 뮤지션인들 자신의 음악에 진지하지 않을까. 다시. 내가 생각하는 톰의 강점은 그의 진지함의 형태가 나를 움직이게,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버블건 소년의 가사는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터져 나오는 격한 톤의 분노가 폭발 직전의 한계에 이르러 오히려 외면적으로 고요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시퍼렇게 날이 선 예리한 칼날을 연상케 한다.
언젠가 다시 오기를 희망한다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적이 있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클로징 멘트였어도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주로 유럽과 북미에서 활동하던 그가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아시아 투어를 온 것인지는 나도 어리둥절 할 정도지만 (그나마도 아직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뿐이다.), 그의 노래가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동쪽의 한 나라에 한 청년을 감동시켰던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가 언젠가 다시 방문할 그 날엔 우리는 더 많아 질 것이고 계속 그렇게 더 많아 질 것이다.
하나, 오늘 9시에 홍대 클럽 Freebird에서 조촐한 팬미팅 (아, 팬미팅이라니!) 과 함께 몇 곡을 부를 예정이라고 한다. 공연장이야 무턱대고 혼자 갔지만서도, 클럽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가봤으면 좋겠다.
둘, 혹시 어제 공연장에서 사진 찍으셨던 분 계시면 트랙백 좀 쏴주세요. 촬영 안되는 줄 알고 카메라를 안가져 갔더니 후회막심이네효!
Tom, It was a great gig to me last night. I’m afraid you might have been disappointed about small fans. But don’t forget your saying that you hope you’ll come to this country again. We’ll be getting more and more.
진퉁과 짝퉁
며칠 전에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명품위조단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는 그들의 치밀한 짝퉁 명품가방 유통과정을 밝히면서, 그들이 만든 제품이 진품과 매우 흡사해서 본사 직원이 와서 확인을 해도 제대로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대로 에이전시 샾에 걸어 놓아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걸 두고 한국인 손재주의 쾌거라고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웃지 못할 일이 되었다.
그런데, 진품과 그정도로 흡사하다면 그건 이미 진품이 아닐까? 심리철학의 사고실험 가운데 ‘중국인의 방 논증’이라는 것이 있다. 밀폐된 두 방에 다국어에 통역에 능통한 사람과 기계가 들어 있고 그 두 방에 번역되기를 바라는 영어 문장을 넣었을 때 우리는 이 조건만 가지고는 기계의 상태, 즉 기계가 인간과 같이 입력받은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처리해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가에 대한 답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고실험은 다시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관찰자가 타인을 관찰할 때 결코 그의 심적상태를 활자 읽듯이 명징하게 사실화 할 수 없다. 밑천이 빈약해 더 이상 깊게는 안들어가지만…
아무튼 진퉁과 짝퉁의 얘기다. 표면적 증거만으로는 두 제품의 진/가를 판단할 수 없을때, 과연 어느 하나를 짝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재질이 다를 것이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명품을 구매할 때 엄증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 제품의 재질을 하나하나 검사하지는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커다란 상자처럼 생겼고, 안에 식재료를 넣어 두면 시원하게 만드는 기계를 ‘냉장고’라고 하지 않는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자, 그런데 확실히 진퉁과 짝퉁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이한 소비 유행에 근거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진품 구찌가방은 결코 진품 구찌가방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건 구찌에서 만든 가방이다. 그게 짝퉁이라도 구찌에서 만들었으면, 즉 일반적인 명품의 제품 기준 (견고성, 디자인 등등) 에 미달하는 제품이라 할지라도 그건 진퉁이 되는 것이다. 명품이 더 오래 쓰니까 결국은 합리적 소비다 라고 하는건 순전히 거짓이다. 백만원짜리 진품 가방을 십
년 쓰느니 만원짜리 짝퉁을 일년씩 열번 사는게 훨씬 더 경제적이다.
뻔한 얘기지만 결국 우리가 소비하는 명품은 제품 자체가 아니라 명품이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럼 왜 우리는 그토록 광적으로 진퉁과 짝퉁을 구분하려고 하는가. 왜 짝퉁을 그리도 못살게 하는가. 그정도로 구분하기 힘든 짝퉁이라면 오히려 값싼 짝퉁을 구매해서 진퉁처럼 여기면 될 일이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 이거 진품이야, 하고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진퉁 제조사의 입장에서 그건 말도 안될 일이다. 짝퉁을 인정하고 소비하는 풍조는 그들의 매출 격감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애초 구분하기도 힘든 진퉁과 짝퉁을 계속적으로 구분하게 만들고, 지적재산권이니 무역협정이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진퉁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게 자본의 논리다.
꼬리를 내려야겠다. 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고, 결코 짝퉁 옹호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가져올 수도 있는 경제적 혼란을 노리는 사회교란세력도 아니다. 가끔 우리는 모든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신한카드가 준다는 엄청난 포인트를 당연히 생각하고 쇼를 하면 극장표도 막 주는 걸로, 국민 건강을 걱정한다는 보복부가 매년 담배값 인상을 시도 하는 것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 당연한건 당연한게 아닌게 될 수도 있다. 속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멍청한 플롯 (idiot plot)
멍청한 플롯 idiot plot
문 학과 영화 비평에서, 멍청한 플롯은 관련자들이 하나같이 멍청이들이라서 먹히는 플롯이다. 왜냐하면 멍청한 플롯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이성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편의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류 공포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동료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데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대응할 생각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살인자의 눈에 쉽게 눈에 띄도록 실수를 연발한다. 다시 말해 살인마가 집안을 휘젓고 다녀도 여주인공은 집 밖으로 달아나기는커녕 지하실에 숨을 궁리만 하는 식이다.
이 용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영화에서는 비평가 로저 에벗(Roger Ebert)이 1966년 서부영화 <추한 녀석들 The Ugly Ones>을 리뷰하면서 사용한 이래 자주 이러한 표현을 즐겨 썼고 과학소설에서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제임스 블리쉬(James Blish)가 일찍부터 이러한 언급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한술 더 떠서 과학소설 작가이자 비평가 데이먼 나잇(Damon Knight)은 사회구성원들이 죄다 멍청이여야만 돌아가는 가상의 사회를 담은 과학소설을 “2번째 멍청한 플롯(second-order idiot plot)”이라 이름 지었다.
– SF 카페, 안드로메다 ‘고장원’님 글 가운데서. (http://cafe.naver.com/sfreview.cafe)
잠든 꿈
가끔 의식적으로 감각을 끊고 – 마치 플러그 뽑듯이 – 자욱한, 검고 어두운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 앉는 시늉을 한다. 가끔의 대부분은 외풍이 드는 내 작은 방이 너무 춥게 느껴질 때고,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이 어느 날 다 팔려서 그날 밤 소녀는 켤 성냥을 구하지 못해 얼어 죽었다는 블랙코메디를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아니, 그런데 어차피 소녀는 성냥이 있어도 얼어 죽었던 것 아니었나? 이래저래 가망이 없다.
전에 말 했던 것 같은데, 자각몽 말야. 꿈 속에서 그것이 꿈인 것을 깨닫게 되는 꿈. 드디어 조금씩 나는 그 신비로운 땅으로 접어드는 것 같아.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지. 첫번째 자각몽은 부끄럽게도 통제불능의 난교파티가 되어버렸는데 – 그마저도 끝까지 다 꾸지 못해서 아쉬워 – , 그 꿈을 꾼 다음에 나는 단단히 다짐했어. 고작 포르노 주인공이나 되는데에 귀중한 체험을 소모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두번째 자각몽을 꾸었을 때에, 기억을 역류해서 묻힌 의식의 공간에 들어가 보려고 했지.
네가 사기꾼이라고 말하던 그 프로이트 말야. 그 사람이 그랬데. 꿈은 의식의 검열이 약해지는 시간이라고. 짐작도 못 할 무의식의 꿈틀거림이 투사되는 것이 꿈이라고. 그렇다면 약해진 검열 과정 안에서 명징한 의식을 갖은 사람은 무의식도 총천연색으로 직시할 수 있는게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문을 열었어.’
물론 ‘문을 연다는 것’은 상징적인 행위지. 좀 클리셰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엔 그것 밖에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더라구. 그 곳은 아마 사월이나 오월쯤이 된, 숲 속의 고풍스러운 저택의 서가였던 것 같아. 문득 나는 이것이 꿈인 것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되자마자 초록 잎들에 반사된 녹색광이 넘실거리는 창문 맞은편 벽에 문이 생긴거지.
두려움 같은 건 없었어. 왜냐하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나의 내부와 외부의 적극적인 모순성 같은게 느껴지질 않았거든. 이건 꿈이니까, 탁자며 집이며 바람이나 햇빛, 이 세계 전체가 나의 산물인거야. 그리고 그걸 엄청나게 실감해. 순간적으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게 가능하다면 그게 꼭 이런 기분일꺼야.
미리 짜여져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문을 향해 걸어갔어. 그리고 힘주어 문고리를 돌렸지. 빛, 그리고 빛, 그런데 빛, 그러나 빛, 그래서 빛. 초신성이 폭발하는 순간에 바로 그 앞에 있다면 태양의 백만배나 되는 빛을 볼 수 있데. 그런데 눈부시지가 않아.
그리고 잘 기억이 나질 않아. 그 다음이 정말 중요한 대목인데 말이지.
그런 굉장한 경험들을 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니까 너와 무척 이야기 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밖엘 나갔더니 이미 겨울이더라. 하늘이 파랬어. 공기는 시려워. 너와 교감하고 싶어. 보고 싶어.
그래서 이 편지를 쓴다. 주소는 불명. 안녕, 와일드 오키드. 코퍼스 크리스티 캐롤도 네게 안부를 전해달래.
그럼.
이만 총총.
말싸움
A와 B가 C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진지하고 제대로 된 토론을 본 적이 별로 없으므로, 이 경우 ‘토론’을 ‘말싸움’으로 바꿔 읽어도 뜻은 통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이를테면 올바른 스승 밑에서 정순한 내공을 쌓지 못하고 여기저기 싸움판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터득한 몇가지 잡기로 살아 온 사람들이 쓰는 비겁한 수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장님 따귀 때리기’ 라고 (내가 이름 붙인) 한다.
자, 말싸움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지 일단 잘 들어야 한다. 그는 대부분 상대방이 한 말을 연역하고 덧붙이고 개작해서 새로운 논지를 만들어낸다. 즉, 나는 ‘개고기 도축의 비인간성과 유통 과정의 비위생성’을 이야기 하는데, 상대방은 이것을 ‘개고기 반대론자 -> 친 브리짓트 바르도파 -> 반한파 -> 매국노’ 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그가 상대하는 것은 ‘한민족의 전통성을 부정하는 비열한 매국노의 논리’ 가 되고, 상대방을 논박하여 무너뜨리는 것은 ‘시대가 그에게 내린 역사적 사명’ 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민주 애국 시민들에게 이 존엄한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기를 선동한다.
나는 이런 경우를 많이 봐 왔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데 조중동을 따를 만 한 곳은 없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4265
만화영화 ‘인크레디블 맨’에서 대체 뭘 읽어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이것은 그들의 흔적 가운데 빼어난 수작이다. 기자는 처음부터 ‘좌파 빨갱이들이 주장하는 반민족적 사학법과 언론법 개정’ 을 까기 위해 인크레디블 맨을 개작하기 시작한다. 거기서 ‘내가 사회에 공헌한게 얼만데!’ 하는 소외된 초인가족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한번 더 논지를 꼬기 시작한다. 사학/언론법의 개정이 주는 피해를 기층의 피해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년에 돈 백억 이상 버는 사람들은 누진세를 적용해서 소득의 7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야한다.’ 고 하면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일년 소득의 70퍼센트를 세금으로 내게 생겼습니다! 이건 빨갱이가 국정을 장악한 결과입니다!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이번 대선에서 빨갱이를 몰아내야 합니다!’ 하는 격이다. 그리고 그 뒤에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작게 ‘단, 여러분이 100억 이상을 벌 때의 이야기입니다.’ 고 적는데, 이건 잘 안보인다.
아무튼 수많은 장님 낭인무사들 사이에서 따귀를 맞지 않으려면, 꾸준히 비판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협잡을 깨닫는 것이다. 고작 저런 수법 몇가지로 배운 척, 고매한 척 하는구나 하면서 콧방귀를 뀌어야 한다.
나는 아직도 말싸움을 잘 못한다. 아직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나날이 근검착실하게 고민하는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